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수출초과 → 금 유입 → 통화증가 → 금리저하 → 국내 물가상승 → 수출 감소
상당히 간략화 시킨 것 이긴 한데, 대략 이런 프로세스입니다
금해제를 구평가제로 할 계획인 하마구치 내각의 성립 시점에서 일본정부는 정화(금)를 충분히 증
가시킬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긴축예산은 불가결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노우에가 장
상으로 취임한 1929년도부터 일본정부의 예산안은 실행 단계에서부터 긴축재정을 강력히 추진, 국
채의 신규 발행을 3924만엔 감액했고 일반회계에서는 당초 예산 17억 7356만엔에서 9165만엔이나
절약한다는 보기 드문 성과를 거두었지요.
1929년 7월, 금해제 직전 미.일 환율비는 100엔에 43 달러 50 센트였는데 이것은 금해제는 필연이
라고 본 국내외 은행에 의한 환투기 조짐의 시작으로, 이미 이 시점부터 대량의 엔 매수, 달러 매도
가 시작되어 있었다는 증거
5대 강대국의 하나로 들어간 30년대의 시점에서도, 메이지 이래 일본 경제는 정경유착(관료-군인-
재벌)으로 발전을 이루긴 했습니다만 사실 그 산업의 국제 경쟁력이 결코 강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미국발 대공황이 시작되었습니다만
당시 일본의 주력 수출상품이던 생사 등의 수출 산업은 엔고의 영향으로 대폭락 했습니다
1931년 이후 급증합니다. 궁핍한 농가는 식구를 줄이기 위해 딸을 사창가에 울면서 팔아서밖에 살
아나갈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최악의 악순환은 경제지표에 그대로 반영되어 일본의 GNP는 1929년
의 13,941백만엔에서 1930년엔 11,245백만엔, 1931년에는 10,678백만엔까지 감소합니다. 주가지수
는 1929년의 104.5에서 1930년에는 71.5, 1931년은, 53.0까지 폭락
기업도산, 정리해고가 잇따라 민영공장의 노동 인원지수는 1929년의 91.1에서(100이 max) 1930년
에는 82.2, 1931년에는 74.4로 침체했으며 임금 삭감등에 의해 실수입 임금지수도 1929년의 103.9에
서 1930년의 98.7, 1931년에는 90.7까지 떨어집니다
즉 아무리 물가가 내려도 수출은 교과서대로 증가하지 않았고 세계 공황의 영향으로 정화
(금)의 유출이 계속되기에 결국 금본위제인 일본에선 금이 부족하니 통화도 울며 겨자먹기로 줄일
수밖에 없으므로 디플레는 더욱 더 가속화........
그리고, 1930연 11월 14일, 도쿄역에서 하마구치 오사치 수상은 저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