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건너뛰기

KJCLUB 한일 문화교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일본 학자, 17세기 한국은 유럽보다 선진사회였다

조회수 : 111
KO 255 killerJoe 2,811,753

미야지마 히로시(65) 교수

일본 봉건제론은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하면서 이른바 세계적 열강의 일원으로 등장했던 시기에 일본과 유럽의 역사적 동질성을 주장하기 위해 ‘발견’된 것으로서,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이 강한 역사인식이었고 일본사 연구의 탈아(脫亞)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주장이었다. …일본 봉건제론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이는 2002년부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에서 연구와 강의를 해온 일본 역사학자 미야지마 히로시(65·사진) 교수의 주장이다. 미야지마 교수는 교토대에서 일제시기 조1선 노동운동, 조1선 농촌경제 변동, 토지조사사업 연구로 학위를 받고 도카이대와 도쿄도립대,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를 거쳐 성균관대로 온 한국사 및 동아시아사 연구(경제사)의 독보적인 권위자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일본엔 유럽식 봉건제가 존재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일본 주류 역사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한 건 결국 제국주의 식민사관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한국·동아시아 경제사 연구 권위자
“유럽 중심 사관을 기준으로 삼아
동아시아 역사 규정하는 것은 잘못”

미야지마 교수는 근대 이전의 일본이 신분제 사회였다는 점에서는 조1선·중국과 확실히 달랐다고 본다. 다이묘나 하타모토 같은 상층 무사계급은 장자 가문(이에) 중심으로 통치 지위를 세습했고, 농업·상업·수공업을 가업으로 삼는 이에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조1선·중국은 신분제 사회가 아니었다. 중국은 송·명대 이후 중앙집권적 관료체제가 확립된 뒤로 오히려 신분제는 쇠퇴했다. 지배그룹은 과거에 합격한 개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됐으며, 그들의 지위는 세습되지 않았다. 이를 받아들인 조1선도 중국보다는 다소 폐쇄적인 지배 그룹이 형성되긴 했지만 신분제는 쇠퇴했다. 양반은 세습적·고정적 신분이 아니었다. “지배 신분에 속하는 자가 지역주민의 70~80%나 되는 현상은 신분제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사실들을 입증하기 위해 토지소유와 국가체제, 신분제, 지배계층, 가족과 친족 등을 이웃 나라들의 그것과 비교하며 다각적으로 살피는 이 일본인 연구자의 평생을 기울인 노력은 치밀하고 신선하다.

일본에선 왜 신분제가 존재했을까? 가장 큰 원인은 시장경제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신분제는 사회적 분업이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시장이 없을 경우 지배층이 이를 강제하기 위한 장치다.

전근대 유럽이 신분제 사회였던 이유도 시장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0세기께부터 시장이 등장한 중국은 18세기까지, 적어도 16세기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사회였다. 송나라의 신유학(송학)과 그것을 집대성한 주자학, 주자학이 채점기준이 된 과거제와 실력 위주의 관료등용제 확립, 신분제의 해체, 농업과 상공업의 비약적인 발전과 상품·화폐 경제의 진전이 그것을 대표한다. 그런 상황과 조응하는 사회구조를 미야지마 교수는 ‘소농사회’라고 부른다. 소농사회는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거나 다른 사람 땅을 빌리거나 간에 기본적으로 자신과 그 가족의 노동력만으로 독립적인 농업경영을 하는, 소농의 존재가 지배적인 농업사회를 가리킨다. 이는 대토지소유제를 토대로 한 유럽 영주계층의 직영지 경영 방식이나 광범위한 농업노동자들이 존재한 동남·서남아시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이런 독특한 소농사회가 중국에서는 송·명대 이후, 한국·일본에선 각기 양상이 좀 다르긴 하지만 17세기 이후 성립됐다.

이에 비하면 같은 시기의 유럽은 훨씬 후진적인 사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봉건사회를 기준으로 중국사, 동아시아 역사를 규정하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고전고대·중세봉건·근대 부르주아라는 단선적인 유럽적 발전사관을 표준으로 삼는 기존 역사인식이나 시대구분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미야지마 교수는 1991년에 자신이 <조1선 토지조사사업사의 연구>라는 첫 단행본을 냈을 때 한국 사학계 일부가 일제를 미화했다며 비판한 것도 유럽중심 사관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조1선도 일본처럼 자본주의를 향한 자생적·내재적 발전과정을 거쳐왔는데, 일제가 오히려 이를 망가뜨렸다고 보는 ‘자본주의 맹아론’이 그중의 하나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뉴라이트 계열 연구자들이 자본주의 맹아론을 비판했고, 미야지마 교수가 그들의 연구에 관심을 보인 것도 그에 대한 오해를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아시아 소농사회가 오히려 유럽보다 앞섰다고 보는 미야지마 교수에게 자본주의 맹아론 등은 유럽중심 사관에의 지나친 함몰이요 견강부회일 수 있다. 그는 그런 관점에서 한국 역사교과서들도 조목조목 비판한다.

내년 2월 정년퇴임을 앞둔 미야지마 교수는 이 서구중심적인 역사인식 패러다임을 뛰어넘어 한국·동아시아에 맞는 새로운 학문방법론을 수립하는 걸 여생의 주요 과제로 삼고 있는 듯하다.

