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악산과 경복궁 (멀리 보이는 건물)

경북궁
대개 성곽을 쌓을 때 높은 산을 베고 있다.
가끔 언덕이나 산기슭을 나와, 또한 구불구불 둘러 있는 것이 보인다.
큰 것이 날아갈 듯 치첩이 솟아 있고, 작은 것도 우뚝하게 표관이 웅장하다.
환취(황해도 봉산군에 있는 누각)는 날아갈 듯 아름답고, 총수(산 이름)는 구름이 이어졌다.
보산(관<關> 이름)에는 서기가 날아오르고, 금암(관<關> 이름)에는 시내가 통과한다.
[개성은]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고,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평양)에 견줄 바가 아니다.
[서울의 모습은]트인 길과 통한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잘라낸 듯한 처마에 우뚝 빛나는 집이다.
모든 집은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 창을 뚫어 더위를 피한다.
[서울에는]종고라는 다락이 있다. 성 안의 네거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길가에 높고 높도다.
시끌벅적 수레와 말 소리가 울리고, 끝없이 어룡 유희가 나온다.
식기는 금, 은, 동, 자를 섞어서 쓰고, 품물(品物)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고루 많다.
경기 안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는 높아 구름을 막고, 물은 푸르러 거울처럼 비춘다.
나루로는 양화도가 있는데, 물산(物産)이 또한 번성하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 명나라 사신 동월의 조선부(1488년) , 1488년(성종 19)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본국에 돌아가 조선 풍토(風土)를 묘사한 책 -
이 나라는 풍요하여 많은 쌀과 보리가 나고, 과일로는 배, 호두, 무화과, 밤, 사과, 잣,
그리고 무진장한 꿀, 약간의 비단, 다량의 면화와 베를 생산하고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금과 은 광산은 적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말과 소, 양질의 노새, 당나귀, 게다가 전 국토에 걸쳐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그 밖에 갖가지 다양한 동물이 있다. 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람들은 피부색이 하얗고
건강하고 대식가들이며 힘이 세다. 그들은 터키 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역대의 조선 국왕들은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도시에 큰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가신을 거느린 관청이 있었다. 서민들의 집은 대부분 기와지붕이며,
그 밖에는 초가지붕으로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귀인과 부호들은
결이 고운 식물로 짠, 정교한 장식이 있는 극히 질 좋고 광택이 나는 돗자리를
집안에 깔고 있는데, 일본인이나 일본에 오는 포르투갈 인들은 그것을 매우 진귀하게 여겼다.
우리는 나가사키에서 조선으로부터 들여온 몇 벌의 백의를 보았는데, 그 옷에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게 공을 들인 자수를 해 놓았다. 그것은 어떤 부분은 짠 것인지
아니면 실과 바늘로 꿰맨 것인지 여간한 시력이 아니고서는 구별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이상의 내용들이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사람들을 통해 관백의 궁정이
조선에 대해 입수했던 정보의 요약이다.
- 선교사 , 루이스 프로이스 -
5월3일 술시. 조선의 도읍 동대문 안으로 진입했다. 거기서 황궁의 모습을 바라보니 옥루금전 늘어선 기와집. 널따란 성벽들의 조형미는 극치에 달하고 수천만 헌과 늘어선 대문들, 보귀로운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막아 싸우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온통 적막하였다.
내리(內裏)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 위에 솟아 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시황의 궁궐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중략) 그토록 용맹한 고니시 장군도 천자의 옥좌에 절을 하고 신성하고 고아한 분위기에 휩싸여 두 눈에 눈물이 괴니 소오스시마, 아리마, 오무라도 따라 눈물을 흘리었다.
- 고니시 휘하 장수 오오제키의 조선정벌기中 -
채색한 들보와 붉은 발에는 금과 은을 펴 돌렸고 구슬이 주렁주렁 달렸다. 천장 사방 벽에는 오색팔채로 그린 기린, 봉황, 공작, 학, 용, 호랑이 등이 그려져 있는데 계단 한 가운데에는 봉황을 새긴 돌이, 그 좌우에는 단학을 새긴 돌이 깔려 있다. 여기가 바로 용의 세계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인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다.
- 종군승(從軍僧) 제다쿠(是琢)의 조선일기 -
조선 사람들은 아주 가난한 사람이라도
집에 책이 있고 학문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다.
이는 선진국으로 자부하는 우리의 자존심마져 겸연쩍게 만든다
-<뚜르드 몽드> (1866)
조선에는 종이,인삼,금과 은, 각종 유약과 향료 등 귀한 물자와
3피트 높이의 조랑말 등 진기한 동물들이 풍부하다.
한국인들은 우아하고 자존심이 강하다
창덕궁

