メインへ

KJCLUB 日韓文化交流へようこそ。

kkk復讐氏姓

閲覧数 : 140
KO 255 nakazima 2,811,753
うちの先祖たちは三国時代にもう氏姓を使った. それは三国史記, 三国有史で根拠を捜してみることができる. そして私たちがよく分かっている高句麗乙支文徳(乙支文徳), ヨンゲソムン(淵蓋蘇文), 百済のフックジサングジ(黒歯常之), 付与忠誠(扶余忠勝), 新羅キム・ユシン(金〓信) 将軍などで分かるように当時氏姓は単一(単一) 氏姓より復讐(復数) 氏姓が多かった.
しかし日本は王室と貴族たちは韓国の影響でずいぶん前から声明(名前)を持ったが大部分庶民たちは 19世紀後半には声明(名前)を持ったことで見える.
日本の古代史には幾多の韓国高官名詞たちの名前が出ている. 日本の古事記によれば日本歴史で一番先に複姓の名前で登場したことも百済人授受腰(須須許里)だ. 日本の古代氏族を記録した四書(史書)に注目されることが 815年に編纂されたシンチァンソングシロック(新撰姓氏録)だ. このソングシロックに登場している古代先祖たちは新羅, 百済, 高句麗王族と高官たちの子孫の大部分だ. この本に記録された氏姓は約 300余個なのに代表的に次のようだ. なかでも百済王族の氏姓では日本語でクダだと(百済), イワノ−(石野), オオカ(大丘), マツダ(沙田), Sugano(菅野), オカなの(岡屋), ハルノ−(春野), オハラ(大原), 中野(中野), クニモト(国本), 出る(長田)などの複姓と, Hayashi(林), 後尾(文)さんなど単性がある.
新羅後に氏姓たちはヤマムだと(山村), ミヤに(三宅), ウナバだと(海原), 呉理(大市), ダケしなさい(竹原), 山田(山田), 豊原(豊原) などの複姓とIto(系)時など単性がある. 高句麗氏姓は雇馬(高麗), 出よう(長背), ナニと(難波), よめしゅうとめ(後部), ダカイ(高井), ダカーだ(高田), クワしなさい(桑原), 餓死するように(朝明), 吉井(吉井) などの複姓と高(高), 五(王), シマ(島)さんなどの単性がある.
そして刮目することは古代日本の官吏になった人の官名と声明(名前)を “ズングブドックソルモックヒョブグムドン(中部徳率 木傀今敦)” などのように百済とまったく同じく使ったという点だ. すなわち官職名称と氏姓と名前の 3要素を取り揃えていた. これは古代奈良(奈良)時代職制などが日本朝廷の実権を持った百済人によって作られたと見えるからだ.

