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본서기의 탄생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과 한국.중국 학자들은 ‘일본서기는 고대 한국인들의 일본열도 진출을 말살하기 위해 악랄하게 조작, 변조 투성이의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위사(僞史)의 표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일본인들이 정한론(征韓論)이나 한반도에 대한 우월주의를 강조할 때에는 어김없이 등장하고, 일본의 역사교과서와 황국사관학자.우익집단은 바이블로 삼고 정사(正史)로 굳게 믿고 싶어하는 최정점에 항상 있어왔다.
그리고 이들은 조작으로 점철된 쓰레기와 같은 일본서기를 신주단지 모시듯 보호하기 위하여 오히려 ‘삼국사기를 비롯한 고대 한국사는 변조투성이므로 절대로 보지도 말고 참고도 하지 말라’고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역사의식은 한반도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의 발로이다.
조작된 일본서기의 탄생을 살펴보면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서기 660년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거 사비성이 함락됨으로써 패망하고 만다. 이에 ‘칠지도’에서 언급했듯이 백제의 후국(侯國)이던 야마토왜(大和倭) 왕 사이메이(齊明)는 백제왕족 복신(福信)의 요청으로 백제에 백제복국군(百濟復國軍)을 파견키로 하고 철저히 준비한다.
그러나 사이메이 일왕은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다.
이어 38대 일왕에 오른 텐지(天智)는 상복을 입은 채로 군대를 지휘하여 2만7천명과 4백척의 군함을 금강(錦江)
▲복신의 영정
하구인 백촌강(白村江) 전투에 투입한다.
그러나 663년 8월 백제의 연합군은 마지막 보루인 주유성(州柔城)에서 크게 패하면서 백제를 복국시키지 못하고일본열도 지원군은 처참한 모습으로 일본열도로 쫓겨갔다.
이리하여 백제인들은 나라가 빼앗기자 지도층을 비롯한 많은 유민들이 백제의 후국(侯國)인 일본열도로 이주하게 된다.
백제유민들은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오늘날 나라(奈良)시에 대거 정착하게 된다.
이들은 빼앗긴 나라(國)를 그리워하며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은 기분으로 살자고 하여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 ‘나라(奈良)’시의 유래이다.
현재 나라(奈良)라고 쓰는 것은 단지 취음(取音)하기 위한 차자(借字)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은 나이 많은 일본인들이 ‘나라’의 유래에 대하여 들려주던 이야기를 김향수의 저서 <일본은 한국이더라>에 기록하고 있다.
나라는 794년 칸무(桓武)일왕이 헤이안(平安)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일본열도의 도읍지였다.
백제인들은 이곳에서 오늘날까지 찬연히
▲나라현에 있는 백제사
빛나고 있는 일본문화의 뿌리를 형성한 아스카문화(飛鳥文化-바다를 건너 새처럼 이 곳에 날아와 뿌리내린 문화라는 뜻임)를 꽃피웠다.
백제인들은 일본사회에 안착하고 지배계급을 형성하게 되자, 762년 절대권력자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痲呂)가 신라 침공계획을 세웠듯이(발해의 협공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함) 신라에 패한 마음의 앙칼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한반도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서기를 복잡 괴기한 대하 논픽션으로 만든 출발이자, 일본인들이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리고 오늘날까지 철학이 없이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서기 712년 제40대 텐무(天武) 일왕 시절 백제인 히에다 노아레(稗田阿札)와 오오노 야스마로(太安萬侶)가 현존 일본 최고의 역사서인 설화중심의 고사기(古事記)를 편찬한다.
또 720년에는 백제유민들의 한(恨)과 신라에 대한 패배감을 극복하고 일본열도의 역사를 미화(美化)시키는 관점에서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하였다. 완성시기는 ‘속일본기(續日本紀)’에 밝혀져 있으나 삼국사기나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 반드시 나타나는 서문과 발문이 없음으로 편수년대.편찬경위와 편수자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지.열전(志.列傳)도 없다.
일본서기에는 "텐무 일왕의 3째 왕자인 토네리신노우(舍人親王)가 칙(勅)을 받들어 일본기(日本紀)를 편수하다."로 되어 있다.(일부 학자들은 오오노 야스마로(太安萬侶)가 편찬 주장). 또 일본서기 텐무(天武) 10년(682) 조에 "제기(帝紀) 및 상고제사(上古諸事)를 정하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 때부터 기록하였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편년체(編年體)로 쓰여진 ‘일본서기’에는 전을 가미한 것이 끼여 있어서 자료가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위서(僞書)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일본서기는 신대(神代)부터 41대 일왕 지토오(持統) 11년 즉 BC 660년부터 서기697년 11월까지 일본열도에 진출한 한반도인들의 왕조 형성과정, 왕권쟁탈전 등을 엮은 제기(帝紀)와 왕들의 족보인 왕통기(王統紀)를 기술한 1권, 구사. 제씨(舊辭, 諸氏)에 전하여진 이야기 기록, 각지방에 전하여 오는 이야기, 그 밖의 개인의 수기 등을 기록한 30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사기’에 비하여 많은 자료가 수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에는 ‘일본기’라고 하였으나 784년 헤이안(平安)으로 천도(遷都)한 50대 칸무(桓武) 일왕 이후 ‘일본서기’로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명명의 유래에 관해서 여러
▲칸무일왕
설이 있으나 아직 정확한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