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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寇が盗んだ文化財だけ 3万5チォンゾ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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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財庁と関連機関の統計によると日本, アメリカ, フランス, イギリス, ロシア, フランスなど 20個国に総 7万 5,000余点の私たちの文化財があると言う. このなかに日本で確認されたのが約 3万 5,000余点で一番多いです.

  人々が交流をしながら私たち文化財が外国に出ていることはもしかしたら当たり前のイルイジマンにも, しかし私たち文化財海外流出の大部分が掠奪によることだという点で私たちを切ないようにします. 一番深刻な文化財掠奪はやっぱり日本によるのでした.

1905年露日戦争の時の日本軍は咸北ギルズにあった 北関大勝費(北関大捷碑)を強打に行ったことを   1980年代に一在日史学者が東京靖国(靖国) ジェントルマンの外診所でこの雨を見つけながらその存在がまた知られるように になった以後民間次元の北関大勝費返還運動が続いたし結局掠奪 100年ぶりの 2005年 10月このタングエドルアワッスブニだ.

  敬天社 10層石塔(高麗 1348年製作, 高さ 13.5m, 現在国宝 86号)にも不幸な歴史が盛られているのに, 1907年韓国を訪問した日本政府の宮内代わり田中ミスヤキ(田中光顯)は無力を動員して 1907年‾09年頃競技(景気)ゲプンググン(現在北朝鮮の個性直轄市) 扶蘇山にあったこの塔をでたらめに解体して日本東京にいる自分の家で引き抜きました.

   しかしこのような事実が知られながら日本内でこの塔を韓国で返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世論が起こりながら, 日本人の間でも田中の文化財掠奪を責める声が高くなると 1918年田中はこの塔を朝鮮に返した.

  これだけでは なく 1906‾10年あたりにはずば抜けた絶景を誇った平壌市大同区域の朝鮮時代漏丁 あわれ当たり(愛蓮堂)を, 1915年には景福宮 慈善当たり(資善堂) 建物を丸ごと取り離して日本で無断搬出する蛮行をやらかしました.

 

< 慈善当たり(資善堂) >

  また似ている時期日帝の一高官は 石窟庵内部にあった 小型 5層石塔を, また他の日本人一党は 仏国寺多宝塔気団部の四コーナーにあった 4個の 回る獅子の中で 3個 を密かに引き離して逃げたりした.

 

  国宝 124号ハンソングサ 石造菩薩座像も受難にあうと したが, この菩薩像は  江原道江陵ハンソングサトにあったが 1912年日本人によって強制で奪われる紆余曲折を経験してから,この菩薩像が千辛万苦の末に韓国に帰って来たことは 1966年でした.

 

  1914年には朝鮮総督府職員たちが朝鮮時代 4台事故(史庫)のひとつの 江原道 五台山事故に所長されていた朝鮮王朝実録など朝鮮時代の貴重な古文書を引き抜きました. この時日本東京帝国大学で掠奪して間顧問では 1923年関東大地震で大部分火に燃えて消えて 20余圏だけが残っているだけです. この中で 日製に奪われてから 93年ぶりに国内に帰って来た朝鮮王朝実録五台山買ってみた(五台山 史庫本) 47本は東京大学が 2006年  7月ソウル大に古文書寄贈形式で五大山本を返還したが, まことに寄贈と言う(のは)単語をこんな所で使うということがやや苦いだけです.

 

  1905年頃から本格化された日本人たちの古墳盗掘も除くことができない文化財破壊事例です. 特に伊藤博文は李完用を背に負って開城一帯の高麗古墳盗掘をけしかけて数千点の高麗青磁を引き抜いたが, 当時奪われてから 1965年返還された 宝物 452号青磁亀模様やかん が代表的な例です.

  これと共に慶州, 扶余, 公州, 平壌など全国あちこちで不法盗掘が横行したが,  多くの百済古墳を盗掘した教師仮Loubet地温(軽剖慈恩)も悪名高い盗掘師の一人でした. 彼は 公州の宋山里古墳群をでたらめにパヘチョッスブダ. その宋山里 6胡粉すぐ側には武寧王陵が仮Loubetの手を避けたことはまさに千万多幸だとせざるを得ないです. 仮Loubetのお父さんは日本京都で骨董上をしていたが,  これは彼が盗掘したとか盗掘師から得た韓国文化財の行方を推測して見られる書き入れ時でもあります.

