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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人神風, 関心のある人は精読! (長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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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刊> 私は朝鮮人神風だ

< ハンギョレ新聞 > ギルユンヒョング記者が使った < 私は朝鮮人がミカゼだ >は ¥"日本軍自殺特攻隊員に犠牲された植民地朝鮮人¥"を本格的に扱った著述だ. 本を通じて著者は 1920年代初に生まれて生まれと同時に日製の皇民化教育を受けて自分のアイデンティティが確立さ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10台重厚組の少年飛行病たちに ¥"親日派¥"という石を投げるのが穏当閑暇だと問う.

慶南四千出身の特攻隊員タックギョングヒョン(創氏人ミスヤマブミヒで 光山文博)の慰霊碑を四天に立てる問題ではみでた葛藤を前後して民族問題研究所が出した声明(名前)も当惑なのは同じだ. 研究所はこれらが徹底的な皇民化教育下で強要された支援によって動員されて, 拒否することができない出撃命令にもだえる美しい年に悲劇的生を終えた被害者なのを認める. といえども罪のない沖繩県民や連合軍の観点では加害者である性格も否定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指摘したのだ.

研究所はまた朝鮮人特攻隊員に対する真相糾明と歴史的評価を通じて適切な方式で悔しい寃魂を慰めて追悼することができる社会的環境を用意して行くことを希望すると伝えた. この本はするから, 朝鮮人特攻隊員に対する真相糾明のための一報道人の執拗な努力の結果物だと言えるだろう.

今までの研究結果によれば朝鮮人がミカゼ特攻隊員は皆 17人だ. リリシズム親日の時 < 松井五臓回歌 > の主人公であるインゼウングが初犠牲者だったし 1944年 6月沖繩周辺海域で死亡した限定室が最後の戦死者だった.

最後の犠牲者は本名仏像のYamamotoタツオ(山本辰雄). 彼は特攻期放火犯に追われて解放一週間前の 1945年 8月 8日銃殺された. 彼が放火犯に追われた理由はただ一つ, 彼が朝鮮人だったからだった.

Yamamotoタツオだけではなく, これら特攻隊員たちの死は日本のための戦争に資源参戦, 命をかけた朝鮮人青年たちの死を規定することは易しくないということを逆説的に示唆してくれる. これらの ¥"恨みの国¥"のために軍人になったが死ぬ瞬間まで差別を受けた. 彼らは死を選択したがその死が日製が願ったように ¥"天皇のための¥" ことで思わなかったようだ.

日本軍が飛行機操縦士を充員する通路は日本陸軍士官学校を含めてユックグントックビョルゾゾングギョンスブサグァン, 陸軍少年飛行病など三つだった. 陸士を卒業した朝鮮人特攻隊員は催精勤(56期)だけで残りは特別操縦出身の将校や 少年飛行出身の下士官たちだった.

特攻隊員の中初戦死者であるインゼウング(創氏名 松井Hideo 松井秀雄)は裕福な家庭で生まれて日本人小学校を通って典型的な皇民化教育を受けた. 彼は最初の飛行士アンチァングナムのためおこり始めたハングゴングヨルに浮き立って過ごしている途中少年飛行病になった.

彼は 1944年 11月 29日六人の隊員と一緒に出撃してレイテぶりに停泊の中だった米軍の輸送船団に体つき攻撃を敢行して死んだ. 彼の攻撃で連合軍の艦船がどんな被害を被ったかは確認されない. 肝が小さくて本当に多かった少年インゼウングは二十の歳の生涯を締め切る代わりに日製によって ¥"半島の英雄¥"と称えられた.

ギョングフングの秀才だった催精勤が日本陸士を出てがミカゼ特攻隊員になったように特攻隊員になった若者達は大部分植民地朝鮮の有能な若者達だった. これらは ¥"朝鮮人¥"という身分的限界を飛び越えるために日本軍飛行士になる道を選択した. しかしそんな選択も窮極的に差別で彼らを自由にさせてく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これらは陸士と特組, 消費を通じて飛行士になったが身分的差別を脱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しその例日本ミリタリズムの見代わりになって歴史の向こうで消えた. 飛行機操縦士は彼らの選択だったが ¥"自殺特攻隊¥"は彼らの自発的選択ではなかった.

