사람 잡아먹는 관습은 어디에 있었는가?
혹시 수십 명을 죽인 유영철 같은 사람이 그런 류에 속하지는 않을까?
수백 명을 죽인 사람도 있다는데, 그런 사람이 식인문화의 잔재가 아닐까?
관습(慣習)은 그 나라 또는 지방의 생활문화이다. 그것은 지방마다 다를 수 있고, 지방마다 특이한 행태를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관습에서 우리의 정체성과 조선의 정체성을 가름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밥을 먹는다든가, 그런 밥을 먹는데, 손으로 먹는가, 아니면 숟가락으로 먹는가, 아니면 젓가락으로 먹는가 하는 것 등이다. 밥이 아니면 빵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채식(菜食)인가, 육식(肉食)인가 하는 것도 식생활문화이다. 채식가(菜食家)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채식으로 끼니를 때운다, 반면에 육식가(肉食家)들은 배가 고프면 썩은 고기라도 먹든가, 아니면 뱀이나 쥐라도 잡아먹으려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고기[人肉]를 먹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거의 다 육식가일 것이다. 종족마다 다르겠지만, 대개 채식가들은 농경민족에서, 육식가들은 유목민족에서 그 취향을 달리했을 것이다.
상[명종]이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영경연사 윤개 : 신이 진위사(進慰使) 남궁침(南宮?)의 서계를 보고 또 역관의 말을 듣건대, 중국 일로(一路)에서는 백성이 서로 잡아먹는다 하니 지극히 참혹합니다. 진공(進貢)하는 사신이 어떻게 도달할는지 우려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황제는 오로지 초제(醮祭)를 지내면서 천명(天命)을 비는 데 뜻을 쏟을 뿐이고, 천하의 일을 모릅니다. 산해관(山海關)은 멀리 떨어진 지방이 아닌데도 백성이 서로 잡아먹고 달자가 날뛰고 있지만 황제는 반드시 알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군민(軍民)이 다 언제나 망하려나 하는 마음을 품고 서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데 ‘황제는 남경으로 달아나고 황태자가 즉위하였다.’고까지 하니, 인심과 천명으로 보면 얼마 안 가서 보전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평안도는 중국과 잇닿았으므로, 도둑이 일어나거나 전쟁이 발발하면 관방(關防)이 허술할 것이니, 이러한 일을 특별히 강구해야 하겠습니다. 신이 《경제육전속집(經濟六典續集)》을 보건대, 성시(盛時)에 있어서도 부경(赴京)하는 사신이 으레 사마(私馬)를 끌고 갔으니, 조종(祖宗)의 생각에 일로에서 변고가 있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상 : 중국의 일을 가벼이 논할 수 없으나, 태자를 아직 세우지 않았는데 간사한 신하가 지위에 있고 기근이 매우 심하여 백성이 서로 잡아먹는다니, 지극히 참혹하다. 나는 끝내 어떠한 일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사마에 관하여 아뢴 것은 절실한 말이다.[『명종실록』권24 명종13년 4월 기해(22일)]
이 사료는 1558년 3월인데, 이 글로 보면 산해관 일대의 중국에서는 기근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서로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상[선조] : 경상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윤듀수 : 그렇습니다. 신이 팔거(八莒)에 갔을 때에 사람을 잡아서 먹은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군관(軍官)을 보내어 베었습니다. 양호(兩湖)에 들어갔을 적에는 이런 일이 있다는 말을 못 들었습니다.[『선조실록』권46 선조26년 12월 임자(3일)]
이 사료는 1593년 12월인데, 양호(兩湖), 호서(湖西)․호남(湖南)을 말하며, 이는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서는 사람잡아먹는 말을 듣지 못했다고 했음에도 경상도 팔거현(八莒縣)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사헌부 : 기근이 극도에 이르러 심지어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서도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길가에 쓰러져 있는 굶어 죽은 시체에 완전히 붙어 있는 살점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산 사람을 도살(屠殺)하여 내장과 골수까지 먹고 있다고 합니다. 옛날에 이른바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한 것도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보고 듣기에 너무도 참혹합니다. 도성 안에 이와 같은 경악스런 변이 있는데도 형조에서는 무뢰(無賴)한 기민(飢民)이라 하여 전혀 체포하거나 금하지 않고 있으며 발각되어 체포된 자도 또한 엄히 다스리지 않고 있습니다.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추고하고,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하여금 협동하여 단속해서 일체 통렬히 금단하게 하소서.
