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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종중 일본인만 명예백인의 지위가 주어진 것으로 착각한 원숭이가
백인에 의해 명예백인의 지위가 주어진것이 너무 황송하고 자랑스러웠지만
명예백인이라는 것은 사실 그저 외교적 제스춰로 써먹는 수단이었을 뿐이다KKKK
https://namu.wiki/w/한국-남아프리카 공화국 관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신인 남아프리카 연방은 1950년 한국 전쟁 때 UN군으로 참전하였다. 당시 파병된 남아연방 공군 대대는 826명 중 36명이 전사하고 8명이 포로가 될 정도로[2][3] 국군과 함께 피흘리며 열심히 싸웠다. 덕분에 남아공은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남아연방/남아공이 한국 전쟁 당시 UN연합군 중 하나로 참전하여 우선 수교 대상국이기는 했으나, 남아공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펼친 탓에 공식적인 수교는 바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남아공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가고 있었기에 남아공이 한국측에 명예백인 국가로 대우해 주겠다며 구애하는 스탠스였다.[4] 한국 측에선 수교협상을 위한 물밑 접촉은 했지만 수교해봐야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있어 교착 상태에 머물렀다. 당시 남아공에 대한 이미지가 대단히 나쁜 상태에서 섣불리 수교했다간 외교적으로 심각한 손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물밑 교섭의 사례로, 영국 주재대사인 김용식은 본국의 지침에 따라 주영 남아공 대사관을 방문해서 수교 문제를 타진했는데, 남아공 측에서는 "만일 한국이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국교를 맺으면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백인국가군(郡)의 명예회원국으로 백인 국가와 같은 대우를 하겠다." 라는 제안을 하였다. 이후 김용식 대사는 이 문제에 대해 영국 외교부와 접촉했는데, 영국 측에서는 "남아공과 수교하면 세계의 많은 나라로부터 반발을 사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김용식은 본국에 수교가 불가능함을 보고했고, 교섭은 그대로 결렬되었다.(출처:김용식, "새벽의 약속", 김영사, 1993, p.406-407.)
그러던 중 1976년 남아공 정부가 소웨토 항쟁을 강경 진압하였고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대한 국제적 비판이 거세지자, 결국 대한민국도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남아공과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단절하기에 이르렀다. 흑백 인종차별 문제로 인해 1964 도쿄 올림픽부터 참가 및 출전이 정지되어 1988 서울 올림픽에도 참가하지 못하였다.[5] 그래도 국가 간의 외교를 단절한 것과는 별도로 민간 경제 교류는 이전부터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다만, 이 역시도 아파르트헤이트의 영향을 좀 받기는 했는데, 일례로 1990년대 이전까지는 비자 등의 문제로 반드시 나미비아[6]를 거쳐서 남아공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1992년 인종차별 정책을 폐지하고 나서야 수교가 이루어졌고, 1995년에는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방한하였다.
1995년 5월 27일에 정부와 업계 대표 30여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민관무역투자조사단이 남아공과 이집트에 파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