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조선과의 관계
명나라는 1368년 건국 후 대내적으로는 전제왕정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자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형성해 나갔다. 명나라는 주변 나라들을 중화주의에 입각한 조공·책봉체제로 편입시켰다. 조선은 왕권의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 등 이웃 나라들과 함께 명나라의 조공·책봉체제를 받아들였다.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조선은 매년 서너 차례에 걸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해금정책을 취한 명나라와의 무역은 조공무역 형태로 이루어졌다. 조공 무역은 명나라의 황제가 주변 국가의 왕을 임명하는 책봉의 대가로 해당 국가들은 조공을 통해 황제에게 헌상물을 바치는 형식이었는데, 조선으로부터 견직물과 고려인삼 등을 받으면 명나라에서는 그 대가로 고급 견직물과 자기, 서적, 약재 등을 주었다. 조공무역은 조선에게 더 이익이 많았는데, 이는 조공 횟수를 둘러싼 두 나라의 주장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명나라가 조선에게 3년 1공, 즉 3년에 1번의 조공무역을 주장한 반면, 조선은 거꾸로 명나라에게 1년 3공, 즉 1년에 3번의 조공무역을 주장했다. 조선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반적인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조공무역은 제후국에서 제국에게 일방적으로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제후국에서 조공을 가져와 바치면 제국에서는 그에 대해 하사품을 내리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하사품이 조공품보다 더 귀하고 많아야 한 것 또한 원칙이었다. 더불어 사절단의 체제비와 물품운반비를 명나라측에서 모두 부담하였다. 이는 상국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방도였다. 결국 조공 무역은 제국보다는 제후국에게 더 이로운 제도라 할 수 있다.
[편집] 일본과의 관계
평소 명나라는 일본의 조공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1404년 명나라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10년에 한번씩 조공을 오되 인원을 200명 이내로 제한하며, 칼을 가지고 오면 도둑으로 치부해 죄를 따진다는 조건을 붙였다. 무역 장소는 절강성의 영파(寧波) 지역으로 지정했다.
이렇게 제한을 가한 것은 유황, 구리, 칼 등 일본의 물품이 명나라에서 특별히 필요한 물산들도 아닌 데다 천황이 아닌 영주들의 배가 주로 왔으며, 체류 경비를 부담하는 것도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점차 조공 인원을 300명으로 늘려 그런대로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16세기 초반부터 일본의 규슈 지방 상인들이 명나라 복건성 쪽 항구에 드나들면서 은을 옷감과 교환하는 무역을 벌였다.
이 무렵 에스파냐 상인과 포르투갈 상인들까지 절강성, 복건성 등지에 와서 무역 행위를 하자 명나라에서는 이들을 몰아내면서 일본 상인들도 함께 쫓아냈다. 그래서 1547년 이후부터는 일본의 조공선이 명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뒤 상인들은 아오먼(澳門, 마카오)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 결과 일본 상인들의 후원을 받는 왜구의 해적활동이 더 극심해졌다. 왜구는 주로 명나라와 조선을 공격 목표로 삼아 횡행했다.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의 중개 무역을 통해 명나라 상품을 사들이는 것이 번거로워 공식 무역로를 트려고 노력하며 조선에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조선은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정권을 잡은 후 명나라와 무역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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