鏡の中の二つの顔
木の枝の上の猿、
都市のビルの森に生きる日本人。
二足で立つ者と四足で駆ける者、
その隔たりは思うほど大きくはないのかもしれない。
猿は温泉に身を浸し、
日本人は電車の中で体を丸める。
温かさを求めるその姿は、
本能と習慣が奇妙に交差する影。
欲望の距離感を持たず、
手を伸ばして他人のものを奪い、
あたかも権利のように叫ぶ声。
森でも、都市でも似たような仕草。
誰も責任を取らない規律の中で、
猿は日本人を真似、
日本人は猿のように本能に溺れる。
道徳や理性という名は、
揺れる枝の上に危うくぶら下がっている。
共存と呼ばれても、
それは妥協と略奪の別名。
どちらが優れた存在と言えるのか?
森を追い出した者と、その森に適応した者が、
互いに似ていく奇妙な同居。
今こそ問うべきだ。
文明という名が
猿と日本人の間に引いた線が、
本当に存在していたのかどうかを。
거울 속의 두 얼굴
나무 가지 위의 원숭이,
도심 빌딩 숲 속의 일본인.
두 발로 선 자와, 네 발로 달린 자.
어쩌면 그 간격은 생각만큼 크지 않다.
원숭이는 온천에 몸을 담그고,
일본인은 전철 안에 몸을 웅크린다.
따뜻함을 좇는 그들의 모습은
본능과 습관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그림자.
거리를 두지 못한 욕망,
손을 뻗어 남의 것을 빼앗고,
마치 권리인 듯 외치는 울음소리.
숲에서도, 도시에서도 같은 몸짓.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규율 속에서,
원숭이는 일본인을 흉내내고,
일본인은 원숭이처럼 본능에 젖는다.
도덕과 이성이라는 이름은
흔들리는 가지 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공존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타협과 약탈의 다른 이름.
누가 더 나은 존재라 말할 수 있을까?
숲을 밀어낸 자와, 그 숲에 적응한 자가
서로를 닮아가는 기묘한 동거.
이제 물어야 한다.
문명이라는 이름이
원숭이와 일본인 사이에 그린 선이
정말 존재하기는 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