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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年代日製の蛮行, 105人事件捏造操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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デラウチ総督暗殺未収事件とも言うが, 第1審公判で有罪判決を受けた人が 105人だったので一般的に ¥"105人事件¥"と言う. 1910年前後平安道と黄海道など西北地域では 新民会(新民会)と基督教徒たちを中心に新文化運動を通じる独立運動が拡散していた.

これによって朝鮮総督府はこの地域の反日的な運動を弾圧するために多くの種類の事件を操作して愛国啓蒙活動家たちを弾圧するのに至った. 1910年 12月には軍資金を募金してつかまった安明根の死

件を拡大・捏造して西北一帯の排日基督教人と新民会会員を逮捕したアンアックサゴンを操作したし, この事件以後秘密決死組職として新民会の組職を確認してこれらを弾圧するために 105人事件を操作するようになった

. 当時新民会は 1907年の初め安昌浩・李昇薫など啓蒙活動家たちが秘密裡に組織した抗日団体として啓蒙運動を中心に独立思想の鼓吹, 国民力量の培養, 青少年教育, 商工業の振興を通じる自らの実力養成などを主として積極的な活動をしていた.

日製は初めには総督を暗殺しようと思ったという西北地方の風聞を調査する中徐徐に総督暗殺祈祷が実際に推進されたという手がかりを取って, 追跡した結果平壌・先天・井州などでキリスト教学校の教師と学生たちが総督を暗殺しようと思ったということを手に入れたと操作した. この脚本によれば, 1910年 8月以来ソウル新民会本部の指揮の下に 5回にわたって ¥"総督謀殺¥" 計画が西北地方の基督教徒を中心に進行されたし,

 これによって平壌・先天・井州など 9ヶ都市でこの事に必要な資金と武器を購入するなど準備作業を遂行したし, 1910年 11月 27日から 12月 2日間に鴨緑江鉄橋開通式に参加するために敬意先烈車便で総督デラウチが西北地方へ来ると彼を暗殺しようとそれぞれ準備した短銃(短銃)を持ち込んで各地方の駅に出たというのだった. 実際に暗殺行為はなかったが

 この事件を暗殺未遂罪に当たると疑いを被せた. これによって日帝は 1911年 9月から総督暗殺未収事件で尹致昊を含めて梁起鐸・林痴情・李昇薫・ユドングヨル・安泰国など全国的に 600人余り

を検挙した.

日製はもう組んでおいた脚本に合わせて被疑者たちに陳述を強要しながら残忍な顧問によって虚偽自白を受け出して疑い事実をそのまま認めるようにした. 結局 105人事件に対する裁判は 1912

年 6月 28日から京城地方法院で第1審公判が始まった以来 1913年 10月 9日まで 5次にわたって進行された. 先に 9月 28日第1審公判判決では裁判に回附された 123人の中にこのウィンドウ式(李昌植) など 18人を除いて残り 105人に対して検事側が求刑した形量をそのまま適用して懲役 5‾10年の有罪判決を下げた.

有罪判決を受けた 105人は皆高裁に抗訴して, 首謀に注目された尹致昊外 5人を除いた 99人が無罪判決を受けた. 結局 1913年 7月 15日大邱覆審法院で尹致昊など 6人にだけ懲役 5‾6年兄さん(型)を宣告した. 日製はこの事件を通じて新民会の実体を把握して解体させるなど秘密抗日団体をとり除いたが, この事件に掛かり合った多くの活動家たちが海外で亡命して抗日独立運動に加わるようになりながら以後民族解放運動の範囲を拡大させた.

結局顧問と懲役刑を受けた後, その後証拠不十分と疑いが認められなかったですね

105人事件捏造操作ですねww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9b0845a

原文を見る

1910년대 일제의 만행, 105인 사건 날조조작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이라고도 하지만, 제1심 공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명이었으므로 일반적으로 "105인 사건"이라고 한다. 1910년 전후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지역에서는 신민회(新民會)와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신문화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이 지역의 반일적인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사건을 조작하여 애국계몽운동가들을 탄압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 12월에는 군자금을 모금하다 잡힌 안명근의 사

건을 확대·날조하여 서북 일대의 배일기독교인과 신민회 회원을 체포한 안악사건을 조작했으며, 이 사건 이후 비밀결사조직으로서 신민회의 조직을 확인하고 이들을 탄압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조작하게 되었다

. 당시 신민회는 1907년초 안창호·이승훈 등 계몽운동가들이 비밀리에 조직한 항일단체로서 계몽운동을 중심으로 독립사상의 고취, 국민역량의 배양, 청소년 교육, 상공업의 진흥을 통한 자체의 실력양성 등을 위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일제는 처음에는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서북지방의 풍문을 조사하던 중 점차 총독암살기도가 실제로 추진되었다는 단서를 잡아, 추적한 결과 평양·선천·정주 등에서 기독교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을 입수했다고 조작했다. 이 각본에 따르면, 1910년 8월 이래 서울 신민회 본부의 지휘하에 5차례에 걸쳐 "총독모살" 계획이 서북지방의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평양·선천·정주 등 9개 도시에서 이 일에 필요한 자금과 무기를 구입하는 등 준비작업을 수행했으며, 1910년 11월 27일부터 12월 2일 사이에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경의선열차편으로 총독 데라우치가 서북지방에 오자 그를 암살하려고 각기 준비한 단총(短銃)을 지참하고 각 지방의 역으로 나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암살행위는 없었으나

 이 사건을 암살미수죄에 해당된다고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이에 따라 일제는 1911년 9월부터 총독암살미수사건으로 윤치호를 비롯하여 양기탁·임치정·이승훈·유동열·안태국 등 전국적으로 600여 명

을 검거했다.

일제는 이미 짜놓은 각본에 맞추어 피의자들에게 진술을 강요하면서 잔인한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받아내어 혐의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게 했다. 결국 105인 사건에 대한 재판은 1912

년 6월 28일부터 경성지방법원에서 제1심 공판이 시작된 이래 1913년 10월 9일까지 5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먼저 9월 28일 제1심 공판 판결에서는 재판에 회부되었던 123명 중에 이창식(李昌植) 등 18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105명에 대하여 검사측이 구형한 형량을 그대로 적용하여 징역 5~10년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유죄판결을 받은 105명은 모두 고등법원에 항소하여, 주모자로 주목된 윤치호 외 5명을 제외한 99명이 무죄판결을 받았다. 결국 1913년 7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윤치호 등 6명에게만 징역 5~6년 형을 선고했다. 일제는 이 사건을 통해 신민회의 실체를 파악하고 해체시키는 등 비밀항일단체를 제거했으나,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많은 운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면서 이후 민족해방운동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결국 고문과 징역형을 받은 후, 그 이후 증거 불충분과 혐의가 인정되지 않았군요

105인 사건 날조 조작이군요ww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9b084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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