상 : 이에 따랐다.[『선조실록』권47 선조27년 1월 (17일)]
류성룡 : 근래 기근이 너무 심해 경릉(敬陵)·창릉(昌陵) 근처에서는 행인을 잡아먹는 자가 있어서 그 옆 둔전관(屯田官)이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여 책(柵)을 세우고 산다 합니다.
윤승길(尹承吉) : 호조(戶曹)에서 천금목(千金木)과 유목피(楡木皮)를 공납할 것을 독촉한다는데 이것은 바로 굶주린 백성을 위해서일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영남에 분정(分定)했다 하는데 영남은 탕패(蕩敗)한 곳이니 외롭게 살아남은 백성에게 어찌 바치기를 독촉할 수 있겠습니까.[『선조실록』권48 선조27년 2월 을묘(6일)]
사헌부 : 지금 전쟁 끝에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이 살길이 이미 끊겨 거의 죽어가고 있습니다. 련곡(輦穀) 아래에도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하고 심지어 모자(母子)가 서로 잡아먹고 부부(夫婦)가 서로 잡아먹는 일까지 있으니 옛부터 상난(喪難)이 있어 왔지만, 지금보다 더 극에 달한 때는 없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참달(慘心변+旦)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기민(飢民)을 진구하고 군대를 조련하는 일 외에는 모든 사역(事役)을 일체 정지하여 오직 인명(人命)을 보존하기에 겨를이 없어야겠습니다. 삼궐(三闕) 옛터는 현재 전혀 방새(防塞)가 없어 꼴 베고 나무하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고 있으니 거기에 군대를 배치하여 지키게 한다는 것은 혹 모르지만, 울을 치고 담까지 쌓는다는 것은 그 주위가 너무 넓어서 굶주림에 시달린 잔졸(殘卒)들이 쉽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부역(赴役)하다가 길가에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보기에 더욱 불쌍한 일이며, 백성을 돌봐야 하는 뜻으로 볼 때도 역시 매우 미안한 일이니, 삼궐의 역사(役事)를 정지하도록 명하소서.
상 : 이에 따랐다.[『선조실록』권50 선조27년 4월 갑인(6일)]
이 사료에서 1594년 1월에는 도성(都城) 안팎에서 사람잡아먹는 일이 허다함을 말하고 있고, 2월에는 행인(行人)마저 잡아먹는다고 했다. 물론 그 까닭이야 굶주림 때문이다. 그리고 4월에는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통에 굶어죽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을 뿐 아니라, 어미와 자식[母子]가 서로 잡아먹고, 남편과 아내[夫婦]가 서로 잡아먹는 일까지 생겼으니, 이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상[선조]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 및 비변사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인견하였다.
상 : 도사(都司) 장삼외(張三畏)의 자문(咨文)을 보니, 산동(山東)의 양곡을 지급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무슨 뜻인가?
영의정 류성룡 : 호택(胡澤)에게 물으니 답하기를 ‘내가 바로 산동 사람인데 산동은 바람과 파도가 극히 험난하여 싣고 오기가 어렵다.’고 하였고, 척금(戚金)은 ‘중국 조정 역시 소비가 극히 번다하기 때문에 국가의 비축이 떨어졌다.’고 하였으며, 급사중(給事中)의 제본(題本)에는 ‘국가의 비축이 한 달을 유지할 양식도 없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보면 중국 조정 역시 군량이 넉넉하지 못함을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 반드시 군량을 먼저 수송한 다음에야 병사를 발송(發送)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니 병사를 출동시킬 수 없는 형세인 듯합니다.
