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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박
2001년 열린 국제 학술 대회에서 국제법 전문가인 케임브릿지 대학의 "제임스 크로포드" 교수가 경술 국치는 국제법상 합법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를 학회에서 인정하였다는 내용이다. 추가로 학회의 내용을 정리했다는 논문도 제시하고 있다.2
1. 국제 학술 대회의 성격과 국제법 전문가가 합법성을 보증했다는 주장.
2001년 열렸다는 학술 대회는 하버드대와 하와이대 등 6개 연구소의 공동 주최로 열린 "한국병합의 역사적 국제법적 재검토"이다. 이 회의는 경술국치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자리로, 한일 양국은 물론 독일이나 미국 등의 제 3국 학자까지 치열한 논쟁을 펼치는 자리였다.
애초에 교수 한 명의 발언을 가지고 "국제법 전문가가 보증했다." "완벽하게 논파했다."고 할 수가 없는 자리인 것이다. 국제법 전문가라면 우리 쪽에서도 대한국제법학회 회장을 지내고 서울대 명예교수를 역임한 권위자인 백충현 교수가 참가했다. 물론 크로포드와는 반대 의견을 들고 말이다.
<19쪽 부터 본격적으로 이빨을 털기 시작한다.>
36년간 일본의 영도로 인해 조선인들의 평균 삶의 질이 올라갔다는 내용이다. 처음부터 "거 애비 성이…" 라고 묻고 싶지만, 일단 하나 하나 지적해보자. 식근론 학자의 주장에서도 나온 적이 없는 황당한 내용들이 보인다.
초반부터 "가축과 다름없이 취급되던 여성에게 이름이 주어졌다."와 같은 내용이 튀어나온다. 저 내용대로라면 앞으로 여성 역사인물을 얘기할때는 "아 그 왜 고종이랑 결혼한 분…."이라던가, "이이 엄마 몰라?" 라던가, "그 왜 홍길동 쓴 사람 누나 있잖아."라고 해야할 판이다. 물론 모두 민자영, 신사임당, 허난설헌이라는 멀쩡한 이름이 존재한다.
한국의 알파벳인 "한글"이 부활하고 표준어가 제정되었다는 부분도 국문학도로서 피가 거꾸로 솟는 서술이다. 한글이 공식적인 국문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94년 갑오개혁부터이며5, 한일합방보다 16년 앞선 것이다. 물론 그 이전부터 서민층에겐 배우기 쉬운 한글이 주류였으며, 주시경 선생의 초기 저술도 한일합방 이전에 나왔다.
조선어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일제시대에 출간되긴 했으나, 일제의 지도(guidance)에 의한 것은 절대 아니었으며 오히려 일본의 박해를 받았다. 1942년 조선어학회의 회원 및 관련인물들이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된 조선어학회 사건이 그 예이다.6 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단은 한 여고생이 기차에서 우리말로 대화를 했다는 이유로 야스다 순경의 취조를 받은 것이었다.
그외 갑오개혁 때 있었던 도량형의 통일을 일제 시대에 있었다고 한 점이나, 고종이 청과 명성황후에 대한 반감으로 갑신정변을 도왔다는 부분(33쪽) 등 근거없는 허위사실들을 태연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나아가 유가족들이 고인에 대한 모욕으로 인식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 합사를 일본에 의한 혜택으로 묘사하는 정신나간 태도를 보이고 있다.
3. 결론
제임스 크로포드의 발언이 있던 학술 대회는 한일 학자는 물론 서양 학자들까지 치열하게 싸우는 논쟁적인 자리였으며 학자 한 명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 주입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런 건 학술대회라 하지 않는다. 그냥 강의다.) 역시 국제법 전문가인 백충현 교수는 크로포드와 정반대의 주장을 내세웠다.
"한국인의 주장이 완전하게 반박 당했다." 라며 크로포드의 우위를 주장한 자칭 "논문"은 내용 면에서나 형식 면에서나(참고문헌 정리가 없다.) 논문이라고 부를수도 없는 핵폐기물이다
2001年1月、韓国と日本、米国の学者たちが一堂に会した。
"韓国併合見直し国際会議"(韓国併合再検討国際会議)英語では"Reconsideration of the Annexation of Korea"という国際会議をためだった。本大会は当年1月、4月、11月に開催された。日本国内ではなかなか知られた事実だが、韓国内ではあまり知られていない問題だ。この会議では韓日併合は国際法によって合法か違法かを隠すために開かれた大会で主導と開催国は韓国だ。しかし、イデフェで韓国は韓日併合が不法だったという国際的合意を得られなかった。
1965年の韓日基本条約で"韓日併合は無効"ということに両国が合意したが、この無効に韓国は"当初から不法だったので源泉無効"と認識したが、日本は"その当時は合法だったが、これは無効"いう風のお互い違う解析の工夫を持っていたからこそ、韓国の立場ではこれを再び再確認する必要があった。
1回会議はハワイでイルハンミの学者が参加
2回会議は東京都多摩市で開催され、
3次会議はハーバード大学でイルハンミそしてイギリスとドイツ学者たちが一緒にいる中で開催された。
韓国は初期当時強大国だった日本の政治的軍事的圧力になった不法な条約だったということを表明しようとしたが、当時の国際法では圧迫による植民地支配は不法ではなかったのでこれは受け入れられなかった。当時、植民地支配は強制性と、拒否権の有無や不法との関係はないというものだった。この論理は"強制的強圧的であっても、植民支配がなければ、すべての社会は先史時代と氏族社会に泊まるしかない。"ヌンゲ論理だった。強圧的な植民支配が不法になるのは1次世界大戦後、からというに彼らの主張だった。
結局、韓国の学者は徹底した準備にもかかわらず、最も強く押していこうとした部分が相殺され、"条約には国王の署名がない。"という理由で強く推し進めたが、高宗が韓日併合に否定的だったが大臣たちの要求によって、結局、承認したということを日本側で発表してこれさえも相殺されてしまった。歯が親日派と日本の強圧的な圧力によって署名された条約だったが、当時国際法ではそれを不法と規定していなかったため、今回の大会で韓国が韓日併合が不法イラヌンダは国際的合意を得られなかった。
当時の国際法に対する国際社会の認識を正しく把握しきれず、彼らが求める資料を用意できなかった韓国の失敗だった。
そもそも過去に植民地支配をご飯食べるようにしたミヨンドクの学者たちの前で"強圧的な植民地支配は不法"というアピールが通じなかった。
しかしその後、韓国は強圧的な理由に併合されたという主張より併合される過程で、条約の過程で発生した違法な過程に焦点を置いて研究をし、条約に写っている文書の捺印が純宗が職位した後になされたにもかかわらず、*捺印は廃位された高宗のものであり、これも日本人たちが奪って行ったことを突き止めた。
2010年、韓国と日本の各国の知識人100人ずつが"韓日併合条約は無効"を主張しながら、声明を発表した。単語ハナロも鋭く対応し、5ヶ月にわたる討論の末に韓国の立場が正しいという結論を下したということだ。この過程で日本史学者が中間にいく状況も発生したが、5回わたる討論でお互いの立場を合わせた。しかし、これらの主張は、日本側政府の立場ではなくまだ日本の歴史学界は、右翼が強い。"強制性は認めるが、当時の国際法上違法ではない。"というのが彼らの立場だが極右の学界が力を得ていて、"対等な立場でまた自由意志で結ばれたこと"という解釈も出ている。
韓国側の立場では現在、最新に討論された2010年の双方の主張を主流としているが依然として日本国内では2001年にあった国際討論を根拠にした主張を強くしてい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