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부터 익산 왕궁리유적을 발굴하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조사단은 아주 큰 규모의 구덩이를 찾아냈다. 길이가 10.8m나 되고 폭 1.7~1.8m에, 잔존깊이가 3.1m나 되는 대형 지하구덩이였다.

구덩이에서 기와와 토기, 짚신, 나무자재와 나무막대를 비롯해 밤껍질이나 콩류, 참외씨 등이 나왔다. 무엇보다 수분이 가득 포함된 유기물이 두껍게 쌓여있었다. 이런 경우 과일이나 곡물, 물을 저장하는 지하창고로 판단하는 게 보통이었다. 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도드래를 연결하여 유기물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유기물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지독한 악취의 정체는 백제시대 공동화장실 복원도, 익산 왕궁리 유적 서북쪽 공방근처에 있었다. 5칸-3칸-2칸짜리 화장실 3개동이 있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5칸짜리 화장실의 내부 모습. 나무자재로 틀을 만들었고, 벽면은 지하수가 스며들지 않게 황갈색 점토로 두껍게 발라놓았다. 일종의 코팅작업이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공중에서 본 백제 공중화장실. 사선의 형태로 오수 배출로가 보인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아무리 저장한 곡식과 과일 등이 썩었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냄새가 나지는 않거든요. 시궁창에서 나는 그런 악취였으니까요. 코를 쥐고 조사를 마쳤는데, 그 때까지 알지 못했죠.”(전용호 당시 국립부여연구소 학예사)
그 해 12월, 유적의 발굴성과를 정리하는 자문위원회가 열렸다. 주의깊게 조사단의 브리핑을 듣고 있던 이홍종 교수(고려대)가 한마디 던졌다.
“이거 화장실 유구일 수도 있어요.”
조사단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해석이었다. 그 때까지 국내유적에서 화장실 유구를 발굴했다는 보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교수는 조사단에게 “유기물 토양의 샘플을 한번 분석해보자”고 제안했다.
이듬해 1월 고려대 기생충학 교실과 열대풍토병 연구소의 분석결과는 놀라웠다. 유기물 토양에서 편충과 간흡충, 회충은 물론 종 감별이 어려운 장내 기생 흡충류의 충란이 다량 발견된 것이다. 편충과 회충은 오염된 채소를 먹었을 때 감염되는 기생충이다. 간흡층과 감별이 불분명한 장내 기생흡충류는 민물고기를 생식하면 걸릴 수 있는 기생충이다. 이로 미루어 이곳은 분명 국내에서 처음 찾아낸 화장실 유적이었다. 추가발굴 끝에 첫번째 화장실과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배치된 제2, 제3의 화장실이 잇달아 확인됐다. 이곳은 7세기 백제의 공동화장실이었던 것이다.(전용호, 2010)(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6)
■고관대작용? 여성전용?
이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세운 왕궁이다.
10세기 쯤 편찬된 <관세음험기>에는 “백제 무강왕(무왕)이 지모밀지(지금의 익산)로 천도해 사찰을 경영했는데, 그 때가 정관 13년(639)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익산천도설을 뒷받침하는 자료이다. 하지만 천도라기보다는 무왕이 세운 별도, 즉 요즘 말하는 행정수도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천도에 따른 신 수도였든, 아니면 수도(부여)를 보완했던 별도(행정수도)였든, 이곳은 7세기 초 백제의 심장부였음은 분명하다.
확인된 화장실들은 궁성의 서북쪽, 즉 공방(工房)의 아래쪽에 있었다. 화장실의 방향(서북쪽)이 중요하다. 예로부터 동쪽과 남쪽은 앞, 광명과 봄, 탄생 등 긍정적인 의미를, 북쪽과 서쪽은 뒤, 어둠, 겨울, 죽음 등 부정적인 뜻을 지닌다. 조선시대에서도 수도 한양의 서쪽과 북쪽엔 감옥과 처형장 등 죽음과 형벌을 뜻하는 기관을 배치했다. 즉 한양의 서쪽에 있던 ‘고태골’은 처형장이었다. ‘골로 간다’, ‘골로 보낸다’는
백제 화장실의 구조는 매우 재미있었다. 첫번째로 발견된 대형화장실의 규모는 5칸이었다. 즉 5명이 한번에 용변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두번째 화장실은 3칸짜리였고, 세번째 화장실은 2칸짜리였다. 2칸짜리가 가장 위쪽에서 있었고, 그 아래로 3칸-5칸짜리가 배치됐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공동화장실도 신분에 따라, 혹은 성별에 따라 구분된 것일까. 여러가지 상상해볼 수 있다.
가장 위쪽에 있는 2칸 화장실은 공방의 지체높은 인물이 볼일을 봤던 곳일 수도 있다. 또 신분에 따라 3칸-5칸 순으로 가는 것이고…. 혹은 달리 볼 수도 있는데, 2칸이나 3칸짜리는 여성 전용 화장실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무왕의 개인변기?
어떻든 악취를 풍기는 유기물이 가득한 5칸짜리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용했던 화장실임을 짐작할 수 있다.
3개의 화장실은 동-서 방향으로 1도~5.5도 정도 경사진 지형에 놓여 있었다. 또 3개의 화장실 모두 사선모양(S)으로 배수로와 연결돼 있었다. 또 화장실의 벽면에 20㎝ 두께로 황갈색의 점토를 두껍게 발라놓았다. 오물이 지하수로 침투되지 않도록 일종의 ‘코팅’ 처리를 한 것이다.
지하수 오염을 막기 위한 아주 세심한 보건의식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화장실 입구로 통하는 수로는 확인되지 않았다. 물로 뒷처리를 하는 전형적인 수세식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화장실 유구로 판명됨에 따라 수수께끼 같던 나무막대의 용도도 파악됐다. 이 나무막대는 지금의 화장지, 즉 뒤처리용이었던 것이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에는 이 뒤처리용 막대가 필수였다.
또 하나 인근 배수로에서 확인된 이른바 ‘변기형 토기’ 2개체분도 주목을 끌었다. 요즘의 요강일 수도 있지만, 조선시대 ‘매화틀’과 같은 ‘휴대용 혹은 이동식 변기’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신라 화장실
돌이켜보면 국내에서 화장실 유적의 확인은 ‘만시지탄’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이미 백제와 신라인의 체취가 묻어나는 7~8세기 화장실 유적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694~710년 사이 일왕이 머물렀던 나라현(奈良縣) 후지와라교(藤原京)에서 확인된 화장실 유적을 살펴보자. 그곳에서 발견된 목간을 보면 ‘신라사람 모리를 빨리 소환하라(召志良木人毛利)’는 내용이 나와있다. 또 ‘백제수인(百濟受人)’이라는 명문목간도 확인됐다. ‘백제수인’은 각종 피혁제품의 생산을 맡은 백제시대 관직이었다. 일본학자들은 “도래계(3세기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혹은 신라계) 사람들의 관청이나 그에 딸린 화장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8세기 초(720~730) 유적인 후쿠오카시 고로간(鴻려館)에서도 화장실이 확인됐다. 그런데 이곳은 신라를 비롯한 외국사신들이 묵었던 국립영빈관의 자리가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발굴자는 “백제사람들은 여러가지 생활문화를 가져왔으며, 이 가운데는 배설방법도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고로간의 뒷간이 도래계, 즉 백제인의 유적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털어놓은 것이다.
선진 화장실 문화를 고대에 일본에 가르처 줬지만...
일본인의 더러운 똥문화는??
일본의 화장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