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석..
왜국은 옛날 왜노국이다
수도에서 일만 사천리 거리이며, 바로 신라 동남쪽으로 바다 가운데 있어 섬에서 살며, 동서로 다섯달 거리이고 남북으로는 석달 거리이다.
나라에 성곽이 없고, 나무를 이어 방책을 만들었으며, 풀로 집을 지었다.
수양제 때에 이르러 그 백성들에게 비단과 실과 관을 내려주었다.
태종 정관 5년에 사자를 보내 입조하였다.
황제가 그 거리가 먼 것을 불쌍히 여겨, 해마다 조공바치는 일에 구애되지 말라고 조서를 내리셨다.
처음에는 백제에 붙었다.
나중에는 신라에 붙었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 세기거나 매듭을 짓는다.
백제에서 불경을 얻어쓰면서 문자가 생겼다
풍속에 접시가 없어 나뭇잎을 깔고 손으로 밥을 먹었다
수서 왜국전
↑중국의 기록
↓한국의 기록
신숙주와 함께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 이인규가 본 일본
성종 101권, 10년( 1479 기해 / 명 성화(成化) 15년) 2월 9일 병"신 2번째 기사
전 경력 이인규를 인견하여 일본의 풍속·학문·관대 등을 물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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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경력(經歷) 이인규(李仁畦)를 인견(引見)하여 일본(日本)의 일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난 계해년9424) 변효문(卞孝文)이 일본으로 사신 갈 때에, 윤인보(尹仁甫)가 부사(副使)가 되고 신숙주(申叔舟)가 서장관(書狀官)이 되었으며, 신(臣)은 변효문의 자제 군관(子弟軍官)으로 따라갔습니다. 3월에 배를 띄웠는데, 삼도(三島) 사이는 풍파가 매우 험하여 산에 이르는 듯도 하고 골짜기로 떨어지는 듯도 하였으며, 지척 사이에 있는 두 배에 탄 사람들이 서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대마 도주(對馬島主)의 접대가 어떠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 섬은 생리(生利)가 매우 박(薄)하므로 비록 후하게 대접하려 하더라도 할 길이 없었습니다. 도주(島主)에게 겨우 한 섬의 씨를 뿌릴 만한 밭 밖에 없으므로, 오로지 우리 나라에서 해마다 내리는 것에 의지할 따름이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삼도(三島)에서 일본까지 모두 며칠 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일기도(壹岐島)에서 본국(本國)까지 모두 25일 길이며, 신 등은 6월이 되어서 평도(?渡)에 닿아 비로소 육로(陸路)로 갔는데, 그 나라에는 우역(郵驛)이 없었습니다.
또 왜인(倭人)은 우리를 매우 박하게 대우하였습니다. 신(臣)이 우연히 절[僧舍]에 들어가 마실 물을 구하였더니 낡은 그릇에 주고는, 다 마시고 나니 곧 부숴버렸으며, 또 음식을 줄 때에는 나무 그릇을 쓰고, 다 먹으면 반드시 밟아 부수어 버립니다.
신이 또 7월에 황제(皇帝)의 나들이를 보았는데, 연(輦)을 타고 다녔으며, 우인(優人-광대)이 우리 나라 조관(朝官)과 부인(婦人)의 옷을 입고 그 앞에서 연희(演?)하였습니다. 그 나라의 풍속은 불교를 심하게 믿어서, 절이 여염(閭閻)의 반이나 되고, 현달(顯達)한 관원(官員)일지라도 나이가 40을 넘으면 곧 머리를 깎으며, 신 등이 처음 도착하였을 때에도 절에서 묵었습니다. 곁에 대숲이 있는데, 도둑이 야음(夜陰)을 타서 공격하려 하므로, 신 등이 늘 막느라고 괴로와서 편히 자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대신(大臣)의 직명(職名)은 어떠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가장 높은 것이 관제(管提)이고, 다음이 좌무위(左武衛)이고, 다음이 대화수(大和守)인데, 그 나라의 토전(土田)을 나누어 관제가 그 반을 갖고 남은 두 신하가 또 나머지 반씩을 다스리며, 돈을 내어 황제를 공봉(供奉)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시사(市肆)가 있어서 교역(交易)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시사는 자못 우리 나라와 비슷하나,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무역하는 물건은 여러 가지 해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그 부녀자들이 머리를 풀어 꾸미고 동백기름을 바르고서 낮에 모여 저자[市]를 이루었다가 밤이 되면 간음(姦淫)하여 생업을 돕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땅의 넓이가 얼마나 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 나라 사람이 스스로 자랑하기를 ‘남으로는 15일 길, 북으로는 7일 길, 동으로는 40일 길이나 된다.’ 하기에, 신이 ‘너희 나라에는 역(驛)이 없는데, 어떻게 거리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나그네가 묵어 가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잔치를 베풀어 전별하는 예(禮)가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조석(朝夕)으로 주는 밥에는 모래가 섞였고 파국[羹]을 곁들일 뿐이었으니, 어찌 잔치를 베풀어 음식을 권하여 위로하는 예가 있겠습니까? 다만 세 대신과 남선사(南仙寺)·이령사(二靈寺)·상국사(相國寺) 세 절의 중[僧]이 잇달아 음식을 권하여 위로하였으나, 또한 탕병(湯餠-국수) ·냉병(冷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활을 잘 쏘는 자가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들의 풍속은 대[竹]를 합쳐서 활을 만듭니다. 신(臣)이 보니 30인이 짝지어 쏘는데 맞히는 자가 겨우 한두 사람이므로, 신이 ‘우리 나라 사람은 종일 과녁[侯]을 쏘아도 쏘면 맞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제 너희가 쏘는 것을 보니 아이들의 장난 같다.’ 하였더니, 그 사람이 성을 내어 몸을 일으켜서 칼을 뽑아 신을 찌르려 하였으나, 통사(通事)가 말려서 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황제의 관대(冠帶)는 어떠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때는 상중(喪中)에 있었으므로 흰 깁으로 만든 옷을 입었고, 관(冠)은 마치 신목[靴項] 같았습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용력(勇力)이 있는 자가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왜인과 서로 다투면 반드시 이깁니다.”
