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통계자료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자가 분명히 존재하므로 총독부 주도로 창씨개명을 강제로 실시했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그리고 흔히 알려진바대로 일제가 일부러 강제인 것을 숨기기 위해 소수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채로 남겨두었을거라는 망상도 사실일 가능성도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일제시대에 조선인들은 완벽히 황국신민화운동에 적극 협조적이었고, 총독정치에 조선인들은 만족하여 친일적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조선이 만에 하나 독립을 할거라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조선인들도 독립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황국신민이 되어 출세하고자하는 생각밖에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4년에 이르기 까지 조선 최고의 민족지도자였던 춘원 이광수는 학도참전과 창씨개명의 자발적인 지원유세를 하고 다녔다.
일본입장에서 조선인의 창씨개명은 차별철폐정책으로서 희망자에 한해서만 실시한 정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 창씨율이 80%가 넘었다는 것은 조선인이 창씨를 간절히 원했었다는 증거이다. 쇼와 15년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는 창씨를 강제해서는 안된다는 훈령을 내릴 정도였다. 같은 시기에 대만의 창씨율은 2%에 불과했다. 다만 조선에서는 지방공무원이 창씨율을 높이려고 서로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지원은 했으리라 본다. 하지만, 법적으로 창씨는 강제가 아니었고, 또 일선 지방 관리들은 거의 대부분 조선인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 또한 일본의 잘못이 아닌 조선인 스스로의 문제이다.
창씨개명의 계기가 된 이유 중 하나는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이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일합방 당시에 만주에는 약 150만명의 조선인이 있었고, 그들은 중국인에게 탄압받아 농노에 가까운 착취에 신음하고 있었다. 그 중 조선인을 가장 싫어한 인물은 장작림으로 "만주에서 조선인을 모두 몰아내자"라고 할 정도였다. 이런 조선인 박해는 만주자원 쟁탈이라는 분쟁을 조장했고, 이때문에 재만 조선인들은 일본을 믿고 의지해 일본인 행세를 하려고 했다. 중국인의 탄압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일본이 유일하다는 것이 당시 조선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때문에 이들 조선인들이 일본에 창씨개명을 먼저 제의하였던 것이었다. 만주에서 조선인은 2귀자라고 불릴 정도로 악랄한 위세를 떨쳤다. 일본인은 귀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만주사변 이후 관동군이 요동반도의 일본 조차지 관동주에서 북상해 온 것을 가장 기뻐한 것은 다름아닌 조선인이었다. 그들은 도처에 일장기를 내걸어 관동군을 환영했고 자신들이 일본제국의 일원임을 강하게 의식하고 자랑하고 있었다. 조선인은 일본제국의 보호아래 중국인에게 탄압당하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조선인이 일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중국인의 땅과 재산을 약탈하고 탄압하는 일이 빚어졌다. 만주국에 가장 유명한 친일단체로는 협화회가 있는데 이 때 협화회에 참여한 조선인 민족 지도자들은 민족협화운동의 진전과 조선 민족과 오족협화의 이상실현이라는 글귀를 만주신문과 전만조선인민 연합회 회보에 실었다.
그 상세 내용은 "在만주의 각민족은 지나 국민당의 국가주의적 선동과 모략때문에 끊임없이 격렬한 대립과 분쟁이 나날이 증대하고 있는바 조선민족에 대한 압박과 박해가 늘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150만 조선인이 유일하게 박해를 피하는 길은 창씨개명 밖에는 없다. 황군 키타 미츠루의 출전은 재만조선인에게 있어서 적극적인 구제보호이며, 만주 군벌의 압박으로부터 해방이라고 봐야한다." 조선인들이 일본인 이름을 갖고나서부터 그 추악한 악행이 더욱 심해졌는데 중국인들은 이들 조선인 二鬼子를 무서워 하며 혐한 감정이 더욱 거세졌다. 재만조선인의 황국신민으로서의 법적 지위 요구에 대해 당시 조선 총독부 외사과장의 타나카 타케오는 다음과 같이 경고를 하고 있다. "재만선인이 일본국민인 특권만을 얻으려고 하고, 교만한 태도로 일관하며 겸양의 마음을 잃어 오만불손해가지고 본래의 만주국민이나 그 외 민족과의 사이에서 분쟁을 일으켜 기피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출처 진보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