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ja.wikipedia.org/wiki/%E7%84%BC%E8%82%89
日本起源を否定するものとして『別冊BUBKA』2006年(平成18年)7月号33ページに「焼肉」の起源は日本であるが、日本発祥といえども始めたのは朝鮮人であるという説が掲載された。
戦前に捨てるか肥料にするかしていた臓物肉を朝鮮人女工がもらってきて焼いて食べたのがホルモン焼きの始まりであり、ホルモンを焼いて食べる習慣は朝鮮にはなく、ホルモン焼きは日本で始まった。
そして戦後(1945年以降)、ホルモン焼きの屋台が「ホルモン屋」や「朝鮮料理屋」という名称になって行く中、新宿にミノやセンマイといったホルモンだけでなくロースやカルビなどの精肉を用いる店が出来る。この在日朝鮮人女性が経営する明月館が焼肉の祖であるとするのが同誌の主張であり、さらに同誌は、「焼肉」と呼称するようになったのは1965年(昭和40年)に日韓基本条約が結ばれて以降、韓国籍を取得する者が増え、在日朝鮮人の主張した朝鮮料理屋と在日韓国人の主張した韓国料理屋との呼称論争を収拾する案としてプルコギを直訳した「焼肉」が用いられることとなったのだとの説を主張している。
しかし、「焼肉」という語は仮名垣魯文の『西洋料理通』(1872年〈明治5年〉)にバーベキューの訳語として使用されていること、朝鮮料理の焼肉が張赫宙の『権といふ男』(1933年〈昭和8年〉)という小説に登場していることなどから、語源の解説としては同誌の主張は疑わしい。一方で日韓基本条約以降、それまで「朝鮮料理」「朝鮮焼肉」と表示していた焼肉店の多くが「焼肉(店)」と看板変更しはじめたことにより、この名称が一気に普及したのも事実である。
ホルモン料理は大阪西心斎橋の「北極星」北橋茂男により提供され昭和15年に商標登録されている。
焼肉店のメニューについてはキムチやクッパ、ビビンバ、朝鮮式冷麺など朝鮮の食文化を象徴するサイドメニューを豊富に提供することが「焼肉」の朝鮮由来のイメージを補強しているのであるが、これらのメニューの起源と「焼肉」の起源考察はやはり分離しておこなう必要がある。
明治時代の朝鮮料理店は東京などに高級店として数店が営業している程度であり、また提供する料理は韓定食(「韓国料理」の項目を参照)などの正統派宮廷料理であり現代のいわゆる焼肉料理店のようなものではなかった。
中略)
1870年(明治3年)には食肉需要が拡大するなかで商社の宇治野組は屠畜場を経営するに至ったとされる。神戸の場合では被差別部落民とされた食肉加工事業者は明治期にはすでに裕福で蔵や処理施設などをかまえる屋敷町を形成しており、周辺には港湾労働者らの貧民街が形成されており、その一部が食肉処理事業に従事していたという。
内臓などいわゆるホルモンは枝肉(精肉)とは異なり鮮度の劣化が激しく2・3日も経てば腐敗が進み悪臭で食べられたものではなく、冷凍流通の存在しない当時としては肥料にでもするしか利用価値の無いものであったが、当日落としたような内蔵部位については食肉加工場の周辺で売られ食材用として流通していた。
精肉と内臓部位の流通経路は当初から明確に異なっており、江戸時代からの慣習で内臓などは屠畜作業者の取分とされ、これらを港湾労働者らに販売した売却益は屠畜作業者の重要な副収入となっていた。
日本の焼肉文化が朝鮮人と深く関連づけられたのは在日朝鮮人と被差別部落民とが居住や労働の場においてしばしば身近な存在であったことと無関係ではない。
朝鮮人労働者が屠場から牛や豚の内臓等を譲り受けて食べていたことが朝鮮料理の日本での普及と関連してしばしば語られ、東京においても品川の屠場と朝鮮人の焼肉料理との関連を示唆する証言があり、芝浦の朝鮮人集住地を舞台とする村山知義の小説「或るコロニーの記録」には豚の蹄を煮て塩で食べる朝鮮人の描写がある。
東京においても朝鮮人と被差別部落民は近隣住民や同じ職場の労働者として、あるいは雇用者と被雇用者として関係を結んでいた
^^ 事実、明治時代に日本に移住してきた朝鮮人の多くが、日本人が働かなかった「屠場」で働いていたからね。今でも、明治時代の「屠場」で働いて朝鮮人の子孫が、東京の下町で、「鞄」、「靴」などの肉処理に関わった小さい工場を経営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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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式の焼肉料理は、イメージが悪い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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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식의 불고기 요리는, 이미지가 나쁜 w
http://ja.wikipedia.org/wiki/%E7%84%BC%E8%82%89
일본 기원을 부정하는 것으로서『별책 BUBKA』2006년(헤세이 18년) 7월호 33 페이지에「불고기」의 기원은 일본이지만, 일본 발상이라고 해도 시작한 것은 조선인이다고 하는 설이 게재되었다.
