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권업박람회의 조선인 전시
도쿄권업박람회는 `인종 전시`로 조선 유학생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인종 전시`는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때 처음 등장해 1899년 파리 만국박람회때 본격화 되었는데,
프랑스는 아프리카 원주민을 비롯한 제3세계의 원주민들을 울타리 안에 가둬놓고 `인종 전시`를 실시했다. 일본이 그 못된 짓을 흉내내 1903년 오사카박람회때 선을 보이더니, 우에노 공원에서 똑같은 짓을 반복한 것이다.
우에노 공원에 들어선 유학생들은 조선관에 조선인 남녀 1명씩이 `인종 전시` 돼 있는걸 보고 분노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6월 6일자엔 조선 유학생들의 관람회 참관기가 실렸다.
`각자 돈 15전씩을 내어 관람표를 구입하여 곧장 제1본관을 향하여 나아갔다. 그때 4,5인이 나오면서 농지거리하기를 `제1본관에 조선동물 2개가 있는데 대단히 우습더라`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걸어가는 것이었다.…… 쳐진 줄을 따라서 발걸음을 옮기기를 여러 걸음 한곳에 도달하니 그곳에는 태양광선이 희미하게 들어오고 포장을 내리쳤는데, 한켠에 우리나라 남자 1명시 상투를 틀고 탕건에 갓을 쓰고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른 한켠에는 여인 1명이 머리에는 장옷을 쓰고 눈동자만 내어놓고, 우리 부인복을 입고 의자에 앉았는데, 그 정면에는 간간을 둘러 다른 사람의 출입을 차단하였다. 한 벗이 이 광경을 보고 안색이 돌변하면서 크게 한숨을 쉬면서 탄식하기를 `아까 도로를 지나가던 일본인이 조선동물 2개 운운한 것이 바로 저 두사람을가리킨 것이다`라 하였다. 오오, 통재라!`
두 남녀는 도쿄박람회에 가면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는 일본상인의 꼬임에 빠져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일본인들이 시키는대로 전시 울타리 안에서 지낸 것이다. 유학생들은 적극적인 반대투쟁을 벌인 끝에 한국여성을 귀국시켰다.(몸값을 지불하여)
1907년 9월의 경성박람회는 한일 합동으로 열렸지만 회장은 통감부 총무장관이였다. 이는 조선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일본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동시에 일제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선전용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농상공부는 13도 관찰사에게 공문을 띄워 각 관찰사는 일제히 서울로 올라와 참관하라고 명령했으며, 박람회장에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기 위해 연회장을 설치하고 기생 10명을 불러다 잡가도 부르게 하고 검무도 추게했다. 전체 관람자의 73퍼센트가 조선인이였지만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전시물 가운데 한국인이 출품한 것은 약 5퍼센트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