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방송

19세기말 구미 열강들과 나란히 하기위해 조선반도로를 거점으로 대륙으로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1894년 청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선반도를 무대로 전쟁이 전개되었다.

다음해 승리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반도로 진출한다.
한편 명성황후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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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러시아는 얼지 않는 항구를 찾아 남쪽으로 진출하는 남하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명성황후를 암살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일본의 입장에서는 러시아를 직접 상대로해서 싸울 수는 없지만 적어도 조선내부의 인물은 제거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을 상대로 국가적인 폭력을 한 것이 바로 명성황후 살해사건이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건은 조선주재의 전권 공사(영사) 미우라 고로(Miura Goro)가 지휘했다고 한다.

기와노(Giwano)씨의 조부는 한성. 지금의 서울에 있는 신문사에 일하고 있었다.
사장은 미우라 고로(Miura Goro)와 알고 있었던 관계로 계힉 단계부터 가담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시장의 출신지가 구마모토(Gumamoto)였던 것으로부터 사건에 많은 구마모토(Gumamoto) 사람들, 주로 신문기자가 가담하게 되었다.

현지의 일본 영사가 작성한 조사보고서 등에 의하면 당시의 미우라 공사는 조선인에 대한 쿠데타로 보이게 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건은 궁 안에 있는 미국인이나 러시아인에게도 목격되어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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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미우라 관계자를 구속해서 조사를 했다.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치외법권을 이용하여 일본정부가 조사했지만, 당연히 제대로 된 조사가 될수 없었다)

그렇지만 결국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명성황후의 암살사건은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의 원인이 되고있다.
- 한국의 한 초등학교.
(선생님) "명성황후라는 이름을 들어본적이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한국에서는 학교에서 당연히 교육받는다.
(학생 ) 1895년 일본 공사 미우라(Miura) 부하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114년간의 긴 시간, 한국인은 계속해서 원한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인은 그 원한의 정체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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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조부가 그렇게 했다고.. 그렇지만 경복궁의 그림에 바로 조부가 칼을 들고 있는 것에서, 나도 죄를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