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편집
세종실록 지리지(1454)에는 김(海衣)이 각 해안 지방의 특산품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감태(甘笞) · 미역(藿) 등과 구분하고 있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는 진상품이나 명나라 조공 등으로 바친 기록이 있다.[1] 효종실록에는 1650년 당시 김 1첩의 값이 목면 20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2] 《성호사설》(18세기)에는 바닷바위에 자연적으로 붙어 자라는 김(海衣)을 종이처럼 말리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김 양식을 어디서 먼저 시작했는지는 크게 두 가지 설로 나뉜다. 광양설과 완도설이 있다. 광양설은 김여익(金汝翼, 1606년 ∼ 1660년)의 비문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이는 1713년에서 1714년 사이에 광양현감 허심(許鐔)이 쓴 것으로 비 자체는 사라졌지만 비문은 5대손 김태혁(金太赫)이 필사한 것이 전해진다. 이 비문에는 김여익이 1640년 우본현 인호(지금의 태인도)로 이주하여 김 양식을 시작했다고 쓰여 있다.(“庚辰春遂隱遯于本縣仁湖伴鷗寓樂始殖海衣”)[3] 광양시에서는 김 시식지(김始殖地, 전남기념물 제113호)를 만들어 이를 기념하고 있다. 한편 완도설에서는 김유봉과 정시원을 김 양식을 처음 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
김(nori)의 기원은 한국(1400년대)
일본에 오리지날은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