日本の歴史書よれば 1603年ドクがと家康(徳川家康)は “名字台も金(命字帯刀 禁)”と言う(のは)法令を作って平民が性を持って腰に刀をさして無事貴族行事ができないようにして, もしこれを破れば厳罰を下げた. 日本は明治維新(明治維新) 以後 1870年 9月 19日日本政府ですべての人が氏姓を作って使うように包告領を下げた. “これから平民もミョオだ(苗字: 名字)を作って使うように承諾する”したから以前まで日本平民たちは声明(名前)がなかったと見える.
当時日本政府は戸籍を確かにして徴兵目的に置いていたが長年の封建社会から過ごした平民たちは姓名を作らないで申告を忌避した. 日本政府は 1871年日本内閣の最高機関である大政官(太政官)が賎民たちも平民で身分をあげてくれる “台鼎科包告”という “身分解放領(身分解放令)”を下げて社会階級を華族(華族), 蛇足(士族), 卒(卒), 平民(平民)の 4民(四民)で分類した. その後 1873年大政官はまた徴兵領を下げて満 20歳以上男は 3年間余分の服務をするようにした. しかしたまに良い氏姓を好んで幕府官家にお金を捧げて氏姓を買う者もいたが多くの平民たちは税金と軍隊行くのを恐ろしくて申告をしなかった. ここに大政官は 1875年 2月に “ミョングザピルチング義務領(命字必称義務令)”を下げて氏姓を作らなければ厳罰するようにした.
日本僑民たちによればその頃いっぺんにその多い創氏をしようとするからいろいろのエピソドが多かったと言う. 急に氏姓を作りために有識者たちの行悖で別個別氏姓ができたのだ. 例えばクンベム(大蛇), 狐して(狐鼻), メドキ(百目鬼), ヒトカベ(人首), ウキ(浮気:浮気), シナシ(尻無:尻がない), ショオユ(醤酒: 醤油), ワショク(華食), 後で(風呂: 風呂場), ホズミ(8月1日), 土偶だ(冬至), ヌクイ(明日), シアトー(刺刀: 鋭い刀), 度に(時計), イエデ(家出), ナナの時(名無), 反歯(番地) などだ.
したがって筆者は日本の氏姓を卑下じるのではなく当時日本人口の 95パーセントが同時に新しい氏姓をマンドルリョだから数満開の氏姓中変な氏姓が出るしかなかったと見る.
渡辺美智雄(渡辺三男)教授は彼の著書 ‘日本の聖者(姓字)’で日本性の 28パーセントが百済, 新羅, 高句麗人の基本性であり, ハラジマレイジー(原島 礼二)教授も ‘シンチァンソングシロック’に登場する氏姓の中 32パーセントが韓国から来た氏姓と主張している. したがって日本氏姓の 30パーセント以上が韓国で渡った性であり, 1875年以後建てられた大部分氏姓も韓国古代氏姓を模倣したと見える. 特に現在日本の氏姓の中新羅で渡った山田(山田), Shimizuさん(清水), 百済で渡ったHayashi(林), 野馬区だ(山口) などは日本で 20代中に入る大成(大姓)だ. またクダだと(百済), クダラキ(久多良木), 冷えること(新羅), シラキ(白木), 雇馬(高麗), コーマ(駒)さんなどの三韓時代国名をそのまま使っている韓国人の後裔たちもまだ色んな所でたくさん捜してみることができる.
原文を見る