がミカゼになったが人々が日製が願ったように ¥"天皇¥"のために死んだのでもなかった. これらは自分の運命を避けることができないことで思ったようだ. 自分の選択で日本軍になったが祖国を植民地で作った天皇のためにたまらないということは自らで納得しにくかったはずだ.

陸士出身の特攻隊員催精勤は ¥"天皇のためにたまらないことができない¥"は言い伝えを残した. タックギョングヒョンとギムサングピル, ユンウングリョルは悲しくてつらい事がある時 ¥"アリラン¥"を歌ったと言った. 最年少特攻隊員だったバックドングフンは父親に ¥"弟(妹)たちは絶対軍に行かせないでね¥"と頼んだ. 彼は日本人同期にそのように言った.

内鮮一体だと言うが嘘だ. 日本は嘘つきなの. 私は朝鮮人の肝っ玉を見せてくれるつもりの. それは結局彼らの最後の残った自尊心だったろうか. 自らの矛盾的選択を正当化するぼろぼろな名誉だったろうか. 17人の朝鮮人がミカゼが犠牲されてから日本が無条件降伏しながら太平洋戦争は終わった. そしてこの当惑な一軍の若者達の選択は歴史的課題で残った.

¥"運命はごまの葉一枚位の厚さで変わった.¥" 日本軍飛行機操縦士で特攻作戦に出て戦死した特攻隊員たちは ¥"親日派¥"になったが暮して帰って来た人々は新生大韓民国の ¥"航空係お父さん¥"になった. 最年少特攻隊員だったバックドングフンの少年飛行病同期の中空軍参謀総長三つ, 作戦司令官五つ, 空軍士官学校長四つが排出されたのだ. 人生はまことにいくら逆説的か.

朝鮮人特攻隊員たちをどんなに評価しなければならないかに対する我が政府の立場はない. 今まで対日抗争期強制動員被害の調査及び国外強制動員犠牲者など支援委員会に被害事実を認めてくれと書類を出したこれは催精勤, バックドングフン, インゼウング, 路用優など四つだけだ. このなかに陸士出身である催精勤は < 親日人名辞書 > に名前が上がって遺族がサポート申し込みを撤回したしバックドングフンとインゼウングは被害者で所定の慰労金を受け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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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카미카제, 관심이 있는 사람은 정독! (長文)

<신간> 나는 조선인 카미카제이다

< 한겨레신문 > 길윤형 기자가 쓴 <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는 "일본군 자살특공대원으로 희생된 식민지 조선인"을 본격적으로 다룬 저술이다. 책을 통해서 저자는 "1920년대 초에 태어나 출생과 동시에 일제의 황민화 교육을 받고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10대 중후반의 소년 비행병들에게 "친일파"라는 돌을 던지는 것이 온당한가"라고 묻는다.

경남 사천 출신의 특공대원 탁경현(창씨명 미쓰야마 부미히로 光山文博)의 위령비를 사천에 세우는 문제로 불거진 갈등을 전후해 민족문제연구소가 내놓은 성명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연구소는 이들이 "철저한 황민화교육 하에서 강요된 지원에 의해 동원돼, 거부할 수 없는 출격명령에 몸부림치다 꽃다운 나이에 비극적 생을 마감"한 피해자임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무고한 오키나와 현민이나 연합군의 관점에서는 가해자인 성격도 부정할 수 없다"고 지적한 것이다.

연구소는 또 "조선인 특공대원에 대한 진상규명과 역사적 평가를 통해 적절한 방식으로 억울한 원혼을 위로하고 추도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마련해 나갈 것을 희망한다"고 전했다. 이 책은 그러니까, 조선인 특공대원에 대한 진상 규명을 위한 한 언론인의 집요한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원은 모두 17명이다. 서정주의 친일시 < 마쓰이 오장 송가 > 의 주인공인 인재웅이 첫 희생자였고 1944년 6월 오키나와 주변 해역에서 사망한 한정실이 마지막 전사자였다.

