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가야연맹 지배층의 무덤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주인공들을 맹주로 한 가야연맹은 3세기말~4세기말에 걸쳐 전성기를
구가했다. 가야연맹의 흥성은 무엇보다 당시 한반도 남부의 정치ㆍ군사 정세가 상대적 안정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야는 낙동강 하류 유역의 지배권을 놓고 신라와 대립했지만 신라는 당시까지 확고한 중앙집권적 정치기반을 다지지 못한 상태여서 가야에 대한 위협은 한정적이었다.
더욱이 가야는 변진 이래 왜(倭)와 맺어온 전통적 연대를 활용, 수시로 왜병을 불러들여 군사력을 보충했다. 또 한반도 중부지역의 패권을 두고 장기간 고구려와 치열한 다툼을 벌인 백제는 후방안정을 위해 가야에 대해서는 압박 대신 우호 관계를 택했다.
이런 정치적 안정은 가야가 백제ㆍ왜(倭)와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누릴 수 있게 했다. 또 그렇게 확보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자적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정치ㆍ군사적 영향력을 갖추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의 정치적 안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가장 큰 요인은 고구려의 남하였다. 한반도 중부의 옛 낙랑ㆍ대방의 땅을 둘러싼 백제와의 오랜 싸움에서 고구려는 391년 광개토대왕의 즉위 이후 압도적 우위를 점했고, 그 결과 백제는 한강 유역을 완전히 상실했다.
고구려의 남하는 백제의 위축을 불렀을 뿐만 아니라 가야를 매개로 형성된 ‘백제-가야-왜’의 남방축을 약화시켰다. 이 남방축에 대응하기 위해 고구려가 신라와 맺은 연대는 신라-가야 대결의 균형을 무너뜨려 가야연맹의 약화와 신라의 성장을 불렀다.
고구려의 본격적 남하를 맞아 백제는 397년 태자를 볼모로 보내 왜(倭)와의 동맹을 강화했다. 이 소식을 접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 평양성으로 내려오는 등 대비태세를 강화했다.
고구려는 399년 가야와의 국경에 출현한 왜병에 위협을 느낀 신라가 사신을 보내 온 것을 계기로 신라와의 군사동맹을 강화했다.
이듬해 왜병의 신라 공격이 나서자 합계 5만명의 보병과 기병을 신라에 파견해 왜병을 물리쳤고, 패퇴하는 이들을 추격해 김해 지역까지 공략했다.
가야-왜 연합군은 고구려-신라 연합군에 궤멸됐다. 이때의 타격으로 김해 금관가야는 재기 불능 상태에 빠졌다. 이후 가야연맹은 고령의 대가야를 맹주로 삼아 재기했으나 이미 초기 가야연맹 당시의 위세를 재현하진 못했다.
가야의 세력 약화는 크게 보아 중개 무역 중심국으로서의 독점적 지위를 조금씩 상실하면서 일찌감치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초기 가야는 왜-백제-낙랑-대방-동진(東晉)에 걸친 교역로를 갖고 있었다.
그것이 낙랑ㆍ대방의 멸망으로 교역로의 굵은 가지가 잘렸다. 이어 고구려ㆍ신라 연합군에 의해 낙동강 하류 지역을 빼앗기면서 사실상 가야연맹 흥성의 물적 기반이었던 교역망을 거의 상실했다.
중요한 것은 김해 금관가야의 몰락 직후 일본 열도에 급격한 정치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일본 열도의 정세에 대해 중국 사서는 266~412년까지 약 150년 간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중국의 정세 혼란도 요인이었겠지만 히미코(卑彌呼) 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정치통합을 이루는 데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뜻한다.
3세기 중엽부터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조성된 데서 소국연맹체 수장들의 권력 강화를 읽을 수 있지만, 4세기 이래 일본 열도 전역에서 전방후원분이 조성된 것으로 보아 연맹체들 사이에 팽팽한 세력 균형이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세력 균형을 깨고 본격적 정치통합으로 가는 데는 외부의 충격이나 자극이 필요했다.
왜에 대한 중국의 기록은 413년 왜왕이 동진에 사신을 보내는 데서 다시 시작된다. 그 후 5세기 후반까지 왜의 5왕이 동진, 송(宋)과 조공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413년 이전에 일본에서 커다란 정치적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시기는 김해 금관가야의 몰락과 정확히 일치한다.
