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변협, 17세기 고문서서 발견
조선 숙종 때 있었던 과거(科擧)시험에서도 독도 관련 문제가 중요시 돼 독도관련 사항이 과거시험 기출문제나 예상문제로 다뤄졌던 것으로 확인됐다.
대구지방변호사회 독도특별위원회는 경북 의성지역 선비였던 신덕함(申德函.1656-1730)이 남긴 문집에 있는 "전책(殿策)" 형식의 글에 울릉도와 독도에 관련된 내용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14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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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책은 임금이 묻고(策問), 자대부(子大夫:사대부)가 답(對策)하는 형식의 과거를 일컫는다.
이 전책 형식의 글은 1693년 발생한 울릉도쟁계(鬱陵島爭界.안용복 등이 울릉도에서 어로작업을 하다 일본에 납치된 뒤 발생한 조선과 일본의 영토분쟁)에 대한 과거응시자들의 의견을 구하는 것으로, 1696년 치러진 문과전시(文科殿試)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안용복 사건
肅宗實錄* (숙종19, 1693) 안용복 사건 조선 실록기록
박어둔(朴於屯)·안용복(安龍福) 등 2인을 꾀어내 (백기주로) 잡아서 가버렸다”. 이에 안용복은 백기주(伯耆洲) 태수에게 독도는
조선의 땅임을 주장하고 자신들을 끌고온 부당성을 항의하자,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 처리를 막부에 문의하였다.
이 안용복 문제로 조선과 일본 및 일본내 대마도와 막부에서도 논의가 진행되었고, 마침내 1696년 1월 아부풍후수(阿部豊後守)는
관백 덕천강길(德川康吉)의 재가를 얻어 “지리적으로 인번 보다는 조선과 더 가깝기 때문에 조선의 지계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유시(諭示)하였다. 즉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한일간의 독도의 영유권 문제는 1696년 이미 결론이 났다.
1693년 발생한 안용복 사건은 한일간의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최초의 논쟁이다.
사건의 발단은 “계유년(1693년) 봄에 울산의 어부 40여 명이 울릉도(鬱陵島)에 배를 대었는데, 왜인(倭人)의 배가 마침 이르러, 사건 발달의 문제가 되었다


조선실록에 기록된 안용복 사건

안용복이 동래부에 올린 "안용복의 서계"
이자료는 한국의 고유 영토였던 사실을 더욱 확증하는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