번역문보기

日本学者, 17世紀韓国はヨーロッパより先進社会だった

ミヤジマHiroshi(65) 教授

日本封建制論は日本が露日戦争に勝利しながらいわゆる世界的列強の一員で登場した時期に日本とヨーロッパの歴史的同質性を主張するため ‘発見’になったこととして, はじめからイデオロギー的な性格が強い歴史認識だったし日本史研究の仮面よ(脱亜)的な傾向を見せてくれる主張だった. …日本封建制論は根本的に見直し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これは 2002年から成均館大東アジアアカデミーで研究と講義をして来た日本歴史学者ミヤジマHiroshi(65・写真) 教授の主張だ. ミヤジマ教授は京都台で日帝時期組1線労動運動, 組1線農村経済変動, 土地調査事業研究で学位を受けて東海台と東京都立台, 東京大学東洋文化研究所教授を経って成均館どおり全韓国史及び東アジア社研究(経済史)の独歩的な権威者だ. 彼の主張とおりなら, 日本にはヨーロッパ式封建制が存在したことがない. それでも日本主類歴史学者たちがそれほど主張したのは結局帝国主義植民史観論理を裏付けるためだ.

韓国・東アジア経済史研究権威者
“ヨーロッパ中心士官を基準にして
東アジア歴史規定することは過ち”

ミヤジマ教授は近代以前の日本が身分制社会だったという点では組1線・中国と確かに違ったと思う. 大名や羽田モットーみたいな上層武士階級は長子家門(これに) 中心に統治地位を世襲したし, 農業・商業・手工業を家業にするイエドルも存在した. しかし組1線・中国は身分制社会ではなかった. 中国はソング・名線以後中央集権的官僚体制が確立された後でむしろ身分制は衰退した. 支配グループは過去に合格した個人たちを中心に形成されたし, 彼らの地位は世襲されなかった. これを受け入れた組1線も中国よりはちょっと閉鎖的な支配グループが形成されたりしたが身分制は衰退した. 両班は世襲的・固定的身分ではなかった. “支配身分に属する者が地域住民の 70‾80%もなる現象は身分制国家ではありえない事だ.”

こんな事実たちを立証するために土地所有と国家体制, 身分制, 支配階層, 家族と親族などを隣り国々のそれと比べて多角的に察するこの日本人研究者の一生を傾けた努力は緻密で新鮮だ.

日本ではどうして身分制が存在しただろうか? 最大の原因は市場経済が発達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からだと彼は説明する. 身分制は社会的分業が自動的に成り立つ市場がない場合支配層がこれを強制するための装置だ.

前近代ヨーロッパが身分制社会だった理由も市場が発達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からだ. 10世紀頃から市場の登場した中国は 18世紀まで, 少なくとも 16世紀までは世界で一番先進的な社会だった. 宋の国の辛酉学(宋学)とそれを集大成した朱子学, 朱子学が採点基準になった過去制と実力主の官僚登竜制確立, 身分制の解体, 農業と商工業の飛躍的な発展と商品・貨幤経済の進展がそれを代表する. そんな状況と照応する社会構造をミヤジマ教授は ‘小農社会’と呼ぶ. 小農社会は自分の土地を所有するとか他人地を借りるとか間に基本的に自分とその家族の労動力だけで独立的な農業経営をする, 小農の存在が支配的な農業社会を示す. これは代地地所類題を土台としたヨーロッパ領主階層の直営誌経営方式や広範囲な農業労動者たちが存在した東南・西南アジアとは根本的に他の点だ. こんな独特の小農社会が中国ではソング・名線以後, 韓国・日本ではそれぞれ様相がちょっと違ったりするが 17世紀以後成立された.

ここに比べれば同じ時期のヨーロッパはずっと後進的な社会だっ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ヨーロッパ封建社会を基準で中国史, 東アジア歴史を規定することは大きい過ちに違いない.” したがって古典古代・中世封建・近代ブルジョアという断線(単線)的なヨーロッパ的発展士官を標準にする既存歴史認識や時代仕分けは間違ったというのだ.

ミヤジマ教授は 1991年に自分が <組1線土地調査事業社の研究>という初単行本を出した時韓国史学係一部が日製を美化したと批判したこともヨーロッパ中心士官と連関があると思う. 組1線も日本のように資本主義に向けた自生的・内在的発展過程を経って来たが, 日製がむしろこれをぶっ壊したと思う ‘資本主義萌芽では’このそのうちの一つだ. 植民地近代化論を主張するニューライト系列研究者たちが資本主義萌芽論を批判したし, ミヤジマ教授が彼らの研究に関心を見せたこともそれに対する誤解をけしかけたように見える.

しかし東アジア小農社会がむしろヨーロッパより先に進んだと思うミヤジマ教授に資本主義萌芽ではなどはヨーロッパ中心士官への度が外れた陷沒であり牽強附会であることができる. 彼はそんな観点で韓国歴史教科書たちも条目別に批判する.

来年 2月停年退任を控えたミヤジマ教授はこの西欧中心的な歴史認識パラダイムを飛び越えて韓国・東アジアに迎える新しい学問方法論を樹立するのを余生の主要課題にしているようだ.

좋아요·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

댓글 ( 2 )

게시물 목록

2,811,753

  1. KO 20 Jumong8
  2. KO 255 morort
  3. KO 255 morort
  4. KO 255 morort
  5. JA 255 竹島先住民
  6. KO 255 propertyOfJapan
  7. KO 255 morort
  8. JA 255 竹島先住民
  9. KO 255 amateras16
  10. 조회수 : 79
    KO 255 avenger
  11. KO 255 jap6cmwarotaZ
  12. 조회수 : 109
    JA 255 milet
  13. KO 255 cris1717
  14. KO 255 amateras16
  15. 5 조회수 : 109
    JA 255 dom1domko
  16. 조회수 : 89
    JA 255 sonhee123
  17. JA 255 bluebluebluu
  18. KO 255 avenger
  19. KO 255 jap6cmwarota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