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한족이라는 개념이 성립된 한(漢)나라 이후 중국의 역사는 철저한 이민족에게 지배당한 역사였다. 한나라가 망하고, 삼국시대 이후, 사마씨에 의해서 진나라가 성립하게 된다. 하지만 진나라는 곧 이민족들에게 패퇴하여 남부지역에 자리잡게 된다. 이 시기를 일컬어서 동진이라고 한다. 하지만 동진은 곧 망하고 이민족들에 의해서 5호 16국 시대가 개막된다. 동진이 망한 420년부터 오랑케 출신이 세운 수나라가 창건,된 후, 망한 618년까지 이민족의 지배를 받고, 당나라가 들어섰으나, 당나라를 세운 이연도 이민족인 선비족 출신이다. 즉, 중국역사 420년부터 당나라가 망하는 907년간 총 487년간 한족은 "이민족의 노예"였다.
(420년~907년 487년간) 그러나 여기에서 중국의 노예역사는 그치지 않는다. 당나라가 망하자 5대10국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데 5대 10국의 주축세력은 돌궐족이었다. 다시 907년에서 960년 송나라가 세워지기전까지 53년의 노예 역사가 추가 된다.
(907년~960년 53년간) 지금까지 총 540년이 중국역사 중 노예역사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540년간의 노예역사를 거치면서 그들의 정신세계에는 "나는 노예다"라는 정신이 깊숙히 박혀있었다. 그리하여 중국 송나라가 세워진 후에도 요나라와 금나라에 조공을 받치면서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원했다. 거란족인 요나라가 907년에서 1125년까지, 여진족인 금나라가 1115년에서 1234까지 존재했으니, 총 327년의 역사가 노예역사로 중국사에 편입되게 된다.
(907년~1234년 327년간) 이런 오랜 노예근성을 버리고자 송나라는 새로이 세력을 확장하던 몽골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켰으나, 노예근성에 찌들어버린 그들은, 마침내 나라까지 이민족 몽골이 세운 원나라에게 내어주게 된다. 1234년에서 1368년까지 천한 농민의 자식이 세운 명나라가 나타나기 전까지 몽골 이민족의 노예로써 총 1001년간 이민족의 노예로써, 충실하게 살아오게 된다.
(1234년~1368년 134년간) 곧이어 명나라가 나타나지만 명나라 1368년에서 1644년까지 276년간은 노예들에게는 과분한 기간이었다. 여진족은 이들 노예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갖는것을 용서치 못하여 곧바로 이들 노예들을 응징하러 간다. 이로 인해서 또다시 이민족 여진족에 의해서 명나라는 멸망하고, 중국에는 청나라가 세워지게 되어 그후, 1644년에서 1911년까지 267년간을 노예로 살게 된다. 여기까지 총 1268년간 중국 노예들의 역사가 이어져 오게 된다.
(1644년~1911년 267년간)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청일전쟁에서 패퇴하고난 뒤 20세기초부터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홍콩,까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내륙일부 지역이 일본에게 정렴당하고
1931년에는 일본에 의해서 만주국이 세워지기까지 한다. 1945년 일본세력이 물러나기까지 34년간의 노예역사가 추가된다.
물론 여기서 노예역사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홍콩은 영국에 의해서 156년간, 마카오는 1999년까지 포르투갈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홍콩과 마카오를 제외하더라도 한족은 한나라 이후에만 총 1302년의 노예생활을 해왔다. 전체 역사로 볼땐 4,600년 역사에서 한족이 다른 민족의 통치를 받은 것이 4,200년이다. 요순시대의 요(堯)가 망한 이후 한족은 모두 타민족의 통치를 받았다.
중화지도자가 쓴 "중국의 역사 = 노예의 역사" 글 요점
중국인은 강하지 않다. 스파르타처럼 태어나면서 전사인 강한 종족이 아니다.중국인은 용맹하지가 않다. 알렉산더대왕의 군대처럼 강력하지 않다. 성품자체도 오히려 유순하고 비굴할정도다. 중국의 영토가 넓어서 오랜세월 버틴것도 아니다. 로마처럼 유럽전역을 다 먹고 아프리카를 먹을정도로 넓지도 않았다. 중국의 고대문명이 다른 문명보다 나은것도 없다. 이집트나 인도처럼 발전되고 풍요롭고 아름답지도 못했다.
