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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들은 사람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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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



그런 생각이 없어.

너무 고생돼서.

뭐 재미난 세상을 살았으야지.

끌려가서도 풀려나서도 다 똑같아.



조금 다르지.

그거만 상대 안 했다 뿐이지 다 똑같아.

몰라 이제는, 잊어버려서.

소원?

젊음을 돌려줘야지, 내 젊음을

.

김화선 참 예쁘다···.”

(2011년 8월9일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나눈 대화 중)

김화선 할머니는 올해 85세다. 당뇨와 관절염, 노환으로 보행기 없인 한 발도 못 내디딜 만큼 쇠약해졌다. 그래도 일본군 얘기가 나오면 새처럼 작은 김 할머니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 힘은 분노고 저항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 할머니는 2008년부터 그림을 그렸다. 고통스럽게 지나온 길을 60여점의 화폭에 담았다. 할머니의 그림은 초등학생이 그린 것 같았다. 그림 속 할머니는 웃었고, 울었고, 절망했고, 체념했다. 화인 맞은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아픈 기억, 평생 불면의 밤을 안겨준 치부조차 그림으로 끄집어냈다.

할머니 고향은 평양 모란봉. 다홍색 한복치마가 잘 어울렸고, 길게 땋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유독 윤기 나고 빛나 예쁨 받던 셋째 딸이었다. 행복했던 유년시절은 사진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이젠 기억조차 떠올릴 기력이 없다. 김 할머니의 인생을 추억하는 건 그림들뿐이다.

김선현(44) 차의과대학교 교수(차병원 임상미술치료)는 김 할머니를 비롯한 광주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 미술치료 수업을 2008년부터 매주 목요일 진행하고 있다. 그림은 의식과 무의식 모두를 끄집어내는 힘이 있다. 자신이 미처 몰랐던 세상까지도 끌어내는 그림. 김 할머니의 그림도 그랬다.

할머니, 그림으로 말하다

할머니는 매화나무를 그렸다. 2008년 11월 나눔의 집에 입소한 할머니가 첫 미술치료시간에 그린 것이었다. 앙상한 매화나무에 떨어질 듯 매달려 있는 꽃잎은 처연했고, 그 색은 유독 핏빛이었다. 할머니가 그간 감당해야 했던 고통, 할머니가 안고 산 상처를 보여주는 듯했다.

지나온 삶을 떠올리는 할머니의 붓질은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가느다랗게 떨렸다. 위안소에서 군인들에게 당하던 때의 기억을 그릴 때는 거칠게 마구 휘갈겼고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과 고향 대동강가를 그릴 때는 힘 있게, 분명한 선으로 스케치했다.



일본군인의 모습은 하나같이 험상궂었다. 찢어진 눈, 두꺼운 입술. 그리고 할머니의 모습보다 두세 배 크게 그려졌다. 할머니는 다시 태어난다면 일본 군인이 돼, 일본인을 죽이고 싶다며, 일본 군인의 모습을 도화지 가득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유독 단 한 명의 일본 군인에 대해선 관대했다. 그림 속에서 ‘고지마상’이라는 일본 군인은 어린 ‘위안부’ 소녀에게 건빵을 건네고 있다. 저고리와 치마를 갖춰 입은 소녀는 위안소 침상에 앉아있고, 고지마상은 군화를 벗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고지마상은 할머니를 좋아했던 군인으로, 매일 찾아왔다. 찾아와도 대화만 나누고 가거나 할머니에게 먹을거리만 주고 돌아가는 날이 많았다. 그는 사람이 죽는 전쟁이 싫다고 했고, 고향에 가 농사짓고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할머니도 그런 그가 싫지 않았지만, 그 역시 일본군인일 뿐이었다.

할머니의 그림에서 가장 많이 나타난 색상은 일본 군복의 색, 황토색이다. 지긋지긋한 군복색은 그림 속에서도 지겹도록 할머니를 따라다녔다. 두려웠던 순간, 슬펐던 순간의 기억이 떠오를 땐 할머니는 더더욱 황토색을 짙게 칠했다.

