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천황이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본 사람 누구도 천황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죠 히데키-
1939년 7월 육군대신을 앞에 두고 ‘(중일전쟁)결말을 어떻게 내려고 하느냐’
, 1940년 5월 “중국이 의외로 강하다. 전쟁의 진상을 모두가 잘못 보고 있다. 특히, 전문인 육군조차 관측을 잘못하고 있다”
1940년1월 “중국을 얕봤다. 되도록 빨리 전쟁을 끝내 국력을 더 비축하라"
1941년 12월 ( 진주만 공습 직후) “평화를 되찾으면 남양을 보고 싶다. 일본의 영토가 된다면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히로히토-
" 나는 허수아비였을 뿐이다, 하지만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


( 평민 출신 히로타 고키는 전쟁과 무관한데도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지만
귀족줄신 고노에 후미마로는 히로히토를 원망하며 자살했다)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지만 히로히토 대신 전범이 된 두 전임 수상들은 자살과 처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일본에서 수십 년 동안 일본사를 가르쳐온 역사학자 허버트 빅스는
책 <히로히토 평전-근대 일본의 형성>에서
히로히토의 활약을 정리하며
그를 “기동성 있는” 군주라고 썼습니다.
책의 내용을 보면,
대화의 수가 적었던 히로히토는 침략 행위와 정책에 대한 재가와 인정, 용인 등을 통해 자신의 의중을 구현했습니다.
내각 각료와 군부의 이견이 발생하면 그는 늘 강경파 군부를 지지했으며
1931년 일본 육군(관동군)이 상부 명령을 무시하고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도 처벌론을 외면하고 육군의 강경 도발을 용인했습니다.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에서는 대본영에서 직접 전쟁을 지휘했었는데요.
패색이 짙어지던 1942년께부터 도고 시게노리 당시 외무대신이 건의한 항복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핵폭탄 투하는 항복을 거부한 히로히토의 탓이다

히로히토는 그의 긴 인생 여정 동안 과연 어떤 도의적 책임을 지었는가?
히로히토는 "오래 살았더니 사촌의 장례에 가는 일이 생기거나 전범이라는 소리를 듣곤한다"
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이렇게 아름답고도 처연한 미소를 본 적이 없다

생물학자 , 평화주의자로 자신을 포장한 히로히토

전쟁에 지면 자신은 사형 당할 것이라고 히로히토는 생각했겠지만(그래서 전국민에게 玉碎를 종용했다)
하지만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는
일본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고 싶어했다
점령 이후 일본의 반발로 인한 테러등을 염려 했다
맥아더는 대통령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불필요한 아군의 피해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히로히토는 1989년 까지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