마지막 희생자는 본명 불상의 야마모토 타츠오(山本辰雄). 그는 특공기 방화범으로 몰려 해방 일주일 전인 1945년 8월 8일 총살되었다. 그가 방화범으로 몰린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조선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야마모토 타츠오뿐 아니라, 이들 특공대원들의 죽음은 일본을 위한 전쟁에 자원 참전, 목숨을 바친 조선인 청년들의 죽음을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걸 역설적으로 시사해 준다. 이들의 "원한의 나라"를 위해 군인이 되었지만 죽는 순간까지 차별을 받았다. 그들은 죽음을 선택했지만 그 죽음이 일제가 원했듯 "천황을 위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일본군이 비행기 조종사를 충원하는 통로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하여 육군특별조종견습사관, 육군소년비행병 등 셋이었다. 육사를 졸업한 조선인 특공대원은 최정근(56기)뿐이고 나머지는 특별조종 출신의 장교나 소년비행 출신의 하사관들이었다.

특공대원 가운데 첫 전사자인 인재웅(창씨名 마쓰이 히데오 松井秀雄)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인 소학교를 다니며 전형적인 황민화 교육을 받았다. 그는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때문에 일기 시작한 항공열에 들떠 지내다가 소년비행병이 되었다.

그는 1944년 11월 29일 여섯 명의 대원과 함께 출격해 레이테 만에 정박 중이던 미군의 수송선단에 몸체 공격을 감행해 숨졌다. 그의 공격으로 연합군의 함선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소심하고 정 많던 소년 인재웅은 스무 살의 생애를 마감하는 대신 일제에 의해 "반도의 영웅"으로 기려졌다.

경흥의 수재였던 최정근이 일본 육사를 나와 가미카제 특공대원이 되었듯 특공대원이 되었던 젊은이들은 대부분 식민지 조선의 유능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인"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일본군 비행사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런 선택도 궁극적으로 차별로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지 못했다.

이들은 육사와 특조, 소비를 통해 비행사가 되었지만 신분적 차별을 벗어나지는 못했으며 그예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양이 되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비행기 조종사는 그들의 선택이었지만 "자살특공대"는 그들의 자발적 선택은 아니었다.

가미카제가 되었지만 이들이 일제가 원했던 것처럼 "천황"을 위해서 죽은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 것 같다. 자신의 선택으로 일본군이 되었지만 조국을 식민지로 만든 천황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스스로로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육사 출신의 특공대원 최정근은 "천황을 위해 죽을 수 없다"는 전언을 남겼다. 탁경현과 김상필, 윤응렬은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아리랑"을 불렀다고 했다. 최연소 특공대원이었던 박동훈은 부친에게 "동생들은 절대 군에 보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는 일본인 동기에게 그렇게 말했다.

"내선일체라고 말하지만 거짓말이야. 일본은 거짓말쟁이야. 나는 조선인의 배짱을 보여 줄 거야." 그것은 결국 그들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을까. 스스로의 모순적 선택을 정당화하는 남루한 명예였을까. 17명의 조선인 가미카제가 희생되고 나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태평양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이 곤혹스런 일군의 젊은이들의 선택은 역사적 과제로 남았다.

"운명은 깻잎 한 장 정도의 두께로 갈렸다." 일본군 비행기 조종사로 특공작전에 나가 전사했던 특공대원들은 "친일파"가 되었지만 살아 돌아온 이들은 신생 대한민국의 "항공계 아버지"가 되었다. 최연소 특공대원이었던 박동훈의 소년비행병 동기 가운데 공군참모총장 셋, 작전사령관 다섯, 공군사관학교장 넷이 배출된 것이다. 인생은 참으로 얼마나 역설적인가.

조선인 특공대원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은 없다. 지금까지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 피해 사실을 인정해 달라고 서류를 낸 이는 최정근, 박동훈, 인재웅, 노용우 등 넷뿐이다. 이 가운데 육사 출신인 최정근은 < 친일인명사전 > 에 이름이 올라 유족이 지원 신청을 철회했고 박동훈과 인재웅은 피해자로 소정의 위로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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