검정, 회색도 많았다. 어둡고 불안한 감정을 드러내는 색이다.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어린 시절을 담은 그림에 나타나는 분홍, 빨강이다. 고무신과 치마에 곱게 입힌 색들이다. 결혼식 장면을 상상하며 그린 순백의 웨딩드레스에도 할머니는 가슴 한가운데 빨간 꽃을 그려 넣었다. 못다 핀 꽃, 할머니의 청춘이다. 일본군에 끌려가던 날, 맛있는 걸 준다는 말에 속아 따라갔던 그날에도 할머니는 꽃분홍 저고리를 입었다. 일본군인은 할머니 손에 분홍색 사탕 두 개를 건넸다. 감언에 깜빡 속아 넘어갔던, 할머니 인생에서 가장 억울하고 분통한 순간의 기억이다.

초록, 파랑은 주로 유년시절 고향의 기억을 떠올린 그림에 많다. 노랑은 자신을 돋보이게 할 때, 저고리라든가 배경 색으로 사용했다.

할머니의 모습은 시절마다 달랐다. ‘위안부’로 끌려가기 전엔 곱게 땋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게 내린, 예쁜 한복을 입은 소녀였다. 위안소에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속옷만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해방 후엔 바지차림에 머리를 짧게 깎은 남장 여자로 분했다. 아마도 할머니는 ‘위안부’가 된 순간부터 여자이길 스스로 포기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눔의 집에 들어오고서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아가는 할머니. 한복을 입고 앉아 있는 그림 속 할머니는 편안해 보인다.

2009년 7월말의 그림 한 장. 해방되던 날의 기억이다. 할머니와 다른 ‘위안부’ 다섯 명은 산 속 공터에 서 있고, 일본군인 두 명이 자신의 키만큼이나 긴 총칼을 들고 걸어가는 장면이다. 태극기는 없었다. 할머니는 그림을 그리면서 심장이 뛴다며 중도에 멈추기도 했다. 그날 일본군은 감금된 ‘위안부’들을 강제로 끌고 가 총살하거나 땅에 묻었다고 했다. 일본 압제로부터 해방되던 날 할머니는 가장 두렵고 무서운 시간을 보냈다.

체념은 붓 끝에도 녹아있다. 나눔의 집을 찾아간 지난 9일에도 할머니는 붓을 들어 꽃잎을 그렸다. 정성도 감정도 담지 않고, 붉은 색을 반복해서 여기 저기 흩뿌리기만 했다. 다 지난 일. 희망이 있다면 봄을 다시 보는 것이지만, 어차피 아깝고 찬란한, 다시 못 올 세월이다.

김 할머니는

할머니는 초콜릿, 우유, 그리고 돈을 준다는 말에 속아 열일곱 살이던 1942년 일본군에 끌려갔다. 싱가포르, 만주, 중국 등으로 옮겨가며 일본군인을 상대했고, 질병과 살해 위협으로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때 차라리 죽었어야 했다는 할머니에겐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할머니는 해방 후에도 여비가 없어 단신으로 중국 각지를 전전하다 1947년 군함을 얻어 타고 가까스로 귀국했다. 하지만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한국전쟁 통에 가족까지 잃어버렸다. 할머니는 고국에 돌아와서도 남자에 짓밟혔다.

200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증언팀에 제출된 기록에 따르면, 할머니는 오랜 기간 성매매 여성으로 여기 저기 팔려 다녔다. 산골로 도망가 풀 뜯어 먹고 살기까지 했지만, 다시 붙잡혀 인천 사창가로 끌려갔다. “고생을 엄청나게 하고, 수천 명을, 아니 수억 명(의 남자들)을 상대했을 거야. 내가 세도 못해 숫자는.” 고향이 조치원인 한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하이타이 세제 장사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할머니. 장사란 장사는 다 해봤고, 식당일, 파출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할머니는 혼자 살았다. 같이 살자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할머니는 자신이 임신할 수 없는 몸이라고, 더 이상 여성으로 살아갈 수 없다며 뿌리쳤다.