하였다.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묻기를,
“황제의 딸은 하가(下嫁)하지 못한다 하는데, 그러하오?”
하니, 대답하기를,
“반드시 친족(親族)을 취택(取擇)하여 출가하며, 친족이 없으면 동기도 피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풍속은 더욱 아름답지 않다. 왜인도 학문을 알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제영(題詠)을 알 뿐이고, 경서(經書)는 배우지 않습니다. 절의 중[僧]이 시(詩)를 좋아하여 신숙주(申叔舟)에게 시를 구하였는데, 신숙주가 곧 30편(篇)을 지으니, 중이 보고서 심복(心服)하고 화답하려 하였으나 못하였습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물소[水牛]가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없었습니다. 그 나라에는 물산(物産)이 없으므로, 모든 물건은 흔히 남만(南蠻)에서 사서 씁니다. 다만 황금이 있는데, 그 값은 우리 나라와 다름 없습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음악이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요고(腰鼓)·생(笙)·관(管)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나라의 음악을 듣고 혹 일어나서 춤추는 자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영인본】 9 책 693 면

倭國乃日本國也.
本名倭旣恥其名.
又自以在極東因號日本也.
今則臣屬高麗也.
- 郭若虛.『圖畵見聞志』 卷6. 高麗國
倭 는 일본국이다.
倭라는 말은 매우 치욕스러운 이름이어서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였다.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스스로 일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늘날, 고려의 속국이다.
일본열도는 미개한 섬일 뿐, 국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인은 천대와 멸시를 받는 미개한 원시인입니다.
서양 사학자가 본 한일관계
한국은 부모, 일본은 부모 버린 불효자식
존 카터 코벨, 앨런 코벨
존 카터 코벨, 앨런 코벨
일본이 오래 전부터 한국문화의 산물을 일본 국적의 것으로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해온 사실을 폭로한 서양 학자가 있다. 미국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1912~96) 박사가 그 주인공. 컬럼비아 대학에서 일본미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백인 최초의 일본학 박사이기도 하다.
다음의 글은 1982~83년 존(사진 왼쪽)과 앨런 코벨이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진실에 대해 쓴 칼럼을 요약한 것이다.
[#1] 역사왜곡은 712년부터 이어진다
일본인이 쓴 글에는 한일관계를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아주 많은데, 한국인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히틀러는 거짓말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잘 믿는다. 거짓말이라도 자꾸 되풀이하면 머잖아 많은 사람이 진실로 받아들인다 라고 했다.
첫 번째 왜곡은 1300여 년 전에 기록한 첫 일본 역사책에서 일어났다. 당시 倭의 지배자들은 학자들에게 역사서를 의뢰했다. 편찬 목적은 당대의 일왕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서다
일본의 역사가들은 369년 가야국이 倭를 정벌한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문화적으로 일본을 전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렸다. 히틀러가 말한 것처럼, 거짓말은 클수록 사람들을 속이기가 쉬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본 사가들은 역사를 뒤집고 가야에서 온 부여족이 왜를 정복한 게 아니라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고 썼다.
일본이 가야와 신라를 정복했다’고 알려진 神功 왕후는 사실은 선단을 이끌고 倭를 정벌한 강인한 한국의 왕녀였다. 369년의 oujin왕부터 keitai왕까지(일본역사에 등장하는 15대부터 25대까지)는 전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혈통의 왜왕이었다.
일본 건국자로 알려진 초대 일왕 jinmu는 4세기 부여인들이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해의 여신인 天照大臣은 한국의 무당이며, 그녀의 오빠 susano o mikoto(素尊)는 신라인이다. 그러나 8세기 역사가들은 그들의 기록에 일본옷을 입혔다. 20세기에 실체가 드러나기까지, 역사가들은 사람들을 속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나이 든 부모를 버리는 불효자식 이야기가 있다. 일본인들은 두 세대 전 한국인들에게 한국문화는 열등한 것이라 며 일본말과 일본 이름, 일본식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강요했다. 한국의 수많은 서책이 불에 타 없어지고 예술 활동도 금지됐다. 숱한 보물이 나라 밖으로 실려 나갔다. 석굴암을 해체해 돌 하나하나를 일본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은 거짓말과 날조를 통해 한국인에 대한 문화적 대량학살을 강행했다. 그러나 진실은 일본이 초기 역사부터 8세기에 이르도록 한국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자란 어린아이였다는 것이다. 정말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제 한일강제합방이 ‘한국을 위한 선택이었으며, ‘한국인들이 원한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역사를 바꾸려 한다.


(대만에서 발표된 각국의 使臣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