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바이
옛 일본의 성문화를 가리켜 낮에는 기모노, 밤에는 요바이라고 불렀다.
낮에 이뤄졌던 기모노 섹스가 불특정 다수에 의한 아이 만들기였다면
밤을 지배했던 요바이 섹스는 여러 위험요소가 많았던만큼 일정한 룰이 존재했다.
이러한 자유로운 성풍습은 지구촌의 어느 부족사회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때문에 이러한 풍습에 대해 오지의 부족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아내를 빌려주었던 척치족 : 이거 간만에 보는 소설이네.
여러 남편을 두었던 티베트 여성 : 차라리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그래!
친구끼리 아내를 공유했던 마사이족 : 그렇게 받고 싶니? 옜다 관심~
여성에 의한 강간이 합법인 카투마족 : 기모노도 못믿겠는데 요바이를 믿으라구?
하지만 이런 오해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전부 사실이다.
그렇다고 옛 일본의 성풍속을 단순히 문란하다고 치부한다면 큰 실례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립된 섬에서 끊임없는 전란으로 인해 남자가 줄고
미망인이 속출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뿐이다.
즉, 일본은 이러한 자유로운 성풍속을 통해
인구의 증가, 근친상간의 방지, 미망인에 대한 구제 등을 계획했으며,
이를 통해 병사들의 충원, 우성인자의 확산, 노동력의 확보, 가족부양의 복지까지 도모했다.
또 여성에게는 결혼이라는 속박과 억눌린 성에 대한 해방까지 의미하였다.
그럼 지금부터 1,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요바이 풍습에 대해 알아보겠다.
요바이(夜這い)는 옛 일본의 공동체 사회를 위한 성풍습이었다.
이것은 밤중에 모르는 사람의 침실에 침입하여 관계를 맺는 풍습이었으며,
일반적으로 서일본에서 크게 유행하였고, 간토 이북지방에서는 드문 현상이었다.
요바이라는 말은 애초에 "부르다"는 뜻의 동사 요부(呼ぶ)에서 비롯되었으며,,
구혼을 위해 남자가 여자의 침소에 들어가는 행위를 의미했다.
일본의 옛 혼인풍습은 결혼후에도 남자가 여자 집에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이 때문에 이러한 행위도 요바이라고 불렀다.
요바이는 나중에 <夜這い>로 표기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없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부모나 상대의 허락없이 이성의 침실에 몰래 침입하는
불순한 행위를 가리키게 되어 배덕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풍습이 완전히 사라진건 겨우 60년 밖에 되지 않는다.
역사가 깊은 이 풍습은 1,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100년 전에 메이지 정부가 없애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50년에야 겨우 중단되었다고 전해진다.
무려 1,000년 동안 이어져온 성풍습이 강제로 사라진 탓일까?
아무튼 일본은 메이지 유신 때 억지로 서양의 제한적인 성 관념을 강요받았는데,
그 억눌린 성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었는지 오늘 날 일본의 성문화는
오히려 더 은밀하고 점점 변태적으로 바뀌어 온게 사실이다.
옛 일본의 부부관계는 부인이 결혼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결정하였으며,
남녀는 각자 따로 살고 부인의 집에 남편이 들어갔다 나오는 형태였다.
또 요바이는 일반적으로 서민의 풍습이었으나, 무사계급에서 행해지기도 했으며,
어떤 지방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처소에 드는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예전의 일본의 농촌에서는 "마을의 젊은 아가씨와 과부는 젊은이들 차지"라는 말이 있었다.
근대 이전의 농촌에서는 마을의 젊은 남성들이 마을 내에 특정한 룰을 정해 요바이를 했었다.
룰을 무시하고 다른 마을의 남자가 요바이를 하러 오면 이들이 격퇴하기도 했는데,
이때 심한 경우에는 침입자가 반죽음 상태가 되기도 했다.
요바이란 두 가지의 방식이 있었는데, 여자라면 누구나 그 대상이 되었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젊은 여성과 과부, 하녀나 유모만을 대상으로 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방식에서는 다음과 같은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동거남이 없는 여자여야 했으며, 이웃집 여자는 범해선 안되었다.
그런데 사실 마을에 요바이가 가능한 젊은이는 얼마되지 않았다.
대부분 전쟁으로 죽었거나 전쟁터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청년조"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조직을 통제했다.
이들 조직은 제비뽑기로 상대를 정하기 때문에 모든 여자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남자들은 그렇지 않다. 여자들이 가끔 거부권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자기 스타일이 아니거나 품행이 좋지 않은 남자들을 거부해왔다.
때문에 조직에서는 쫓겨난 남자들을 위해 상대를 바꾸어주는 조정역할도 했다.
그러나 자기관리를 너무 못한 남자들은 독수공방 신세가 되야만 했다.
이러한 체계로 인해 청년들은 평소 마을에서의 평판을 매우 중요시 했으며,
자신의 용모를 가꾸기 위해 미용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또 얼굴에 자신이 없었던 청년들은 근육을 단련시키거나 개인기를 개발하기도 했
한편, 요바이에 허용되는 거리도 상당해서 산간 지역이나 바닷가에서는
산 넘고 물까지 건너야 했으므로 저질체력인 남자들도 독수공방 신세였다.
때문에 당시 청년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늘 체력단련에 열심이었다.
그래서 남자를 기다리는 산골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문을 잠그지 않고
찬밥과 과일 등의 먹을거리를 준비해 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은 해 뜰 무렵에 돌아가는 남자들이 허기를 채울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요바이는 시골 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비슷하게 행해졌다.
에도 중기에는 전국적으로 축제를 빌미로 야외에서 많은 남녀들이 혼음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는데 어떠한 불륜이나 방탕함도 비난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높은 신분의 남성과 사귀기를 기대했다.
때문에 도시에서의 요바이는 신데렐라의 꿈을 가능케 하기도 했다.
도시의 상점가등에서는 여러 상점주들과 가게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동거하고 있었는데,
이들 남성 고용주들이 피고용 여성의 침실을 드나드는 일은 아주 흔한 풍경이었다.
그러다 중세, 근대의 상점가에서 고용주와 피고용주간에 일정한 룰이 정해져서
이 행위가 발각되면 해고 및 업계추출등의 징벌을 받았다고 한다.
요바이는 시대적 지리적에 따라 그 모습이 다양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낮선 손님이 마을에 찾아오면 그 손님에게 여자를 내어주기도 했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아내를 밤에 빌려주는 곳도 있었다.
손님이 아내를 거부하면 그 여자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는 말도 들려온다.
또 아이를 공동재산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임신을 하면 여성이 지목하는 사람이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으며, 결혼 후에도 다른 이성과 관계를 가질 수 있었으므로,
일본의 여성들은 결혼에 대해 큰 부담이 없었다고 한다.
요바이가 상대의 의사를 무시한 강간인가, 상대방도 어느 정도 동의한 후에 이루어진 행위였는가,
또는 상대는 불특정다수였는가, 아니면 서로 사전에 파트너 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는가는 어려운 문제이다.
이 모든 상황이 그 당시에 혼재되어 있어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 : 옛 일본의 풍습은 할례를 제외한 전세계의 모든 성문화를 포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