외롭고 가난했지만, 그 와중에도 고학생, 고아를 보면 지나치지 못했던 할머니. 공납금도 대신 내주고, 용돈도 쥐어줘 대학까지 보낸 아이들만 7명이다.

하지만 정작 할머니는 어느 누구에게도 보호 받지 못했다. 대전에서 600만원짜리 전세방에 살던 할머니는 셋방이 든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는데, 혼자만 경매대금 변제대상에서 제외돼 길거리로 내몰리는 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할머니가 나눔의 집에 들어온 건 2008년 11월. 이곳이 할머니의 마지막 거처가 될 것이다.

살아남은 할머니들

나눔의 집엔 현재 8명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살고 있다. 1992년 민간 모금으로 설립된 이래 다녀갔거나 머무는 ‘위안부’ 할머니가 총 30명. 그중 고인이 된 할머니가 강덕경, 김순덕, 김옥주, 문명금, 문필기, 박두리, 지돌이 할머니 등 15명이다.

일본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치르는 동안 우리나라에서 강제 동원한 ‘위안부’는 2만 여명으로 추산된다. 위안소에서 숨을 거뒀거나,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거나, 신분을 감추고 살았거나 2011년 현재까지 신고된 위안부 피해자수는 234명이다. 이중 생존한 할머니는 70명뿐. 모두 80·90대 고령인데다 병환으로 생의 마지막 순간만 기다리는 상황이다.

“일본 정부의 사과와 피해보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시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일본과의 관계는 변한 게 없어요. 한스러운 일이죠.” 윤정모(65) 작가의 한탄이다. 윤 작가는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봉선화가 필 무렵’ 등 위안부 소설을 펴냈다.

안신권(50) 나눔의 집 소장도 가슴을 쳤다. 안 소장은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다른 일제시대 피해자 유족들에 처소를 내줄 생각까지 하는 중이다. 할머니들의 건강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미국·네덜란드·캐나다·유럽연합 의회 등에서 일본의 사과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일본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일본의 민주당은 야당 시절인 2000년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전시 성적 강제피해자 해결촉진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11년째 상정되지 않은 채 잠자고 있다.

그림, 살아있는 마지막 역사

나눔의 집에선 1993년 2월부터 당시 홍익대 미대생이던 이경신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그림 수업이 매주 3년간 진행됐었다. 순수 취미 활동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할머니들은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다.

‘우리는 그림을 그리며 너무나 행복했다.’

고 강덕경, 김순덕 할머니는 화가의 경지까지 올라 ‘빼앗긴 순정’, ‘못다 핀 꽃’과 같은 작품을 남겼다. 전시회도 열렸다. 할머니들은 위안을 얻고자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들이 겪은 일이 세상에 올바로 남겨지길 원했다.



‘나는 내 그림이 누구의 손에 팔려나가는 걸 원하지 않았다. 내가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그림을 통해 우리의 일이 세상에 알려지고. 역사에 올바로 남겨지고. 다시는 이 땅에 그런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렸으니까.’(이규희의 ‘두 할머니의 비밀’ 중 고 김순덕 할머니의 회고)

마른 꽃잎이 바스러지듯 한순간에 스러질지 모를 할머니들. 이젠 기억도 희미해져 증언조차 힘든 할머니들이 할 수 있는 건 누워서라도 붓을 들고 무언가를 그리는 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김 할머니는 그림을 그린다. 떨리는 손으로, 붓으로 크레파스로 연필로….
      한 세기를 살아온 분들은 1909~1945년 까지를 倭政시대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분들은 말한다.               倭人들은 사람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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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人たちは人か ?


“生まれ変わりたくないの.



そんな考えがない.

とても苦労されて.

なんか面白い世の中をサルアッウヤだ.

引かれて行っても釈放されてもすべてまったく同じなの.



少し違う.