한국과 일본 학계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가야 지역으로부터 일본 열도로 많은 인구가 유입됐다는 데 견해가 일치한다. 금관가야 유민들은 경상도 내륙지역으로 흘러 들어가기도 했지만 상당수가 긴밀한 교류관계를 유지했던 일본 열도로 건너갔을 것이다.
?시기 이후 일본 각지에서 가야식 마구류와 금속가공품, 도질(띵?토기 들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장인층의 집단적 이주가 추정된다. 이는 고대 사회에서 수공업품의 주된 수요자가 지배층이고, 지배층이 장인들을 직접 관리했다는 점에서 금관가야 지배층의 일본 이주를 뒷받침한다.
이들의 문화ㆍ기술 수준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 뚜렷한 우위를 점했고, 이에 근거한 정치적 영향력 또한 막강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7세기에 백제계인 소가노우마코(蘇我 馬子)가 야마토(大和) 정권을 쥐고 흔들고 3대의 천황을 자신의 외손으로 세운 것이나, 한반도에서 건너 간 ‘도래인’(渡來人)들이 대부분 일본 지배층에 편입됐던 데 미루어 개연성이 크다.
따지고 보면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기마민족 정복설’도 망국의 한을 안고 일본 열도로 건너 간 금관가야 지배층이 5세기가 열리면서 시작된 일본 열도의 정치통합에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과 다름없다.
한편으로 ‘임나일본부설’과 직접 관계된 ‘미마나’(任那)라는 일본식 지명에서도 고대 일본 왕권과 가야의 관계를 더듬어 볼 수 있다.
‘미마나’는 《일본서기》(日本書記)에 무려 215번이나 나오고 차음 표기인 ‘미마나’(彌摩那)도 한 번 나온다. 또 일본 고대 귀족의 계보를 담은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도 임나(任那)와 함께 미마나(彌麻奈), 어간명(御間名), 삼간명(三間名) 등의 차음 표기가 여러 번 나온다. 일본식으로 읽으면 모두 ‘미마나’가 된다.
일본 기록만이 아니라 광개토대왕비의 ‘임나가라’, 《삼국사기》 강수(强首)전의 ‘임나가라인’, 진경(眞鏡) 대사비의 ‘임나왕족’ 등에서 확인할 수 있어 그 실재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뜻이 무엇이든 ‘미마나’라는 소리 값은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마나’가 창원 지역에 있었다가 김해 금관가야에 통합된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을 비슷하게 읽은 결과라는 주장은 근거가 약해진다.
‘미마나’의 뜻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다. 다만 일본 학계의 통설은 ‘님(主)의 나라(國)’라고 본다. 이를 확장해 ‘종주국’ ‘맹주국’‘본국’의 뜻으로 보는 견해가 국내에도 많다. ‘님’(主)에 만주어로 ‘땅, 나라’를 가리키는 ‘나’(Na)가 붙은 ‘님나’가 음운변화한 결과라는 견해도 있다.
상당히 흥미로운 주장도 있다. 전에 언급했듯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마나사산(摩那斯山)에 만어사(萬魚寺)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마나’와 ‘만어’가 친연성을 가진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가라’라는 말이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나 신어(神魚)를 가리킨다는 점을 환기해 보면 ‘마나’가 물고기를 가리키는 가야 고유어였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일본어의 극존칭 접두어인 ‘미’(御)를 붙이면 정확히 ‘미마나’가 된다. 그럼 ‘미마나’는 물고기를 가리키고, 물고기를 신령스러운 존재로 여긴 나라를 가리킬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좁게는 가야연맹의 맹주국인 금관가야와 나중의 고령가야, 넓게는 그런 맹주국이 이끈 가야연맹 전체를 칭하는 것이라고 보면 큰 무리가 없다.
일본 기록이 가야나 가라 대신 ‘본국’이나 ‘종주국’, 나아가 ‘종가’(宗家)를 뜻하는 ‘미마나’란 명칭에 매달린 것은 당시 일본 지배층의 가야에 대한 인식이 투영된 결과일 수도 있다. ‘임나’의 명칭에서 비롯한 이런 상상력을 이어가면 이른바 ‘임나일본부’의 성격에 대해서도 전혀 새로운 뜻을 읽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