상 : 시랑(侍郞) 고양겸(顧養謙)이 만일 주려고만 하면 줄 수도 있는데 반드시 우리 나라 선박으로 실어 와야 하니, 마땅히 선박을 먼저 준비하고서 고 시랑에게 다시 자문을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병조 판서 리덕형(李德馨) : 일이 이미 다급한데 고 시랑에게 어찌 자문을 보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상 : 지난번에 유격(遊擊) 주홍모(周弘謨)의 말을 들으니 올바르게 말하였다. 이 사람도 본래 심유경(沈惟敬)과 일반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중국의 공론(公論)이 발의된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다.
공조 판서 김명원(金命元) : 조만간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키려고는 하는데, 다만 양초(粮草)가 준비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어쩔 수 없이 임기응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조 참판 심충겸(沈忠謙) : 허진(許晉)을 보고 물었더니, ‘상서(尙書) 석성(石星)은 이미 환히 알고 있으나, 다만 송응창(宋應昌)과 교분이 두텁기 때문에 사정(私情)에 이끌리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김명원 : 제독(提督) 리여송(李如松)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아직 복명(復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상 : 항표(降表)도 시랑 고양겸에게 있으나, 상주(上奏)하지 않았다고 한다.
류성룡 : 주홍모가 가져온 방문(榜文)도 꼭 믿을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다른 방문으로 보여준 듯합니다.
상 : 지나친 생각이다. 굳이 다른 방문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아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심충겸 : 중국 장수들이 슬쩍 상대방의 낯빛을 살피고 나서 거짓으로 그럴 듯한 말을 해놓고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들의 상투적인 태도이니, 주홍모의 말인들 어떻게 모두 믿을 수 있겠습니까.
류성룡 : 오가는 문서를 전일에는 등서하여 보여주지 아니하였는데, 이번에는 유독 등서하여 보여주니 이 역시 의심스럽습니다.
최흥원(崔興源) : 굶주린 백성들이 요즘 들어 더욱 많이 죽고 있는데, 그 시체의 살점을 모두 베어 먹어버리므로 단지 백골(白骨)만 남아 성(城)밖에 쌓인 것이 성과 높이가 같습니다.
류성룡 : 비단 죽은 사람의 살점만 먹을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도 서로 잡아먹는데, 포도군(捕盜軍)이 적어서 제대로 금지하지를 못합니다.
리덕형 : 부자형제(父子兄弟)도 서로 잡아먹고 있으며, 양주(楊州)의 백성은 서로 뭉쳐 도적이 되어 사람을 잡아먹고 있습니다. 반드시 조치를 취하여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뒤에라야 서로 죽이지 않게 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금지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심충겸 : 가등청정이 경주(慶州)에 서신을 보낸 것은 반드시 그럴 만한 곡절이 있어서였을 텐데, 류총병(劉總兵)이 임기응변 하려고는 하지 않고, 호남(湖南)으로 진을 옮겼으며, 주홍모는 심유경의 화친하는 것을 반대하는 일로 적진에 들어갔으니,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가등청정이 반드시 한차례 위협하고 약탈하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깊이 염려됩니다. 또 가등청정의 마음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류총병이 관백(關白)을 도모하라는 말로써 글을 써서 들여보냈으니, 그들로서는 크게 성을 내어야 마땅할 텐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하였다.[『선조실록』권49 선조 27년 3월 무술(20일)]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을 잠깐 살펴보자.
장삼외(張三畏)는 료동도사(遼東都事)였는데, 선조26년 8월 28일에 정원에서 ‘산동(山東)에 사들인 쌀 14만 석이 있는데 이곳에 온 쌀은 1만 석도 채 되지 않으며, 료동해(遼東海)에 민간의 비상량(備上糧)이 14만 석이 있는데 이곳에 온 것은 겨우 1십만 석뿐이다. 지금 2만 명의 류병(留兵)이 하루에 먹는 량이 4백 석이나 되니, 그대 나라에서 어떻게 마련하여 공급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양곡을 청하고자 한다면, 빨리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 나라가 잔파(殘破)되어 군량이 떨어졌으니, 끝까지 구원의 은혜를 내려 접제(接濟)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뜻으로 경략에게 이자(移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따랐다.