それだけ相手しなかっただけであってすべてまったく同じなの.

分からなくて今は, 忘れて.

願い?

若さを返さなくてはならない, 私の若さを

.

金華船本当にきれいだ・・・.”

(2011年 8月9日京畿道光州 ‘分け蟻集’で交わした対話中)

金華船お婆さんは今年 85歳だ. 糖尿と 関節炎, 老患で歩行器なしに一足も踏み出す事ができない位衰えた. それでも日本軍の話が出れば鳥のように小さな金お婆さんの身に手に余って行った. その力は怒りで抵抗だった.

日本軍 ‘慰安婦’ 被害者である金お婆さんは 2008年から 絵を描いた. 苦しく通り過ぎた汲む 60点ぐらいの画幅に盛った. お婆さんの絵は小学生が描いたようだった. 絵の中お婆さんは笑ったし, 泣いたし, 絶望したし, 諦めた. 火印当たったように消されない痛い記憶, 一生不面の夜を抱かれてくれた恥部さえ絵で引き出した.

お婆さん故郷は平壌牡丹峰. 紅韓服スカートがよく似合ったし, 長く結った真っ黒い髪の毛が特につやめいて輝いてきれい受けた三番目娘だった. 幸せだった幼年時代は写真でも残っていない. もう記憶さえ思い浮かぶ気力がない. 金お婆さんの人生を思い出すのは絵たちだけだ.

金先賢(44) チァウィグァデハックギョ 教授(車病院臨床美術治療)は金お婆さんを含めた光州分けの家お婆さんたちと美術治療授業を 2008年から毎週木曜日進行している. 絵は意識と無意識皆を引き出す力がある. 自分がまだ分からなかった世の中までも引っ張り出す絵. 金お婆さんの絵もそうだった.

お婆さん, 絵で言う

お婆さんは梅を描いた. 2008年 11月分けの家に入所したお婆さんが初美術治療時間にグリーンのだった. やつれている梅に落ちるようにぶら下げられている花びらは哀れだったし, その色は特に血の色だった. お婆さんがその間手におえ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苦痛, お婆さんが抱いて山傷を見せてくれるようだった.

通り過ぎた生を思い浮かぶお婆さんの筆づかいは時には激情的に, 時には細く震えた. 慰安所で 軍人野にあった時の記憶を描く時は荒くでたらめにぶん殴ったし幼い時代自分の姿と故郷 大同川端を描く時は力が強く, 明らかな線でスケッチした.



日本軍人の姿は一様に険しかった. 破れた目, 厚い唇. 描いてお婆さんの姿より二つ三つの倍大きく描かれた. お婆さんは生まれ変わったら日本軍人になって, 日本人を殺したいと, 日本軍人の姿を画用紙いっぱい描いたりした.

しかしお婆さんは特にただ一人の日本軍人に対しては 寛大した. 絵の中で ‘高地馬上’という日本軍人は幼い ‘慰安婦’ 少女に 乾パンを渡している. チョゴリとスカートを取り揃えて口は少女は慰安所寝床に座っていて, 高地馬上は軍靴を脱がないままお互いを眺めている. 高地馬上はお婆さんが好きだった軍人で, 毎日尋ねて来た. 尋ねて来ても対話だけ交わして行くとかお婆さんに食べ物だけ酒庫動く日が多かった. 彼は人の死ぬ戦争が嫌いだと言ったし, 故郷へ行って耕作して暮したいという話をよくした. お婆さんもそんな彼が嫌いではなかったが, そのやっぱり日本軍人であるだけだった.

お婆さんの絵で一番多く現われた色相は日本軍服の色, 黄土色だ. うんざりする軍服色は絵の中でもうんざりするようにお婆さんを付きまとった. 恐ろしかった瞬間, 悲しかった瞬間の記憶の浮ぶ時はお婆さんはもっと黄土色を濃く塗った.

検定, 灰色も多かった. 暗くて心細い感情を現わす色だ.

