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광개토대왕비문에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남하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등을 공취하고, 그 수도를 공격하였다. 백잔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인핍(因逼)해져, 남녀 생구 1천명과 세포 천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城) 700촌(村)을 획득하고 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9년(399) 기해년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 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 경자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수병(安羅人戌兵) 신라성 성(新羅城 城)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廳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하였다.
14년(404) 갑진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지역에 침입하였다.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 연선(連船)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수 차례에 걸쳐 고구려군에게 패배하여 서기 404년경 백제의 아신왕은 맏딸 오시사카노 오오나카쯔 히메(忍坂大中女命)를 고구려에 바쳤다. 그녀는 腆支王 (意富富杼王) 의 친 누이이다. 고구려는 그녀를 고구려의 왕자 高珍의 배필로 삼았는데 고진이 일본을 점령하고 允恭천황이 된 것이다. 백제의 仁德천황, 履中천황 부자가 전사하였고 高珍은 나니와(難波)에 개선장군으로 입성한다. 妹弟 高珍이 입성한 서기 432년, 奈良에 있는 치온지(置恩寺)의 큰 부처 意富富杼王은 사망했다. 혁명적인 역사의 현장에 있던 황후 오시사카노 오오나카쯔 히메(忍坂大中女命)의 힘으로도 친 오빠 意富富杼王를 살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리하여 백제의 전지왕, 意富富杼王은 葛城市 葛城山의 동쪽 산 기슭, 나라 분지를 내려다 보는 표고 200m의 고지대에 있는 후타쯔카 고분(二塚古墳)에 묻혔다. 보통 제니토리총(錢取塚)으로 불리나 실재로 腆支塚일 것이다. 고분의 동쪽으로 大和 三山 (耳成山, 畝傍山, 天香久山)을 내려다 보는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고분의 규모는 전장 60m, 후원부경 36m, 전방부폭 41m로 높이 10m의 전방후원분이다. 1개의 고분에 횡혈식 석실이 3개나 설치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