전쟁 전에 버릴까 비료로 할까 하고 있던 장물육을조선인 여공이 받아 와 구워 먹었던 것이 호르몬 구이의 시작이며,호르몬을 구워 먹는 습관은 조선에는 없고, 호르몬 구이는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후(1945년 이후), 호르몬 구이의 포장마차가「호르몬가게」나「한국 요리가게」라고 하는 명칭이 되어 가는 중, 신쥬쿠에 미노나 센마이라고 하는 호르몬 뿐만이 아니라 로스나 갈비등의 정육을 이용하는 가게를 생긴다.이 재일 조선인 여성이 경영하는 명월관이 불고기의 선조이다고 하는 것이 같은 잡지의 주장이며, 한층 더 같은 잡지는, 「불고기」라고 호칭하게 된 것은 1965년(쇼와 40년)에 한일 기본 조약이 연결된 이후, 한국적을 취득하는 사람이 증가해 재일 조선인이 주장한 한국 요리가게와 재일 한국인이 주장한 한국요리가게라는 호칭 논쟁을 수습하는 안으로서 불고기를 직역한「불고기」가 이용되게 되었던 것이라고의 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불고기」라고 하는 말은 가나가키 로분의『서양 요리통』(1872년〈메이지 5년〉)에 바베큐의 역어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 한국 요리의 불고기가 장혁주의『권 남』(1933년〈쇼와 8년〉)라고 하는 소설에 등장하고 있는 것등에서, 어원의 해설로서는 같은 잡지의 주장은 의심스럽다.한편으로 한일 기본 조약 이후, 그것까지「한국 요리」「조선 불고기」라고 표시하고 있던 불고기점의 대부분이「불고기(가게)」와 간판 변경하기 시작한 것에 의해, 이 명칭이 단번에 보급했던 것도 사실이다.
호르몬 요리는 오사카 니시신사이바시의「북극성」키타하시 시게오에 의해 제공되어 쇼와 15년에 상표 등록되어 있다.
불고기점의 메뉴에 대해서는 김치나 쿠파, 비빔밥, 조선식 냉면 등 조선의 식생활 문화를 상징하는 사이드 메뉴를 풍부하게 제공하는 것이「불고기」의 조선 유래의 이미지를 보강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러한 메뉴의 기원과「불고기」의 기원 고찰은 역시 분리해 행할 필요가 있다.
메이지 시대의 한국 요리점은 도쿄 등에 고급점으로서 수점이 영업하고 있는 정도이며, 또 제공하는 요리는 한정식(「한국요리」의 항목을 참조)등의 정통파 궁정 요리이며 현대의 이른바 불고기 요리점 같은 것은 아니었다.