お婆さんが一番好きな色は幼い時代を盛った絵に現われるピンク, 赤だ. ゴムのはき物とスカートにきれいに着せた色たちだ. 結婚式場面を想像しながらグリーン純白のウェディングドレスにもお婆さんは 胸 真ん中赤い花を描いて入れた. モッダ咲いた花, お婆さんの青春だ. 日本軍に引かれて行った日, おいしいのを与えるという話にだまされて付いて行ったその日にもお婆さんはピンクチョゴリを着た. 日本軍人はお婆さん手に桃色キャンディー二つを渡した. 甘口にうっかりだまされた, お婆さん人生で一番悔しくて悔しくて心が痛い瞬間の記憶だ.

みどり, なが葱とは主に幼年時代故郷の記憶を思い浮かんだ絵に多い. イエローは自分を引き立つようにする時, チョゴリとか背景色で使った.

お婆さんの姿は時代ごとに違った. ‘慰安婦’に引かれて行く前にはきれいに結った髪の毛を腰まで長く下った, きれいな韓服を着た少女だった. 慰安所では頭をはだけて下着だけ着た姿で描かれた. 解放後にはズボン身なりに髪を短く刈った男装女に扮した. たぶんお婆さんは ‘慰安婦’になった瞬間から女になるように自らあきらめたのか分からない. しかし分けることの家に入って来てから初めて安定をドエチァッアがはお婆さん. 韓服を着て座っている絵の中お婆さんは楽に見える.

2009年 7月末の絵一枚. 解放された日の記憶だ. お婆さんと違う ‘慰安婦’ 五人は山奥空所に立っていて, 日本軍である二人が自分の背程長い銃刀を持って歩いて行く場面だ. 太極旗はなかった. お婆さんは絵を描きながら心臓がときめくと中途に止めたりした. その日日本軍は監禁された ‘慰安婦’聞く強制に連れて行って銃殺するとか地に埋めたと言った. 日本圧制から解放された日お婆さんは一番恐ろしくて恐ろしい時間を過ごした.

諦めは筆終りにもとけている. 分けの家を尋ねた去る 9日にもお婆さんは筆を持って花びらを描いた. 真心も感情も盛らないで, 赤い色を繰り返してあちこち散らかしてばかりした. すべて去る事. 希望があったら春をまた見ることだが, どうせ惜しくてきらめき輝いて美しい, また来る事ができない歳月だ.

金お婆さんは

お婆さんはチョコレート, 牛乳, そしてお金をくれるという話にだまされて十七肉だった 1942年日本軍に引かれて行った. シンガポール, 満洲, 中国などで移して日本軍人を相対したし, 疾病と殺害脅威で何回死ぬ峠を越した. あの時かえって死な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というお婆さんには生きていること自体が苦痛だった.

お婆さんは解放後にも旅費がなくて単身で中国 各地を転転する 1947年軍艦を得て乗ってやっと帰国した. しかし 故郷である 平壌に帰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朝鮮戦争筒に家族まで忘れてしまった. お婆さんは故国に帰って来ても男に踏み付けられた.

2000年韓国従軍慰安婦問題対策協議会性奴隷戦犯女性国際法廷韓国委員会証言チームに提出された記録によれば, お婆さんは長年の期間性売買女性であちこち売れて通った. 山里に逃げだして溶くかじて暮すまでしたが, またつかまって仁川売春町に引かれて行った. “苦労をおびただしくして, 数千人が, いや幾億人(の男たち)を相対したことだ. 私が税横領できなくて数字は.” 故郷が鳥致院である一お爺さんの助けでこんにちはタイ洗剤商売を始めながら初めて自分の生を暮し始めたというお婆さん. 商売と言う(のは)商売はすべてやって見たし, 食堂仕事, お手伝いさんしない事がなかった. お婆さんは独身生活をした. のように生きようは人が現われたりしたが, お婆さんは自分が姙娠することができない身だと, これ以上女性で生きて行くことができないと振り撤いた.