kkk복수성씨

우리 선조들은 삼국시대에 이미 성씨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 연개소문(淵蓋蘇文), 백제의 흑지상지(黑齒常之), 부여충성(扶餘忠勝),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성씨는 단일(單一) 성씨보다 복수(復數) 성씨가 많았다.
그러나 일본은 왕실과 귀족들은 한국의 영향으로 오래전부터 성명을 가졌으나 대부분 서민들은 19세기 후반에야 성명을 가진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의 고대사에는 수많은 한국 고관 명사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일본의 고사기에 의하면 일본 역사에서 가장 먼저 복성의 이름으로 등장한 것도 백제사람 수수허리(須須許里)이다. 일본의 고대 씨족을 기록한 사서(史書)로 주목되는 것이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이다. 이 성씨록에 등장하고 있는 고대 선조들은 신라, 백제, 고구려 왕족과 고관들의 후손이 대부분이다. 이 책에 기록된 성씨는 약 300여 개인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그중 백제 왕족의 성씨로는 일본어로 쿠다라(百濟), 이와노(石野), 오오카(大丘), 마쓰다(沙田), 스가노(菅野), 오카야(岡屋), 하루노(春野), 오하라(大原), 나카노(中野), 쿠니모토(國本), 나가다(長田)등의 복성과, 하야시(林), 후미(文)씨 등 단성이 있다.
신라 후에 성씨들은 야마무라(山村), 미야께(三宅), 우나바라(海原), 오이치(大市), 다께하라(竹原), 야마다(山田), 토요하라(豊原) 등의 복성과 이토(系)시 등 단성이 있다. 고구려 성씨는 고마(高麗), 나가세(長背), 나니와(難波), 고부(後部), 다카이(高井), 다카다(高田), 쿠와하라(桑原), 아사케(朝明), 요시이(吉井) 등의 복성과 고(高), 오(王), 시마(島)씨 등의 단성이 있다.
그리고 괄목할 것은 고대 일본의 벼슬한 사람의 관명과 성명을 “중부덕솔 목협금돈(中部德率 木傀今敦)” 등과 같이 백제와 똑같이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즉 관직 명칭과 성씨와 이름의 3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고대 나라(奈良)시대 직제 등이 일본 조정의 실권을 가진 백제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책 의하면 1603년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명자대도 금(命字帶刀 禁)”이란 법령을 만들어 평민이 성을 갖고 허리에 칼을 차고 무사 귀족 행사를 못하게 하고, 만약 이를 어기면 엄벌을 내렸다.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1870년 9월 19일 일본정부에서 모든 사람이 성씨를 지어서 사용하도록 포고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평민도 묘오지(苗字: 名字)를 지어 쓰도록 허락하노라”하였으니 그전까지 일본 평민들은 성명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당시 일본정부는 호적을 확실히 하여 징병목적에 두고 있었으나 오랜 봉건사회에서 지내온 평민들은 성명을 짓지 않고 신고를 기피하였다. 일본정부는 1871년 일본내각의 최고 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이 천민들도 평민으로 신분을 올려주는 “태정과포고”라는 “신분해방령(身分解放令)”을 내려 사회 계급을 화족(華族), 사족(士族), 졸(卒), 평민(平民)의 4민(四民)으로 분류하였다. 그후 1873년 태정관은 다시 징병령을 내려 만 20세 이상 남자는 3년간 군 복무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간혹 좋은 성씨를 선호하여 막부관가에 돈을 바쳐 성씨를 사는 자도 있었으나 많은 평민들은 세금과 군대 가기를 두려워 신고를 하지 않았다. 이에 태정관은 1875년 2월에 “명자필칭 의무령(命字必稱義務令)”을 내려 성씨를 짓지 않으면 엄벌하도록 하였다.
일본 교민들에 의하면 그 당시 한꺼번에 그 많은 창씨를 하려니 갖가지 애피소드가 많았다고 한다. 갑자기 성씨를 짓기 위해 유식자들의 행패로 별개별 성씨가 생겨난 것이다. 예컨데 큰뱀(大蛇), 여우코(狐鼻), 메도키(百目鬼), 히토카베(人首), 우키(浮氣:바람끼), 시나씨(尻無:엉덩이가 없다), 쇼오유(醬酒: 간장), 와쇼쿠(華食), 후로(風呂: 목욕탕), 호즈미(8월1일), 토우지(冬至), 누쿠이(明日), 시토(刺刀: 날카로운 칼), 도께(時計), 이에데(家出), 나나시(名無), 반치(番地) 등이다.
따라서 필자는 일본의 성씨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 인구의 95퍼센트가 동시에 새로운 성씨를 만들려니 수 만개의 성씨중 이상한 성씨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와타나베 미치오(渡邊三男)교수는 그의 저서 ‘일본의 성자(姓字)’에서 일본성의 28퍼센트가 백제, 신라, 고구려인의 기본성이며, 하라지마 레이지(原島 禮二)교수도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성씨 가운데 32퍼센트가 한국에서 온 성씨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 성씨의 30퍼센트 이상이 한국에서 건너간 성이며, 1875년 이후 지어진 대부분 성씨도 한국 고대 성씨를 모방하였다고 보여진다. 특히 현재 일본의 성씨 가운데 신라에서 건너간 야마다(山田), 시미즈씨(淸水), 백제에서 건너간 하야시(林), 야마쿠지(山口) 등은 일본에서 20대 안에 들어가는 대성(大姓)이다. 또한 쿠다라(百濟), 쿠다라키(久多良木), 시리기(新羅), 시라키(白木), 고마(高麗), 코마(駒)씨 등의 삼한시대 국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한국인의 후예들도 아직도 여러곳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いいね・コメントにはログインが必要です。

コメント ( 1 )

投稿一覧

2,811,753

  1. JA 62 joayok
  2. 閲覧数 : 4,395
    KO 0 japahelp
  3. JA 0 まちみ
  4. KO 0 Member_55
  5. KO 42 래밸
  6. JA 0 パイン
  7. 閲覧数 : 4,753
    KO 140 컴순이
  8. KO 140 컴순이
  9. KO 0 Taeyoon
  10. KO 0 Member_65632
  11. JA 0 まちみ
  12. KO 0 Member_1
  13. KO 0 Memb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