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지도에 앞면. 새겨진 명문의 제작연대는 ‘태화(泰和)4년(369년) 5월 16일’ 이라는게 정설이었지만 제작일자가 ‘5월’이 아니라 ‘11월’이라는 X선 촬영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 연호인 ‘태화’가 아니라 백제 전지왕의 연호인 ‘봉원’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명문에는 칠지도를 ‘제후국 왕(후왕·諸侯)에게 줄 만하다’는 내용이 들어있다.|사진은 이소노카미 신궁 홈페이지, 판독은 홍성화·박남수씨 제공
칠지도 뒷면. “백제왕세자가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라”는 요지의 내용으로 읽을 수 있다.|사진은 이노소카미 신궁 홈페이지에서, 판독은 홍성화 교수·박남수 연구원
X선 촬영결과와 최근의 연구성과를 반영한 판독문. 기존 정설은 ‘태화 4년 5월16일’이었으나 ‘5월’이 아니라 ‘11월(혹은 12월)’이라는 X선 촬영결과가 제시되고, 연호도 ‘태화 4년’가 아니라 ‘봉원(奉元) 4년’으로 읽히며, ‘봉원 4년’은 중국 연호가 아니라 백제 전지왕 4년(408년)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칠지도 명문은 ‘칠지도를 후왕(候王·제후국 왕)에게 나눠줄만 하고, 백제왕세자가 왜왕을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라’는 골자로 읽을 수 있다. |한성백제박물관의 특별전 도록 ‘백제왕의 선물’, 2016에서 정리

최근 박남수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연호로 추정되는 칠지도 첫머리 글자를 ‘봉원(奉元)’으로 읽었다. 홍성화 건국대 교수와 박남수 연구원 등은 칠지도가 408년(전지왕 4년) 제작되어 후왕(제후)에게 내려줬다고 해석했다.
등에는 삼국이 독자 연호를 썼다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썼고, 백제의 경우 연호를 사용했다는 금석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무령왕 지석’에 황제의 죽음을 표현한 ‘붕(崩)’자가 새겨져 있다. 삼국이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loading=“lazy” style=“display: block; border-style: none; vertical-align: top; max-width: 1100px; width: 1100px; height: auto;”><삼국사기> 등에는 삼국이 독자 연호를 썼다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썼고, 백제의 경우 연호를 사용했다는 금석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무령왕 지석’에 황제의 죽음을 표현한 ‘붕(崩)’자가 새겨져 있다. 삼국이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칠지도는 1953년 일본의 미술품 부문 국보 제15호로 지정됐다. ‘372년 백제가 일본에 바친 보물’이라는 평가가 컸을 것이다.|일본 문화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