 

  競走の新羅古墳も日本盗掘師たちの掠奪対象だったが,  特に競走には数十人の盗掘師が陣を張っていたと言います. これら盗掘師の背後にはオクラ(小倉)という人がいたが,  当時大邱のナムソンゾンギ社長だった奥という自分の富力を土台で盗掘師たちを雇って古墳掠奪をほしいままにしたし, 彼は光復以後自分の掠奪品を  大部分日本で引き抜いたし, それがちょうど今のオクラケルレックションというのです.

 

  日製は文化財掠奪だけではなくこの地に残っている貴重な文化財をその席で破壊する蛮行も躊躇しなかったです.   日製がまず破壊対象で  したことは韓国の象徴的な文化財たちでした. それは韓国人の自尊心をぶっ壊そうとする意図だったが, その代表的な場合で 崇礼門垣根破壊を持つことができます. 日帝は 1907年ソウルを訪問する日本皇太子に便宜を提供するという名分で崇礼門周辺城郭を壊してしまって道路を 出したことは 無礼さとモルジガックハムの極致だったし,  引き続き 1915年にはゾンチァギルを出すという名分で西大門である 敦義門(敦義門)を壊してしまいました.

  日製の文化財破壊は景福宮など宮廷につながりました. 特に 1915年景福宮で朝鮮物産共進会を開きながら日製は 景福宮内全角  4,000余間を無断で解体搬出 日日本人たちに分けてやる行為を躊躇しなかったです. 朝鮮時代王世子と王世子費の生活空間だった慈善当たり建物を丸ごと取り離して日本で無断搬出したこともその時でした.日本人オクラギハチで(大倉喜八郎)は 慈善当たりをトッオが東京にいる自分の家庭園にまた建てた後 ¥"朝鮮官¥"という名前の美術館で活用しました. ところで 1923年関東大震災で建物が火に燃えて消えて礎だけ残るようになったが,  後日その敷地にはオクラホテルが立ち入ったし慈善当たりの存在は忘れて行きました.

   それほど捨てられた礎は 1993年韓国の建築士学者である大田木原大のキム・ジョン洞教授の目に発見されたし, 私たちの返還努力が始まったし結局奪われてから 80年ぶりの 1995年 12月, 慈善当たりは不具の身になったまま景福宮に帰って来ました. 文化財庁はこの礎を明成皇后が弑害された景福宮北乾清宮近くに保管しています.

 

  日製は引き続き ホングリェムン(弘礼門)を壊して 1925年その席に朝鮮総督府建物を建てました. 引き続き 1927年には 総督府建物の前を選り分けるという理由で光化門を解体してゴンツンムン(建春門) 横に移したりしました.

< 日製が景福宮ホングリェムンを壊し出して朝鮮総督府を作りために基礎工事をする姿 >

 日製は進んで 朝鮮の宮廷である昌慶宮を遊園地化する蛮行をやらかして韓国人の自尊心をぶっ壊しました.日帝は 1907年純宗皇帝が昌徳宮に移すと従順を慰めるという名分ですぐ側昌慶宮をテーマパークで作り始めたが,  昌慶宮の堡塁閣(報漏閣-水時計である自撃漏を設置した所) 一帯の全角を無断で撤去した後動物園と植物園で構えて周辺にサクラを植えました. 引き続き博物館も建てたら 1911年から昌慶宮の名前を初めからチァングギョングワン(昌慶苑)に変えました. 賃金が買う ¥"宮(宮)¥"をいち遊び動産である ¥"円(苑)¥"で格下げさせたのです. 神聖で厳格な宮廷昌慶宮は動植物見物して  夜桜楽しむテーマパークで転落してしまいました.

 

  日帝強制占領期間末期に至れば日製の文化財破壊は極まる. 無条件破壊でした. 1943年 ¥"楡林の晨正及び  反(反)時局的峠(古碑)の撤去¥"と言う(のは)秘密命令がこれを端的に言ってくれます. 日製はこの命令を名分にして韓国の民族意識が盛られた碑石たちを全部破壊するとか埋葬してしまいました. 全南海南の李舜臣明朗大勝費, 忠南 牙山の李舜臣神道碑, 全北南原の 李成桂硫酸大勝費, 競技(景気)高揚の布巾戦勝費 など 20余点の石碑がそれほど消えました.