하지만 중국인은 우리 한족은 살아 남았고 부강해졌다. 그건 중국인 특유의 완강함에 있다.
중국은 늘 인상식이 있어왔다. 인상식은 모든 도덕과 질서의 막장이다. 수많은 침략으로 인하여 한족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타민족에게 의해서 군량비 대신 사람고기를 즉석에서 제공하였다. 인육은 돼지고기나 쌀보다 가격이 쌌다.알고 있는가? 중국 역사상 인상식은 늘 있어 왔다는것을. 어떤이는 중국의 역사를 보고 "사람을 먹다"란말만 나오는 인상식 역사라고까지 했다.
갈족의 군대는 군량미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양식을 빼앗지 못하면 한족여자를 약탈하여 밤에는 간음하고 낮에서 죽여서 삶아먹었다. 요하에서 온 모용선비는 업성을 점령한후 5만의 한족소녀를 빼앗아 모조리 부하들에게 줬다. 사병들은 먼저 간음한후 삶아먹었다. 겨울이 지나자 5만의 소녀는 한명도 남지 않았다.
북송말년의 정강지난때 금나라병사가 남침하여, 강회일대에 식량이 모자르자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기 시작했다. 당시 군대는 인육을 군량으로 삼았는데 사람을 "두 다리 달린 양" 이라고 불렀다. 늙고 마른 남자는 "요파화" 라고 불렀는데 그살을 구우려면 불이 많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젊은 여자는 "불선양" 이라고 불렀는데 양고기보다 맛있다는 뜻이었다. 어린아이는 "화골란"이라고 불렀는데 그뜻은 살과 뼈를 함께 먹을수 있다는 뜻이다.
원나라 말기에 관군의 양식이 부족하자. 역시 백성을 잡아서 먹었다. 인육을 먹는 방법은 풍부하여 3권짜리 요리책이 만들어 지기도 했다.
수나라말기 제갈앙과 고찬은 살인마였다. 어느날 고찬이 제갈앙을 연회에 초청했다 주요리는 10살된 쌍둥이형제였다 한미첩이 술을 따르다 실수를 했는데 제갈앙은 그 첩을 큰통에 넣고 삶았다 그리곤 통채로 식탁위에 얹어놓고 먹었다.
사실 중국은 망국이었다. 남북조의 오호난화는 이미 망국이라고 할만하다. 그 후에 쇠약한 송나라는 계속하여 거란, 여진과 몽골의 살인방화와 약탈을 겪었다. 수백만의 평민들이 도살당했따. 군량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악비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가군은 거의 유일하게 승리한 송나라군대이기 때문이다.
원나라군대가 남하하면서, 도시를 도살했다. 사병들의 취미스포츠활동은 바로 누가 사람머리를 더 많이 자르는냐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북방의 등기인구는 4,500만이었다. 원나라군대가 지나간후 겨우 600여만이 남았다. 중원지역은 수천리에 인적이 끊겼고, 백골이 들판에 널려 있으며, 우물에는 시신으로 가득차서, 물을 마실수가 없었다.
특히 기록할만한 것이라면, 원나라군대를 지휘하여 송을 멸망시킨것은 하북 탁주의 한족인 장홍범이었다는 점이다. 나의 사랑하는 중국이여, 너는 어떻게 이런 망국과정에서 열반할 수 있었는가? 276년후(1644년), 두 한족 이자성과 오삼계는 기녀 진원원을 위하여 수십만의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에서 전투를 벌인다.
청나라군대의 도르곤은 홍승주의 계책하에 그 틈을 뚫고 이자성을 대패시킨후, 북경에 진주한다. 1662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가 오삼계에 의하여 운남에서 교살당한다. 1683년, 청나라에 투항한 명나라 장수인 한인 시랑은 청나라군대를 이끌고 대만으로 쳐들어가 정성공의 후손을 물리친다. 명나라의 감국 영정왕 주술계는 자살하고 만다. 이것이 중국의 제2차 망국이다.
