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에 위안소가 만들어진 이유는 다름아닌 원숭이족의 종특 매독때문이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제국 일본은 러시아 내전에 백군 편에 서서 개입하여 7만5천명의 대병력을 시베리아에 파견했다. 그런데 이 당시 일본군에게 큰 병력 손실을 입힌 것은 적군이나 게릴라들의 공격보다도 시베리아 매독의 공격이었다. 일본군은 이 당시 전투로 인한 병력 손실보다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의 손실이 더 컸던 것이다. 매독이 도져서 보행 능력을 상실할 경우, 그냥 버리고 갈 수도 없어 성한 병사 2∼4명이 붙어 들것에 싣고 가야 하니 실제 전투력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성병에 의한 피해는 전투력의 15∼20%에 해당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일본군 위안소가 최초로 설치된 것은 1932년 ‘상해사변’ 전후의 일로 알려졌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 지휘부는 병사들의 강간 사건이 빈발하자, 일본 본토에서 위안부를 데려오기 시작했다. 당시 상해파견군 참모장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중장은 위안부가 파송돼온 뒤 강간 사건이 줄어들어 기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