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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隷日本力を出し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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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百済の滅亡に衝撃を受けた倭国

百済の滅亡は周辺国たちにも大きい影響を及ぼしました. 特に百済を先祖の国, 師匠の国と思っていた倭国が最大の衝撃を受けたんです.

663年 9月復興百済国の首都だった主類性が唐に陷落されると倭国では百済がまた生き返える希望が消えたと思うようになります. ‘日本書紀’には日本人たちが “これから百済の名前が切れるようになった. 先祖の墓がある所にどんなにまた行くことができるか?”と嘆いたという記録が残っています.

西紀 660年百済椅子王が新羅と党連合軍に降参をすると国を失った百済流民たちは海を渡って今の九州島北部で寄り集まりました. 百済の滅亡に大きく荒てた倭国の除名女王は百済を救援するために親しく軍事を導いて首都だった飛鳥から九州に移動します.

除名女王は百済の滅亡を自分の国の滅亡とまったく同じく受け入れました. 一部学者たちは除名女王を椅子王の妹さんだと言ったりします. 倭国全域で軍事たちを集めて百済に送ろうと思うほどだったそうです.

当時倭国は日本列島全体を支配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です. 軍事を送ろうとすれば各地の豪族たちが自分が従えた軍事を渡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らちょっと時日がかかったんです. そうな間除名女王が 661年 7月 24日死んでしまいました.

その息子天地王はお母さんの意を奉じて 8月百済派遣軍編成を完了したんです. それからは 9月に百済王子付与風を護衛して百済地に行かせる事にします. この時倭国の軍事 5000 人が一緒に派遣したんです. 天地王はこの事を終えた後こそ倭国の首都である飛鳥に帰って 11月お母さんの殯所を用意します. 死んだ女王の葬式より百済救援軍派遣がもっと重要だったのですね.

661年から百済復興軍のために積極協調した倭国は 2 年半にかけた準備期間をあげく 663年 3月戦艦 1000 尺と兵力 2万 7000 人を百済に送りました. 倭国としては全力を尽くして百済を助けたのです. しかしその年 8月新羅君を攻撃する計画でバックガングに付いて軍隊を進入させようとしたが全滅に近い敗北に喫してしまいます. 唐軍隊が先に川で待ったからで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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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こでバックガングは金剛河口, または全羅北道にあるトンジン川河口, 忠南牙山君南側の唐津郡周辺というなどさまざまな見解たちがあります.

■ 百済の陰から脱した日本

百済復興軍の内紛でまともに連合作戦を広げ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ことも敗北の一原因です. バックガング戦闘の敗北は倭国におびただしい衝撃を与えたんです. すぐ新羅と党が連合して日本列島で攻撃して来るはずだという恐ろしさを持つようになったのですね.

すると倭国は韓半島と一番近くの九州島北に 663年から城を積み始めます. 百済亡命貴族の指導によってテゼブ官庁と都城も作ります. テゼブを防御するために平地には水性を, 山にはたらい性と奇異性を積みました. テゼブと言う(のは)倭国が韓半島と交流した入口で, 倭軍が百済を助けるために出発した所でもあります. 九州島全体を統治する所と同時に, 倭国の外交を主観する官庁だから非常に重要でした.

テゼブの防御構造は高句麗と百済で見える平地性と山城の結合された形態です. 倭国ではこの外にも局地性, Ito性など各地に百済方式で 11 個の酸性を積んで唐と新羅の侵略に備えました.

しかし倭国が気づかった唐と新羅の侵略はなかったです. 倭国は新羅を大きく牽制して外交関係を切りました. もう日本列島に孤立した倭国は自らの道を歩くために 670年国名前を日本に変えます.

日本に移った百済流民たちは日本政府で高い官職を受けて, 日本古代文化発展に大きい役目を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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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일본 힘내


■ 백제의 멸망에 충격을 받은 왜국

백제의 멸망은 주변국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백제를 조상의 나라, 스승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던 왜국이 가장 큰 충격을 받았지요.

663년 9월 부흥 백제국의 수도였던 주류성이 당나라에게 함락되자 왜국에서는 백제가 다시 살아날 희망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본서기’에는 일본인들이 “이제 백제의 이름이 끊어지게 되었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에 어떻게 다시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서기 660년 백제 의자왕이 신라와 당 연합군에 항복을 하자 나라를 잃은 백제 유민들은 바다를 건너 지금의 규슈섬 북부로 몰려들었습니다. 백제의 멸망에 크게 당황한 왜국의 제명 여왕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수도였던 아스카에서 규슈로 이동합니다.

제명 여왕은 백제의 멸망을 자기 나라의 멸망과 똑같이 받아들였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제명 여왕을 의자왕의 여동생이라고 말하기도 해요. 왜국 전역에서 군사들을 모아 백제에 보내려 할 정도였답니다.

당시 왜국은 일본 열도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했어요. 군사를 보내려면 각지의 호족들이 자기가 거느리던 군사를 내줘야 했기 때문에 다소 시일이 걸렸지요. 그러는 사이 제명 여왕이 661년 7월 24일 죽고 말았습니다.

그 아들 천지왕은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8월 백제 파견군 편성을 완료했지요. 그리고는 9월에 백제 왕자 부여풍을 호위해 백제 땅으로 보내기로 합니다. 이 때 왜국의 군사 5000 명이 함께 파견했지요. 천지왕은 이 일을 마친 뒤에야 왜국의 수도인 아스카로 되돌아가 11월 어머니의 빈소를 마련합니다. 죽은 여왕의 장례식보다 백제 구원군 파견이 더 중요했던 것이지요.

661년부터 백제 부흥군을 위해 적극 협조했던 왜국은 2 년 반에 걸친 준비 기간을 끝에 663년 3월 전함 1000 척과 병력 2만 7000 명을 백제로 보냈습니다. 왜국으로서는 온 힘을 다해 백제를 도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해 8월 신라군을 공격할 계획으로 백강을 따라 군대를 진입시키려다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당나라 군대가 먼저 강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백강은 금강 하구, 또는 전라 북도에 있는 동진강 하구, 충남 아산군 남쪽의 당진군 주변이라는 등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습니다.

■ 백제의 그늘에서 벗어난 일본

백제 부흥군의 내분으로 제대로 연합 작전을 펴지 못했던 것도 패배의 한 원인입니다. 백강 전투의 패배는 왜국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답니다. 곧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일본 열도로 공격해올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된 것이지요.

그러자 왜국은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규슈섬 북쪽에 663년부터 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백제 망명 귀족의 지도에 따라 태재부 관청과 도성도 만듭니다. 태재부를 방어하기 위해 평지에는 수성을, 산에는 대야성과 기이성을 쌓았습니다. 태재부란 왜국이 한반도와 교류하던 입구로, 왜군이 백제를 돕기 위해 출발한 곳이기도 합니다. 규슈 섬 전체를 통치하는 곳이자, 왜국의 외교를 주관하는 관청이라 매우 중요했습니다.

태재부의 방어 구조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보이는 평지성과 산성의 결합된 형태입니다. 왜국에서는 이 외에도 국지성, 이토성 등 각지에 백제 방식으로 11 개의 산성을 쌓아 당과 신라의 침략에 대비했습니다.

그러나 왜국이 염려하던 당과 신라의 침략은 없었습니다. 왜국은 신라를 크게 견제하며 외교 관계를 끊었습니다. 이제 일본 열도에 고립된 왜국은 스스로의 길을 걷기 위해 670년 나라 이름을 일본으로 바꿉니다.

일본으로 넘어간 백제 유민들은 일본 정부에서 높은 벼슬을 받고, 일본 고대 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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