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 사학자들이 일본서기의 기록마저 뜯어고쳐 조작하면서까지
신공 연대를 120년 끌어내린 근본 목적은 오로지 광개토대왕비문에 있는 연대(391년)에 뜯어 맞춰 놓으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왕후의 삼한정벌은 바로 대마도의 정벌을 말한 것이다. 종래에 일제 식민사관은 일본의 정사인 {일본서기}에서 신공왕후가 고구려·백제·신라의 삼한을 정벌하였다고 한 기록을 이용하여, 고대에 일본이 200여 년 간 한반도 남부(백제·신라·가야)를 지배·경영하였다고 하는 허구의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는 근거의 하나로 삼아왔었다.
그러나 신공왕후의 저 유명한 '삼한정벌'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고구려·백제·신라의 삼한(삼국)을 정벌한 것이 결코 아니며, 바로 '대마도 정벌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2∼3세기경의 인물인 신공왕후(=卑彌呼=細烏女)가 정벌한 삼한은 당시에 삼국이 각기 나누어 다스리던 대마도(임나)의 3가라 즉 "좌호가라(신라), 인위가라(고구려), 계지가라(백제)"를 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네리친왕(舍人親王)이 편찬한 {일본서기}에서도 "이것이 소위 삼한이다(是所謂之三韓也)" 하여 한반도의 삼한과 쓰시마(대마도) 내의 삼한(곧 3가라)을 명백히 구별하여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 식민사학은 신공왕후의 삼한정벌을 마치 삼국을 정벌한 것 인양 과대망상적으로 엉뚱하게 확대 해석하였으며, 그 뒤로 계속 200여 년 간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지배했다는 식의 억지 주장을 펴왔다. 그리하여 일제시대 때 다시 한반도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통치하는 것은 침략이 아니라 신공왕후에 의해 정복된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일 뿐이라고 함으로써 침략사관을 정당화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임나일본부에 의한 남한경영설(南韓經營說)을 입증하는 결정적 근거자료로서 가장 절대적인 비중을 두었던 내용이 광개토대왕비문의 영락(永樂) 6년(396)조에 있는 다음의 기사이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殘國…"
즉 신묘(辛卯, 391)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를 정벌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해석대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쳐서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가정하자.
고구려는 응당 자국중심의 조공체제를 깨뜨린 왜를 응징해야 한다. 그러나 백제만을 공격했다.
백제와 함께 왜의 신민이 되었다는 신라는 공격하지도 않았다.
비문에서 도리어 신라는 고구려의 구원 대상으로 나타난다. 신라가 신묘년에 왜의 신민이 되었다면 영락 9년에 신라가 왜의 침공을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인식에 따라 최근 학계에서 공인되고 있는 학설은 고구려를 주어로 하여 "신묘년 이래로 왜가 건너오니 그때마다 격파하였다"라는 해석이다.
이것은 일찍이 정인보(鄭寅普)가 주장하였고 박시형(朴時亨) 등 여러 학자들
이 정인보 학설에 토대를 두고 수정 보완된 여러 해석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지는 百殘 羅의 부분은 글자가 지워져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으나 百殘(백제를 비칭한 것) [新]羅를
신민(臣民)으로 삼은 것은 역시 고구려 광개토대왕이지 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신묘년 기사를 실은 비문 자체가 일본 참모본부가 밀파한 군사 스파이
사꼬오 가케노부(酒 景信) 중위에 의해 변조됐다는 것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명백히 밝혀진 바 있다.
사카와본 나이또본 샤반느본
(왼쪽) 1881년에 만들어져 서건 신교수가 신발견한 최고의 탁본
( 오른쪽) 1883년에 ,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사카와경신(sakou kagenobu) 이 입수한 탁본
광개토대왕비문 변조 일본 참모부가 밀파한 군사 스파이(spy) 사꼬오 가케노부 중위에 의해 광개토대왕비의
주요 글자가 변조되고 지워지게 되었다.
사꼬오 중위는 1884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공식화하였다.
더러운 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