호택(胡澤)은 중국의 책사(策士)로서 참장(參將)이었다. 선조 25년 4월 1일에 중국 장수 동지(同知) 심사현(沈思賢)과 책사(策士) 호택(胡澤)·서행(徐行)·오행도(吳行道)가 가산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서 역관(譯官)을 만나서 들어왔다.
척금(戚金)은 선조25년엔 유격(遊擊)으로 조선에 왔는데, 이 때는 총병(摠兵)이다.
이 글의 시기는 선조 27년 3월이니, 임진왜란이 벌어진지 3년째 되는 해요, 중국군사들이 조선에 파병된 지도 2년이 지난 1594년이다.
여기서 하루에 군사 2만 명의 쌀 소비량이 하루에 400석이라고 했으며, 쌀을 운반해오는 곳이 산동(山東) 지역이며, 그 량은 28만석이었다. 이 정도는 무려 700일, 즉 2년치의 군량이다.
그 수송을 조선에서 담당해야 했다. 1척에 1000석을 싣는 배라면 280척이 필요하며, 2000석을 싣는다고 하더라고 무려 140척이 필요하다. 엄청난 수송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에 일본과의 해전에 참가하는 배도 모자라 야단인데 말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최흥원․리덕형의 말에서 보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食人]는 것이다. 그런 행위가 양주(楊州) 백성들이라 하여 그들이 강소성 지역으로 본다면, 당연히 한반도와는 상관이 없으므로, 그 한반도 조선의 임금이 왈가왈부할 성격이 아니다. 그런데 그 말 가운데서 “반드시 조치를 취하여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뒤에라야 서로 죽이지 않게 될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금지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고 한 것은 분명 조선의 임금이 어떤[食人禁止] 조치를 취해주어야만 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산동 지역이라는 말이 조선의 일부라는 말이라야 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사람을 잡아먹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 이루어지는가?
여기서는 “굶주림” 때문이라고 했다. 굶주림[기근(饑饉)]에는 흉년(凶年)이나, 가난[艱難]으로 식량의 부족에서 빚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가난으로 식인(食人)행위는 그런 관습 내지 문화가 형성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현재 한반도에서는 식인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아니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부모봉양에서 효도를 행하는 과정에서 살점을 떼어 먹였다거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부모의 입에 넣어 생명을 구했다는 전설은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구전은 없다.
그런데 조선 력사 속에서는 상당한 자료가 나온다.
1894년에 출판했다는 샤를 루이 바라(Charles Louis Varat : 1842-1893)와 샤이에 롱(Chaillé Long : 1842-1917)이 지은《Deux Voyages en Corée(조선기행)》(성귀수 옮김, 도서출판 눈빛, 2001)에 보면 다음과 같은 식인(食人)에 관련된 것이 적혀 있다.
1888년, 곧 이어 장안에는 선교사들이 첩자를 고용해 조선의 어린아이들을 납치하고 있으며, 납치된 아이들을 삶아 먹고 있다는 괴이한 소문이 유포됐다. … 1888년 6월 17일, 수도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 아울러 1888년 당시 조선인의 문화적인 척도를 가늠하게 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생각에 여기 그 일부를 인용한다. “최근, 외국인들이 우리의 자녀들을 돈으로 사다가 끓여서, 결국 먹어버리고 있다는 괴소문이 횡행하고 있다. 실제로 거리 여기저기서 아이들을 훔치는 도둑들이 속속 붙잡히고 있다. 만약 외국인이 우리의 아이들을 잡아먹고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분노를 참지 못할 것이나, 현재로선 아직 그것이 사실인지 단언할 수 없는 실정이다.” … 결국 느닷없이 외국 해군의 진입으로 “아동식인(兒童食人)”이라는 터무니 없는 죄목을 덮어씌워 수도에 있는 1백여 명의 유럽인들을 말살하려던, 그리하여 전반적인 혼란을 틈타 왕과 세자를 몰아내고 스스로 옥좌를 차지하려던 대원군의 야심은 한낱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만다.(pp. 267-268)
이것은 일단 조선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잡아다 먹었다는 말이다. 샤이에 롱은 직접 눈으로 확인을 못한 것이지만, 당시 소문은 그렇게 났던 것이다.