홍화문과
경북궁 근정전

일제 민족말살 경북궁을 해체하고 조선총독부 건축중
죽일놈들
유서 깊은 민족의 궁궐을 절단내고 이러고 있단다
일본 씨x놈들
본래 경복궁의 그림입니다
경희궁은 일제의 조선궁궐 훼손 정책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비운의 궁궐’이다.
원래 조선 인조의 생부인 원종의 사저가 있던 곳이다. 1616년(광해군 8년) 건립 당시에는 ‘경덕궁’이라고 불렀으나, 1760년(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고쳤다.
경희궁은 경사진 야산 지형과 조화를 이룬 구조로 건축적, 예술적으로도 뛰어났다.
숙종 때 편찬한 ‘궁궐지’를 보면, 전각과 문루가 99동에 이를 정도로 대규모였다.
그러나 경희궁은 일제의 침략 뒤 경성중학교로 바뀌면서 완전히 해체됐다.
이는
경복궁을 조선총독부로!!,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창덕궁을 비원으로,
덕수궁을 미술관으로 격하!!!!
정전인 숭정전은 1908년 경성중학교의 교실로 이용되다가 일본 절 ‘조계사’로 팔렸고,
현재는 동국대의 ‘정각원’이라는 불당으로 남아 있다.
정문인 흥화문은 1932년 이토 히로부미 사당인 ‘박문사’의 북문으로 사용되다가
해방 뒤 신라호텔 영빈관 정문으로 쓰였다.

현재 아주 일부의 모습만 남아있는 경복궁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경복궁은 실제 경복궁의 10분의 1수준이라고 합니다
본래 경복궁은 북쪽의 청와대부터 남쪽까지가 웅장하고 상당히 넓고 규모가 컸다고 합니다
그 경복궁이 임진왜란때 불타고 고종때에 재건될때까지만 해도, 재건의 주도자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왕권강화의 명목으로 삼았던 만큼 규모가 컸으면 컸지, 기존보다 줄여서 복원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 . .
재건된 경복궁은 당연히 조선의 정궁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지만, 대원군 실각후 누구 소행인지 모를 화재가 나 경복궁 일부가 불에 타고, 일제시기에 다시 일본이 훼손을 자행하면서 심각하게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결론은 경복궁을 축소 훼손한 것은 일본이란 얘깁니다..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고 일제는 경복궁은 물론이고,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특히 창경궁에는 동물원까지 만들어 궁이 아니라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공원구실을 했을 정도니..
그 훼손의 정도가 얼마나 됐을지는 짐작이 갑니다 . .
성군 고종황제에 대한 쓰라린 연민의 눈물만 . .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
마지막 황제 순종의 유언
한 목숨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 일본을 가리킴)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을 뜻함)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박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요.
나ㅡ구차히 살며 죽지 못한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生民)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는지라.
깊은 곳에 갇힌 몸이 되어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지금 한 병이 위중하니 한 마디 말을 하지 않고 죽으면
짐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지금 나 경에게 위탁하노니
경은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認准)과 양국(讓國)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여러분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들을 도우리라.
(조정구에게 조칙을 나리우심)
『신한민보(新韓民報)』 1926년 7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