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광개토왕릉비>가 논란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된 핵심은 일본 참모부가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 기사를 임나일본부설의 주 근거로 삼으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일제 시기에 일본학자들은 이 문장을 으레 ,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백제)과 ▨▨가라,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이렇게 볼 때 당연히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일본서기>>처럼 후대에 일본인이 만든 사서가 아니라, 5세기 초 당대의 고구려인이 만든 자료라는 점에서, 그 어느 누구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이고도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셈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식민지시대를 넘어서 해방이후 70년대까지 일본 학계의 정설이었습니다. 다만 해방 이후에는 임나일본부설은 부정하되, 백제와 가야 및 왜의 관계는 어느정도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습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1930년 말에 일본의 주장을 비판하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으나 공포하지는 못하였고, 1955년에 비로소 발표하였는데, 한국의 입장에서 내놓은 광개토왕릉비문에 대한 최초의 주장이었습니다.
신묘년의 주어는 고구려인데, 주어가 생략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하였다. 백잔이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 (침략하였다.신라는 고구려의) 신민이었기에, [영락 6년에 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잔을 토벌하였다]. "
북한의 박시형과 김석형의 해석이 대표적입니다.
"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하였다. 백잔이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 (침략하여)신민으로 삼았다."박시형
" 왜가 신묘년에 건너왔다. (고구려가) 바다(패수)를 건너가 백잔▨▨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김석형
그 뒤를 이어 한국의 학자 정두희, 이기백 도 또 다른 해석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즉, 문장 서두의 倭를 목적어로 보고 또 以辛卯年來를 辛卯年以來로 해석한 것입니다.
" (고구려가)왜를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가 격파하였다.그런데 백제가 (왜를 불러들여)신라를 침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그러나 재일사학자 이진희의 비문 변조설이 제기된 이후에는 위의 판독문 자체를 부정하여 해석을 유보하거니, 또는 새로운 판독에 입각한 해석도 시도 되고 있습니다.
이진희 는 來渡海破의 넉 자가 일본의 참모본부에 의해 조작된 글자이므로 기존 해석은 모두 타당치 않으며, 글자의 판독이 원상으로 복구되기 전에는 이를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변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면 우선 본래의 글자를 파악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 변조된 것이 확실한 "海" >
신묘년 글자 중에서도 기왕에 海자로 판독되던 글자는 변조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1982년 중국의 주운대가 찍은 탁본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다른 글자와 칸이 맞지 않고 글자 규격이 다르며 지나치게 왼쪽으로 치우쳐 "삼수변" 자가 비문의 행을 구분하는 세로선 밖으로 삐져 나와 있습니다. 분명 여기에는 변조의 혐의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이 글자의 판독을 유보하는 입장이 적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