일단 이 글에서 지역이 “장안”이라고 했는데, 그 글의 원문이 “Chang-an”인지, “Séoul”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번역문대로 “장안(長安: Chang-an)”이라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조선사람이든,《조선왕조실록》자체이든, 그런 행위들과 지리적 위치가 모두 중국대륙을 말하는 것이다.
제주 목사 노정(盧錠)의 치계 : 본도(本島) 세 고을 민생의 일은 이미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백성이 산에 올라가 나무 열매를 줍는데 나무 열매가 이미 다하였고 내려가 들나물을 캐는데 풀뿌리가 이미 떨어졌으므로 마소를 죽여서 배를 채우고 있으며, 무뢰한 자들은 곳곳에서 무리를 지어 공사간의 마소를 훔쳐서 잡아먹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리하여 서로 사람들끼리 잡아먹을 걱정이 조석에 닥쳤으니 비참한 모양을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8월부터 죽을 장만하여 구제하고 있으나, 창고의 곡식이 이미 다하여 4만여 명의 굶주린 백성을 다시금 구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연해안 고을의 소금을 넉넉히 들여보내소서. 전일 옮겨 온 5000석의 곡식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1, 2월 두 달의 진휼할 거리도 모자라므로, 3, 4월에는 한 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이어서 진구할 방책을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소서.[『현종실록』권19 현종 12년 1월 임오(30일)]
상[현종] : 생각건대, 갖은 고생을 겪으며 어렵사리 견디어 다행히 가까스로 생존한 저 백성들마저 또 장차 죽어가는 상황을 멀거니 서서 보게 될 것인데, 백성이 전부 쓰러져 죽게 되면 나라는 장차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바야흐로 지금은 봄이 무르익어 만물이 소생을 하고 겨우내 움츠리고 지내던 것들이 모두 즐거움을 맞고 있는데, 저 우리 백성들은 홀로 위망(危亡)에 허덕이는데도 누구 하나 보살피는 자가 없다. 이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듯 쓰린 심정이다. 슬프도다. 민간의 풍속이 크게 파괴되어 윤기(倫紀)가 끊어짐으로써, 어미로서 자식을 잡아먹는 자가 있고 아내로서 지아비를 죽이는 자가 있었으며, 좀도둑과 간사한 무리들이 제멋대로 설치어, 말푼 곡식을 노려 분탕질을 해대고 한 소쿠리 밥을 탐내 사람을 해쳤다. 이는 모두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다 못해 그 본심을 잃은 것이나, 우리 백성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모두 나의 허물이지 저들이야 무슨 죄가 있는가.[『현종개수실록』권25 현종13년 3월 임술(16일)]
이 사료에서 제주목사가 1671년(현종12) 1월의 사건을 적은 것인데, 제주(濟州)에는 산야의 열매와 초근목피(草根木皮)마저 다 먹었고, 짐승을 훔쳐서라도 잡아먹고, 사람들끼리 잡아먹기도 하였다는 끔직한 내용이다. 굶주린다고 해서 이런 사태까지 진전될 수 있을까?
그리고 1672년(현종13) 3월에는 현종 임금이 자책(自責)하며, 죽을죄 이하 잡범들을 사면하면서 내린 교서이다. 이것은 다른 왕조에서 변란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평소에 기근이 들어서 발생된 식인 상황을 말하고 있다. 임금의 덕치, 즉 백성을 위한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일깨워주는 말이다.