 

  日製が無惨にヤックタルヘガン文化財の中一部は 1966年 5月我が地に帰って来たが,  掠奪文化財返還は 1965年 6月 22日韓日協定を締結しながら結んだ ¥"韓日文化財及び文化協力に関する協定¥"によるのでした.

  しかし日製の掠奪嶺返還交渉が始まったことはこれより先に進んだ 1958年からなのに, 1962年には日本に返還対象リストを提示したが  文化財返還はまともに進行されなかったし結局には 1965年韓日協定によって文化財返還が成り立つようになったのです. しかし韓日協定による日本の文化財返還は途方もなくて無礼きわまりない行為だったし, 極めて一部だけ返したからです.

 

  当時韓国政府は日製の朝鮮総督府が搬出して間古墳出土品と日本人が個人的に掠奪して間文化財など皆 4,479点の文化財を返還してくれるのを要求しました. その対象は朝鮮に統監府が設置された 1905年から 1945年の間に掠奪して間文化財でした.

 

  対象をもうちょっと具体的によく見れば朝鮮総督府がバンツルヘガン古墳出土品 689点(東京国立博物館, 東京大学所長), 痛感及び総督が搬出して間陶磁器 103点, デラウチ総督が所蔵した書画 245点, 仏像 8点, 統監府戦績 1,015点, 日本国有にあたる墳墓出土品と逓信関連文化財 758点, オクラコレクション 80点, その他個人所蔵品 1,581点等です.

 

  しかし日本は個人所有文化財を除いたまま国有共有文化財 1,431点だけ返還して終わらせてしまいました(このなかに昌寧梶童古墳群出土品 106点は 1958年に返還) 当時韓国政府が強力に返還を要請した慶南梁山ブブチォング出土品 489粘度帰って来なかったが,  所長先である東京国立博物館の反対のためでした.

  その時返還されたことは返還要請文化財の 32%に過ぎない.日製が実際に掠奪して間文化財に比べれば極めて一部でした. このような返還結果は当時韓国政府の安逸な対応のせいでした. 文化財返還協約に ¥"個人所有文化財は自発的な寄贈を勧告する¥" とばかり言っておいたのです.

 それでも当時文化財返還協定関連文件を見れば , 韓国政府は  ¥"日本側の力強い所望と我が国にこれより優越が優秀な類似文化財が国立博物館に陳列しているという事実を高麗¥" 日返還放棄したことになっていました. まことに無責任な事だったし憤りが爆発する事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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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가 훔쳐간 문화재만 3만5천점

문화재청과 관련 기관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 미국, 프랑스,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20개 국에 총 7만 5,000여 점의 우리 문화재가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일본에서 확인된 것이 약 3만 5,000여 점으로 가장 많습니다.

  사람들이 교류를 하면서 우리 문화재가 외국에 나가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서도, 그러나 우리 문화재 해외 유출의 대부분이 약탈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가장 심각한 문화재 약탈은 역시 일본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은 함북 길주에 있던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강탈 갔던 것을   1980년대에 한 재일 사학자가 도쿄 야스쿠니(靖國) 신사의 외진 곳에서 이 비를 발견하면서 그 존재가 다시 알려지게 된 이후 민간 차원의 북관대첩비 반환 운동이 계속 되었고 결국 약탈 100년 만인 2005년 10월 이 땅에돌아왔습니다.

  경천사 10층석탑(고려 1348년 제작, 높이 13.5m, 현재 국보 86호)에도 불행한 역사가 담겨 있는데, 1907년 한국을 방문한 일본 정부의 궁내대신 다나카 미스야키(田中光顯)는 무력을 동원해 1907년~09년께 경기 개풍군(현재 북한의 개성직할시) 부소산에 있던 이 탑을 마구 해체해 일본 도쿄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빼돌렸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내에서 이 탑을 한국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면서, 일본인 사이에서도 다나카의 문화재 약탈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1918년 다나카는 이 탑을 조선에 돌려보냈다.

  이뿐만 아니라 1906~10년께에는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던 평양시 대동 구역의 조선시대 누정 애련당(愛蓮堂)을, 1915년엔 경복궁 자선당(資善堂) 건물을 통째로 뜯어 일본으로 무단 반출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 자선당(資善堂) >

  또한 비슷한 시기 일제의 한 고관은 석굴암 내부에 있던 소형 5층석탑을, 또 다른 일본인 일당은 불국사 다보탑 기단부의 네 귀퉁이에 있던 4개의 돌 사자 중 3개 를 몰래 떼어내 달아나기도 했다.

