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설은 대개가 그렇듯이 끝까지 읽고 나면
허무하고, 우울해진다.
『상실의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상실’에 대한 이야기였으니
그 허전함과 안타까움은 더할 수밖에.
우리는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
더불어 우리는 누군가에게 잊혀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문제는, 우리는 누군가를 상실하면서 살고,
누군가에게 상실된다는 것 자체를 잊는다는 사실.
하이데거의 존재망각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잊혀진다는 것에 대한 슬픔,
잊는 것에 대한 죄책감 없이 그저 슬프다,
안타깝다는 등의 감정을 늘어놓는 것은 사치일 뿐이다.
왜 슬프고, 왜 안타까운지,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야 이 감정을 극복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는 게 좀 더 현명한 일이며 그것이야말로
나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상실하고 상실 되는 삶을 사는 동안에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숙해지며, 세상과 소통하며
살게 된다. 이런 많은 것을 하게 해주는
‘상실’을 너무 가볍게 생각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나는 그런 적이 없다고
부정하며 내가 잃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한다면 세상을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상실의 시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정신병, 자폐에 가까운 고독,
과도한 개방적 성향. 이유는 다양하지만
모두 사랑하지 못해서, 사랑 받지 못해서
가지고 있는 상처들이다. 서로를 보듬고 사랑하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 과정에서
‘상실’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러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 보내고
아파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하루키는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주 다채롭게 풀어내고 있는데,
우리 눈에는 그저 나와는 상관없는 세계의 요상한
이야기 정도로 보일 뿐이다. 그들이 외계인인지,
자신이 외계인인지 판단하는 건 각자의 몫일 뿐. 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낄 테고, 그렇지 않다면 정말이지 이건 알 수 없는 세계의 이야기.
하루키의 문학은 철학과 닮은 구석이 많다.
어떻게 보면 그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모든 이의 일반적인 생각으로 받아들이게끔 만드는 힘이 있다.
하루키의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적어도 한 사람은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고 그 순간부터 몰입하게 된다. 손을 뗄 수가 없다. 그래서 밤을 지새우며 나와 닮은 그 인물에 집중하지만, 결말은 다르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끝난다. 나와 닮은 줄 알았던 그 인물은 사실, 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때 느끼게 되는 상실감. 이거야 말로 최고다. 나의 일부분이 떨어져나갔다는 허전함, 나와 비슷한 구석이 하나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한 구석도 없음을 깨달았을 때의 허탈함.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 항상 이런 기분을 맛보게 되지만 『상실의 시대』에서의 상실감은 제목에서부터 선전포고를 했듯이 다른 글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깊다. 그래서 여운이 오래 남는다. 한참을 생각하고 허탈해 해야 한다.
하지만 『상실의 시대』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암리타』만큼 음울하지는 않다. 서로 사랑한다는 확신,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끝나는 하루키의 소설은 확실히 바나나의 소설보다 희망적이다. 내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 묻고,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잃고 얻는 것은 하루키나 바나나나 마찬가지이지만.
잃는 순간 얻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순간 죽음과 가까워지고, 타인의 존재를 상실하는 순간 고독을 얻게 된다. 그렇다. 나오코는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가즈키를 얻고, 와타나베를 잃었다. 와타나베는 진정한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나오코를 잃고 미도리를 얻었다. 모두 무엇인가를 잃고, 얻는다. 잃으면서 얻는다. 얻기 위해 잃기도 하고, 잃어버리기 위해 얻기도 한다.
어떤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어떨 때에는 잃을 수밖에 없기도 하고, 어떨 때에는 어쩌다 보니 잃기도 한다. 어떻게 잃느냐, 무엇을 얻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다만, 내가 지금 무엇을 ‘상실하고 있다’는 그 상실 자체에 대해 깨닫고 있어야 한다. 존재함 그 자체를 깨달아야 온전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하이데거처럼, 상실함 그 자체를 알고 있어야 온전한 나와 소통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지금 무엇을 상실하려고 하는가. 하루키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늘 좋아하는 반디앤 루니스 서점에 들려서
한 켠에 서서 책을 읽었다. 누군가 책을 읽다가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는데 책의 페이지마다 사과가 그려져
있었다. 154페이지 정도 읽고 있을 때 막 울기 시작했던
그 사람의 책 제목이 궁금해졌는데...<이시카와 다쿠지>作
"기적의 사과"라는 책이었다. 다음에 이 책을 꼭 읽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