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왕 신사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枚方)시 니시노초 나카노미야(西之町中宮 1-68) 언덕에 올라서면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라는 큰 간판이 우뚝 서 있다.
백제왕신사는 백제사 사적공원 경내와 서쪽으로 잇대어서 함께 자리 잡고 있다. 백제왕신사는 그 옛날 구다라스(百濟洲) 땅에서 백제 왕족이 조상을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백제사 터전 사적과 함께 매우 유서 깊은 명소이다. 오사카땅 난파진 앞바다는 본국 백제와의 직통 항로가 되었던 곳. 그러기에 백제인이 일본 본토에서 최초로 개척한 구다라스땅에 가장 먼저 백제왕족 사당이 섰다는 것은 지정학적으로도 설득력이 있다.
일본 천황가와 백제인들은 혈통적으로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라 신사

일본열도 전역에 산재한 30여만 개의 크고 작은 신사 중에서 단일신을 봉안하 고 있는 신사로는 신라신사(新羅神社)가 최고다.
근세까지만 해도 2천7백여개나 있던 신라신사가 50∼60년 사이에 7백여개가 합사(合社)되거나 없어져 버렸고 지금은 2천여개가 남아 있다. 이 숫자 역시 적은 것은 아니다. 박혁거세나 신라의 훌륭한 조상을 제사지내는 신라신사가 아직도 2천여개나 남아 있다는 것은 신라인들의 신앙심과 투철한 민족혼이 어떠한지 엿볼 수 있는 단면이기도 하 다.
또 일본에 살고 있는 신라인들은 그들의 성씨(姓氏)를 보존하고자 하는 마음도 유달리 강했던 것 같다. 실제로 『속일본기(續日本記)』에 보면 제45대 쇼오무(聖武) 왕 때인 서기 773년, 일본 무사시노국(武藏野國) 사이타마현(埼玉縣)에 살던 신라인 53명이 성을 김씨(金氏)로 해줄 것을 청원해 허락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곳에 김씨가 많이 살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한편 신라유민들은 니가타현 외에도 교토와 오사카 그리고 멀리 규슈에까지도 그들의 세력을 뻗쳤는데 그 유적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교토(京都) 인근의 오쓰시(大津市)에 위치한 신라선신당은 8·15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어느 지도에서나 신라사(新羅社)로 표시돼 있었는데 현재는 미이데라(三井寺)로 바뀌어 있었다.
최근에 답사해 보니 신라사가 소재한 비예산 자락 초입에 있는 미이데라는 규모가 매우 크고 참배객들이 무척 많았지만 숲이 무성하게 우거진 신라선신당은 찾아오는 사람 도 드물고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과거에 비와코(琵琶湖) 주변 일대에 절이라고는 신라사(新羅社) 하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30여 개의 절이 새로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신라사(新羅社)마저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으로 이름이 바뀌고 규모가 줄어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신라선신당이 비록 규모는 작지만 미이데라의 수호신(守護神)이라고 소개했다.
고구려(고려)신사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에서 서북쪽으로 약 50㎞ 떨어진, 2002년 월드컵 개최지 중 한 곳이기도 한 사이타마현(埼玉縣) 이루마군(入間郡) 히다카(日高)시에는 고구려신사인 고려신사(高麗神社, 고마진쟈)에서 관리책임자인 궁사(宮司, 규시)로 있는 고려징웅(高麗澄雄, 고마 스미오) 씨가 살고 있다.
고구려의 왕족인 약광(若光)을 모시고 있는, 1999년 현재 72세의 고려징웅 씨는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재위: 642∼668)의 후손으로, 약광왕자의 59세손(孫)이다.
고려역에서 3㎞ 정도 가면 보장왕의 막내아들인 약광의 무덤이 있는 성천원(聖天院, 세이텐인)과 그의 사당인 고려신사(高麗神社)가 나온다.
고구려가 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 이들은 당시로서는 선진 기술자들이어서 황무지 개척이나 토기, 농기구, 금은장식, 무기 등의 제조에도 기술이 뛰어났고 해안 지방에서는 소금을 만들어 팔았다.
그 후 약광이 나이가 들어 죽자 유민들은 이 비운의 왕자를 기려 고려신사를 지었고 다른 지방으로 흘러들어간 고구려 유민들도 그 지방에 고구려와 관계가 있는 신사를 지어 추모했다고 한다.
고려징웅 씨의 선조가 일본에 건너온 것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평양을 한창 공격하던 서기 666년의 일이었다. 그때만해도 한반도와 일본은 서로 왕래가 자유로왔다.
668년 나라가 망하자 왕족과 고구려인들이 일본으로 망명, 지금의 도쿄 근교 무사시노(武藏野) 지방에 터전을 잡고 황무지를 개간해「작은 고구려」를 이루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때 이곳에 모여든 사람은 1천7백99명이었다.
이 마을의 지도자가 고려(高麗)란 성(姓)의 창시자인 약광(若光)이었고, 그가 바로 보장왕의 막내아들이었다.
서기 716년 당시 일본정부는 이곳에 고려군(高麗郡)을 신설하고 고려약광(高麗若光)에게 왕(王)의 칭호를 주면서 군(郡)을 통괄하도록 했다.
고려군은 명치(明治)유신 때인 1897년(명치 29년)에 사이타마현(埼玉縣) 이루마군(入間郡)에 편입되어「고려군(高麗郡)」이 라는 공식명칭은 없어졌지만 지금도 이곳은 옛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대대로 이곳에 살면서 신사(神社)를 지키고 족보까지 전수해 오고 있는데 명치(明治)기에 이르기까지 고려(高麗)라는 성(姓)씨는 일본에서 고려징웅 가족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종가에서만 고려(高麗)성씨를 쓰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고려향(高麗鄕)이라고 부르는 고려촌(高麗村, 고마촌) 사람들은 두 가지 전통을 꼭 지켰다. 장자에게 가문의 혈통을 이어주는 것과 다른 하나는 고려촌 내 사람들끼리만 결혼이 그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은 동경만 인근 오이소(大磯ㆍ어서오시오라는 남한(南韓)의 방언에서 유래)해안으로 상륙하여 사이타마에 정착, 고려촌을 이루어 살아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