중략)
1870년(메이지 3년)에는 식육 수요가 확대하는 가운데 상사의 우지야조는 도살장을 경영하기에 이르렀다고 여겨진다.코베의 경우에서는 피차별 부락민으로 여겨진 식육 가공 사업자는 메이지기에는 벌써 유복하고 창고나 처리 시설등을 짓는 고급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어, 주변에는 항만 노동자등의 빈민가가 형성되고 있어 그 일부가 식육 처리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한다.
내장 등 이른바호르몬은 지육(정육) 과는 달리 선도의 열화가 격렬하고 2・3일정도 지나면 부패가 진행되어 악취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냉동 유통의 존재하지 않는 당시로서는 비료라도 할 수 밖에 이용가치가 없는 것이었지만, 당일 떨어뜨린 것 같은 내장 부위에 대해서는 식육 가공장의 주변에서 팔려 식품 재료용으로서 유통하고 있었다.
정육과 내장 부위의 유통경로는 당초부터 명확하게 달라,에도시대부터의 관습으로 내장 등은 도축작업자의 취분으로 여겨져 이것들을 항만 노동자등에 판매한 매각이익은 도축작업자의 중요한 부수입이 되고 있었다.
일본의 불고기 문화가 조선인과 깊게 관련 지을 수 있던 것은 재일 조선인과 피차별 부락민이 거주나 노동의 장소에 있어 자주 친밀한 존재인 것과 무관계하지 않다.
조선인 노동자가 도장으로부터 소나 돼지의 내장등을 양도해 먹고 있었던 것이 한국 요리의 일본에서의 보급과 관련해 자주 말, 도쿄에 있어도 시나가와의 도장과 조선인의 불고기 요리와의 관련을 시사하는 증언이 있어, 시바우라의 조선인집주지를 무대로 하는 무라야마 도모요시의 소설「혹콜로니의 기록」에는돼지의 제를 익히고 소금으로 먹는 조선인의 묘사가 있다.
도쿄에 있어도 조선인과 피차별 부락민은 근린 주민이나 같은 직장의 노동자로서 혹은 고용자와 피고용자로서 관계를 묶고 있었다
^^ 사실, 메이지 시대에 일본에 이주해 온 조선인의 대부분이, 일본인이 일하지 않았던 「도장」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지금도,메이지 시대의「도장」로 일해 조선인의 자손이, 도쿄의 변두리에서, 「가방」, 「구두」등의 고기 처리에 관련된 작은 공장을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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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원을 부정하는 것으로서『별책 BUBKA』2006년(헤세이 18년) 7월호 33 페이지에「불고기」의 기원은 일본이지만, 일본 발상이라고 해도 시작한 것은 조선인이다고 하는 설이 게재되었다.
전쟁 전에 버릴까 비료로 할까 하고 있던 장물육을조선인 여공이 받아 와 구워 먹었던 것이 호르몬 구이의 시작이며,호르몬을 구워 먹는 습관은 조선에는 없고, 호르몬 구이는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후(1945년 이후), 호르몬 구이의 포장마차가「호르몬가게」나「한국 요리가게」라고 하는 명칭이 되어 가는 중, 신쥬쿠에 미노나 센마이라고 하는 호르몬 뿐만이 아니라 로스나 갈비등의 정육을 이용하는 가게를 생긴다.이 재일 조선인 여성이 경영하는 명월관이 불고기의 선조이다고 하는 것이 같은 잡지의 주장이며, 한층 더 같은 잡지는, 「불고기」라고 호칭하게 된 것은 1965년(쇼와 40년)에 한일 기본 조약이 연결된 이후, 한국적을 취득하는 사람이 증가해 재일 조선인이 주장한 한국 요리가게와 재일 한국인이 주장한 한국요리가게라는 호칭 논쟁을 수습하는 안으로서 불고기를 직역한「불고기」가 이용되게 되었던 것이라고의 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불고기」라고 하는 말은 가나가키 로분의『서양 요리통』(1872년〈메이지 5년〉)에 바베큐의 역어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 한국 요리의 불고기가 장혁주의『권 남』(1933년〈쇼와 8년〉)라고 하는 소설에 등장하고 있는 것등에서, 어원의 해설로서는 같은 잡지의 주장은 의심스럽다.한편으로 한일 기본 조약 이후, 그것까지「한국 요리」「조선 불고기」라고 표시하고 있던 불고기점의 대부분이「불고기(가게)」와 간판 변경하기 시작한 것에 의해, 이 명칭이 단번에 보급했던 것도 사실이다.
