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방위상 “원폭투하 어쩔 수 없는 일”
규마 장관은 지난달 30일 지바(千葉) 현의 한 대학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원폭 투하로 무수한 사람이 비참한 운명을 겪었지만 그로 인해 전쟁이 끝났다는 게 나의 정리된 생각”이라며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원폭투하로 수백만 추가희생 막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을 정당화한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전 일본 방위상의 발언 파문을 계기로 이 문제에 대한 미국의 시각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미국 행정부의 핵비확산 담당 특사인 로버트 조지프(사진) 전 국무차관은 3일 미 국무부에서 기자들과 만나 원폭 투하에 대해 “결과적으로 많은 일본인의 생명을 구했다”며 “문자 그대로 수백만 명이 더 희생될지 몰랐던 전쟁을 끝낸 것으로 대부분의 역사가가 동의하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했던 미국인 조종사 폴 티베츠 예비역 준장이 2007년 11월1일(현지시간) 숨졌다.92세.
티베츠의 손녀 키아는 “할아버지가 3개월여 전부터 건강이 나빠져 이날 별세했다.”고 밝혔다. 그는 62년 전인 45년 8월6일 모친의 이름인 ‘에놀라 게이’로 명명한 애기(愛機)에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비밀계획 속에 개발된 우라늄 원자탄을 싣고 히로시마로 날아갔다. 마침내 이날 오전 8시 15분 9.44㎞ 상공에서 히로시마의 일본공군 본부를 겨냥해 원폭을 투하했다.B-29는 당시로서는 4개의 엔진을 단 최신예였다.
그는 자서전 ‘티베츠 이야기’에서 “거대하고 검붉은 버섯구름 띠가 4만 5000피트(13.7㎞) 상공까지 너비 3마일(약 4.9㎞)로 퍼지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지켜봤다.”고 회고했다.B-29는 폭격으로 불길이 치솟는 파괴된 도시 상공을 피해 옆으로 날아갔다고 덧붙였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7만여명이 죽고 5만여명이 크게 다쳤으며 6만여채의 집이 잿더미로 변했다. 그 뒤로도 계속 퍼져나간 고열과 방사능으로 희생된 공식 사망자만 24만여명으로 추산된다.
티베츠는 자서전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적절한 조치였다.”면서 “원자탄 사용은 종전(終戰)을 앞당겨 더 생길 수많은 일본군과 일본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95년 원폭투하 50돌 기념행사에서 ‘새벽을 불러들인 사나이’란 별명을 얻었다.
당시 30세의 대령이었던 티베츠와 14명의 부하는 1945년 8월 6일 오전 5톤에 달하는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7만~10만명의 민간인이 즉사했고 방사능에 오염된 이들도 수만명에 이르렀다. 3일 뒤 미국은 나가사키에도 두 번째 핵 폭탄을 떨어뜨렸고, 일본은 며칠 뒤 항복을 선언했다. 티베츠는 2005년에 열린 원폭 투하 60년 기념식에서 “임무를 맡게 됐을 때 감정적으로 힘들게 될 줄 알고 있었다”며 “우리도 감정이 있었고, 사람들을 죽이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최대한 빨리 살상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애국적인 임무였고 해야 할 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는 것은 자랑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매일 밤 잠을 잘 잔다”고 덧붙였다.
1937년 공군에 입대하기 전 의대 학생이었던 티베츠는 전쟁 뒤 국방부에서 일했고 티베츠는 1966년 퇴역한 뒤 1985년까지 택시업을 했다.
평소 그는 자신을 화장해서 전쟁 당시 비행하기 즐겼던 영국 해협에 유골을 뿌려주기 바란다고 말해왔다.
그렇다! 원폭은 신의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