이런 것은 배가 고프기만 하면 사람을 잡아먹는 경험으로 말미암아 버릇이 되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관습의 문화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2005년 9월 3일 미국 뉴올리언스가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래습 6일째 되는 날에 그곳 시민들은 “부시가 흑인들을 죽이고 있다. 흑인들 중에 생존을 위해 인육(人肉)을 먹은 이도 있다.”는 험악한 주장과 소문이 급속히 번졌었다.[『조선일보』2005년 9월 5일 A1 "검은 분노" 허용범․김희섭 기자 뉴올리언스를 가다.]
세계에서도 가장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도 재난이 들이닥치면 사람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보다. 다만 사람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다는 명분보다는 과거의 그런 관습에서 비롯되어 현대판 식인재현이 발생되는 것이다.
그렇다면《명사(明史)》에서는 어떻게 기록되어있을까?
1593년에 강북(江北)․호광(湖廣)․하남(河南)․절강(浙江)․산동(山東)에 기근(饑饉)이 심하게 들었다.[『明史』卷20 本紀20 神宗1 “萬曆二十一年, 是年 振江北湖廣河南山東饑. 河南曠賊大起.”]
1594년 1월 20일에 성(省)마다 재해(災害)의 손실을 입었는데, 산동(山東)․하남(河南)․서주(徐州)․회수(淮水) 지역이 더 심했으며, 도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위의 책, “萬曆二十二年春正月己亥 詔以各省災傷, 山東河南徐淮尤甚 盜賊四起.”]
이로 보면, 기근이 중국대륙에서 발생했고, 그로 말미암아 도둑떼들이 횡행한 것만은 사실로 밝혀졌지만, 그로 말미암아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말은 없다.
식인문화는 중국대륙에서는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중국대륙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220차례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다. 이 식인에 관련된 관습은 그 발생지가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을 보면 한족(漢族)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먼저 든다.
한(漢)은 한(韓)과는 다르며, 전족과 마찬가지로 탕구트(Tangut)에 그 뿌리를 둔다.
좀더 두고 밝혀볼 필요가 있다.
선조 09(1576년)년 6월26일 기사.
"남의 배를 갈라 사람을 죽인 자를 체포하는 일을 해조로 하여금 공사로 만들게 하라."
조선시대, 인육(人肉, 사람의 고기)과 사람의 간담(肝膽, 간과 쓸개)을 창질(瘡疾, 매독)을 치료하는 약으로 썼기 때문에 배를 가르고 사람의 장기를 빼가는 무리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흉악한 무리들이 소아(小兒)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유괴하여 살해함은 물론이고 비록 장성한 남녀라도 혼자 길을 가는 경우에는 겁략하여 모두 배를 가르고 쓸개를 꺼내어 갔다고 한다. 그 쓸개를 팔면 많은 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무에 묶여 배를 갈리운 자가 산골짝에 잇달아 있으므로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러 산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왕명으로 법을 만들어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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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것은 우리 나라에서도 인육 거래가 실존했음을 보여 주는 기사다.
하지만 식용보다는 약용으로서 찾았던 것 같다.
민간 의료행위로 볼 때, 이것은 오래전부터 존속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임진대환란 당시에는 약용이 아닌 식용으로 먹는 일이 실존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아마도 유성룡의 징비록이나, 조경남의 난중잡록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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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22년(1696년) 2월5일자 실록.
"평안도의 굶주린 백성 이어둔(李於屯)이 사람의 고기를 먹었는데 임금이 그것이 몹시 굶주려서 실성하였기 때문이라 하여 특별히 사형을 감면하라고 명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고 한다.
[출처] 조선시대 식인 기록|작성자 예이츠
人食う慣習はどこにあったのか?
もし数十人を殺した柳永哲みたいな人がそんな類に属しないか?
数百人を殺した人もいるというのに、 そんな人が食人文化の残在ではないか?
慣習(慣習)はその国または地方の生活文化だ。 それは地方ごとに違うことができるし、 地方ごとに珍しい行動を見せることもできる。 私たちはこんな慣習で私たちのアイデンティティと朝鮮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区分し出すこともできるでしょう。
すなわち、 ご飯を食べるとか、 そんなご飯を食べるのに、 手で食べるか、 ではなければさじで食べるか、 ではなければ御箸で食べるかと言うことなど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