호르몬 요리는 오사카 니시신사이바시의「북극성」키타하시 시게오에 의해 제공되어 쇼와 15년에 상표 등록되어 있다.
불고기점의 메뉴에 대해서는 김치나 쿠파, 비빔밥, 조선식 냉면 등 조선의 식생활 문화를 상징하는 사이드 메뉴를 풍부하게 제공하는 것이「불고기」의 조선 유래의 이미지를 보강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러한 메뉴의 기원과「불고기」의 기원 고찰은 역시 분리해 행할 필요가 있다.
메이지 시대의 한국 요리점은 도쿄 등에 고급점으로서 수점이 영업하고 있는 정도이며, 또 제공하는 요리는 한정식(「한국요리」의 항목을 참조)등의 정통파 궁정 요리이며 현대의 이른바 불고기 요리점 같은 것은 아니었다.
중략)
1870년(메이지 3년)에는 식육 수요가 확대하는 가운데 상사의 우지야조는 도살장을 경영하기에 이르렀다고 여겨진다.코베의 경우에서는 피차별 부락민으로 여겨진 식육 가공 사업자는 메이지기에는 벌써 유복하고 창고나 처리 시설등을 짓는 고급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어, 주변에는 항만 노동자등의 빈민가가 형성되고 있어 그 일부가 식육 처리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한다.
내장 등 이른바호르몬은 지육(정육) 과는 달리 선도의 열화가 격렬하고 2・3일정도 지나면 부패가 진행되어 악취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냉동 유통의 존재하지 않는 당시로서는 비료라도 할 수 밖에 이용가치가 없는 것이었지만, 당일 떨어뜨린 것 같은 내장 부위에 대해서는 식육 가공장의 주변에서 팔려 식품 재료용으로서 유통하고 있었다.
정육과 내장 부위의 유통경로는 당초부터 명확하게 달라,에도시대부터의 관습으로 내장 등은 도축작업자의 취분으로 여겨져 이것들을 항만 노동자등에 판매한 매각이익은 도축작업자의 중요한 부수입이 되고 있었다.
일본의 불고기 문화가 조선인과 깊게 관련 지을 수 있던 것은 재일 조선인과 피차별 부락민이 거주나 노동의 장소에 있어 자주 친밀한 존재인 것과 무관계하지 않다.
조선인 노동자가 도장으로부터 소나 돼지의 내장등을 양도해 먹고 있었던 것이 한국 요리의 일본에서의 보급과 관련해 자주 말, 도쿄에 있어도 시나가와의 도장과 조선인의 불고기 요리와의 관련을 시사하는 증언이 있어, 시바우라의 조선인집주지를 무대로 하는 무라야마 도모요시의 소설「혹콜로니의 기록」에는돼지의 제를 익히고 소금으로 먹는 조선인의 묘사가 있다.
도쿄에 있어도 조선인과 피차별 부락민은 근린 주민이나 같은 직장의 노동자로서 혹은 고용자와 피고용자로서 관계를 묶고 있었다
^^ 사실, 메이지 시대에 일본에 이주해 온 조선인의 대부분이, 일본인이 일하지 않았던 「도장」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지금도,메이지 시대의「도장」로 일해 조선인의 자손이, 도쿄의 변두리에서, 「가방」, 「구두」등의 고기 처리에 관련된 작은 공장을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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