청나라 군대는 남하하여, 명나라가 오랫동안 먹여살렸던 장수들은 모조리 투항한다. 그저 일개문신 사가법이 양주에서 칠일밤낮을 버티면서 사수하다가 결국 성이 함락되었다. 청나라 군대는 십일 밤낮동안 성안에서 도살극을 벌인다. 이것이 역사에서 전하는 "양주십일"이다. 이때 죽은 자가 80만이 넘는다.
1년후, 청나라군대는 10일내에 강남의 인민들에게 체두변발을 할것을 명한다. "머리를 남기려면 머리카락은 남길수 없고, 머리카락을 남기려면 머리를 남길 수 없다." 가정사람인 황순요와 후동은 가정인민을 이끌고 의거를 일으킨다. 서주를 수성할 때 눈치만 보다가 도망친 명나라때의 총병이자 한인인 이성동은 이때 청나라군대를 이끌고 가정으로 쳐들어가 도살극을 벌여 2만여명을 죽인다. 여자들중에서 용모가 못생긴 경우는 그 자리에서 죽이고, 젊고 예쁜 여자는 모조리 밤낮으로 길거리에서 간음당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못으로 두 손을 나무판에 박아놓고 강제로 간음했다.
강동사람 주영이 다시 가정성으로 들어가서 청나라에 항거하나, 다시 패배한다. 이리하여 청나라병사는 다시 가정성에서 도살극을 벌인다. 성내에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성밖의 수십리안에는 초목이 모조리 사라졌다. 나중에 명나라총병인 오지번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다시 가정을 점거한다. 그도 역시 패하면서 가정은 다시한번 도살에 휘말린다. 이것이 바로 놀라운 역사혈안 "가정삼도"이다.
명나라군대는 백만이 넘었다. 그런데도 10여만의 청나라군대가 중원을 종횡하면서 무인지경처럼 휘저었다. 양주, 가정만이 아니라. 도살당한 성은 강음,곤산,상숙,소주,남창,해녕,광주,감주,상담,대동,사천,하문동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청나라군대는 관내에서 37년간 살육전을 벌여서 3,257만의 한족을 죽였다. 명나라 천계3년(1623년)의 중국등기인구는 5,165만이었는데, 청나라순치17(1660년)에 이르러 청나라강산이 어느정도 안정을 찾았을때 1,908만으로 격감한다. 전국인구중 2/3가 죽은것이다.
컴퓨터에서 이부분을 쓰면서, 나의 태양혈은 그때 강물처럼 흐르는 선혈로 북을 치듯 때리는 것 같았다. 나의신체는 당시 산처럼 쌓였던 친척의 시신들처럼 뼈가 시리게 추웠다. 나는 외동아들이다. 그러나, 도살당한 사람은 하나하나 나의친형제, 친자매이다. 나의 사랑하는 중국이여, 너는 어떻게 이런 피바다속에서 열반할수 있었던건가?
원나라의 철기가 장사를 함락시켰을때, 악록서원의 수배경의 서생은 모조리 전사했고, 한명도 투항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장홍범, 이성동과 같은 자들만 있고, 문천상, 사가법과 같은 사람이 업슨 중국을. 그러한 중국이라면 일찌감치 사라졌을 것이다. 중국의 성격은 완강이다. 무엇이 완강한것인가? 완강은 바로 "분명히 안되는 줄 알면서 그래도 하는것"이다. 중국문명이 사라지지 않은것은 바로 이러한 "분명히 안되는 줄 알면서 그래도 하는 중국인"때문이다.




중국흑인이 수천년 노예민족이란 것은 유전자 지도를 통해서도 쉽게 알수 있다. 당시 중국인들은 지배층(청나라/만주족) 국가의 사람들과는 신분의 차이로 결혼도 할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DNA/Y-Chromosome Haplogroup D Type은 "흑인유전자"로 불리우며, 주로 동남아시아, 중국한족, 대만/필리핀외 Austronesian계통, 일본의 남부지역(특히 오키나와일부)에서 발견되는 Haplotype 유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