さびしくて貧しかったが, その渦中にも苦学生, 孤児を見れば通り過ぎ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お婆さん. 公納金も代わりに渡して, 小遣いも握ってくれ大学まで行かせた子供達だけ 7人だ.

しかしいざお婆さんは誰にも保護受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大田で 600万ウォンの借家に暮したお婆さんは貸し間の入った建物が 競売に移ったが, 一人だけ競売代金弁済対象から除かれて路頭で追い出されるなどあらゆる苦楚を経験した. お婆さんが分けの家に入って来たのは 2008年 11月. こちらがお婆さんの最後の居所になるでしょう.

生き残ったお婆さんたち

分けることの家には現在 8人の慰安婦被害お婆さんたちが住んでいる. 1992年民間募金に設立された以来いらっしゃったとかとどまる ‘慰安婦’ お婆さんが総 30人. なかでも故人になったお婆さんがガングドックギョング, 金純徳, 金屋株, 文明金, 文筆期, 迫頭里, ジドルがお婆さんなど 15人だ.

日本が日中戦争と太平洋戦争を経験する間我が国で強制動員した ‘慰安婦’は 2万名余に推算される. 慰安所で死んだとか, 故国に帰って来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か, 身分を隠して暮したとか 2011年現在まで申告された慰安婦被害自首は 234人だ. この中で生存したお婆さんは 70人だけ. 皆 80・90台高令のうえ病患で生の最後の瞬間だけ待つ状況だ.

“日本政府の謝りと被害補償が成り立っていないのにお婆さんたちがすべて帰ればどうかたい気がします. 日本との関係は変わったのがないです. ハンスロウン仕事です.” ユンゾングモ(65) 作家の嘆きだ. ユン作家は ‘母名前はゾセンピだった’, ‘鳳仙花が咲く頃’ など慰安婦小説を発行した.

雁信圏(50) 分けの家所長も胸を打った. 中所長はお婆さんたちが帰れば他の日帝時代被害者遺族たちに家所を渡すつもりまでする中だ. お婆さんたちの 健康状態は日増しに悪くなっている.

アメリカ・オランダ・カナダ・ヨーロッパ連合議会などで日本の謝りと法的賠償を要求する決議案を採択したが日本政府は黙黙無答だ. 日本の民主党は野党時代の 2000年すぎ去った事問題解決のために ‘展示成績強制被害者解決促進法案’を提出した. しかしこの法案は 11年目上程されないまま眠っている.

絵, 生きている最後の歴史

分けることの家では 1993年 2月から当時弘益大未対生だった李更新ボランティアの助けを借りて絵授業が毎週 3年間進行された. 純粋趣味活動の一つだった. それでもお婆さんたちは驚くべきな変化を経験した.

‘私たちは絵を描いてあまりにも幸せだった.’

とガングドックギョング, 金純徳お婆さんは画家の境地まで上がって ‘奪われた純情’, ‘モッダ咲いた花’のような作品を残した. 展示会も開かれた. お婆さんたちは慰安を得ようと絵を描いたりしたが, 何より自分たちの経験した事が世の中に正しく残されるのを希望した.



‘私は私の絵が誰の手に売れて行くことを願わなかった. 私がお金を儲けるために絵を描いたのではなく絵を通じて私たちの仕事が世に知られて. 歴史に正しく残されて. 二度とこの地にそんな悲しい事が起こらないように願う心で描いたから.’(イギュフィの ‘二人のお婆さんの秘密’ 中高金純徳お婆さんの懐古)

乾いた花びらがこなごなに碎けるように一瞬にして散り失せるかも知れないお婆さんたち. もう記憶もぼんやりして証言さえ大変なお婆さんたちができることは横になっても筆を持って何かを描く事だけかも知れない.

今日も金お婆さんは絵を描く. 震える手で, 筆でクレパスで鉛筆で….
      一世紀を暮して来た方々は 1909‾1945年までを 倭政時代だと言う.     そしてその方々は言う.               倭人らは人でも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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