 

  국보 124호 한송사 석조보살 좌상도 수난을 당해야 했는데, 이 보살상은  강원도 강릉 한송사터에 있었으나 1912년 일본인에 의해 강제로 빼앗기는 우여곡절을 겪고나서,이 보살상이 천신만고 끝에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1966년이었습니다.

 

  1914년엔 조선총독부 직원들이 조선시대 4대 사고(史庫)의 하나인 강원도 오대산 사고에 소장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 등 조선시대의 귀중한 고문서를 빼돌렸습니다. 이 때 일본 도쿄제국대학으로 약탈해 간 고문서는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불에 타 없어지고 20여 권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중에서 일제에 빼앗긴 지 93년만에 국내로 돌아온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五臺山 史庫本) 47책은 도쿄대가 2006년  7월 서울대에 고문서 기증 형식으로 오대산본을 반환했는데, 참으로 기증이란 단어를 이런 곳에서 사용한다는 것이 씁쓸할 따름입니다.

 

  1905년께부터 본격화된 일본인들의 고분 도굴도 빼놓을 수 없는 문화재 파괴 사례입니다. 특히 이토히로부미는 이완용을 등에 업고 개성 일대의 고려 고분 도굴을 부추겨 수천 점의 고려 청자를 빼돌렸는데, 당시 약탈당했다가 1965년 반환된 보물 452호 청자 거북모양 주전자 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와 함께 경주, 부여, 공주, 평양 등 전국 곳곳에서 불법 도굴이 횡행했는데,  많은 백제 고분을 도굴했던 교사 가루베 지온(輕剖慈恩)도 악명 높은 도굴꾼의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을 마구 파헤쳤습다. 그 송산리 6호분 바로 옆엔 무령왕릉이 가루베의 손을 피해간 것은 그야말로 천만다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루베의 아버지는 일본 교토에서 골동상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도굴했거나 도굴꾼으로부터 얻은 한국 문화재의 행방을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경주의 신라 고분도 일본 도굴꾼들의 약탈 대상이었는데,  특히 경주에는 수십 명의 도굴꾼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 도굴꾼의 배후에는 오쿠라(小倉)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시 대구의 남선전기 사장이었던 오쿠라는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도굴꾼들을 고용해 고분 약탈을 자행했으며, 그는 광복 이후 자신의 약탈품을  대부분 일본으로 빼돌렸고, 그것이 바로 지금의 오쿠라켈렉션이라는 것입니다.

 

  일제는 문화재 약탈뿐만 아니라 이 땅에 남아 있는 귀중한 문화재를 그 자리에서 파괴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일제가 우선 파괴 대상으로  삼은 것은 한국의 상징적인 문화재들이었습니다. 그건 한국인의 자존심을 망가뜨리려는 의도였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로 숭례문 담장 파괴를 들 수 있습니다. 일제는 1907년 서울을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숭례문 주변 성곽을 헐어버리고 도로를 낸 것은 무례함과 몰지각함의 극치였으며,  이어 1915년엔 전차길을 낸다는 명분으로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을 헐어버렸습니다.

  일제의 문화재 파괴는 경복궁 등 궁궐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1915년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열면서 일제는 경복궁 내 전각  4,000여 칸을 무단으로 해체 반출 해 일본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세자와 세자비의 생활 공간이었던 자선당 건물을 통째로 뜯어 일본으로 무단 반출한 것도 그 때였습니다.일본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는 자선당을 뜯어가 도쿄에 있는 자신의 집 정원에 다시 세운 뒤 "조선관"이라는 이름의 미술관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런데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건물이 불에 타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게 되었는데,  훗날 그 터엔 오쿠라 호텔이 들어섰고 자선당의 존재는 잊혀져 갔습니다.

   그렇게 버려진 주춧돌은 1993년 한국의 건축사학자인 대전 목원대의 김정동 교수의 눈에 발견되었고, 우리의 반환 노력이 시작되었고 결국 약탈 당한 지 80년 만인 1995년 12월, 자선당은 불구의 몸이 된 채 경복궁으로 돌아왔습니다. 문화재청은 이 주춧돌을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경복궁 북쪽 건청궁 근처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일제는 이어 홍례문(弘禮門)을 헐고 1925년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습니다. 이어 1927년엔 총독부 건물의 앞을 가린다는 이유로 광화문을 해체해 건춘문(建春門) 옆으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 일제가 경복궁 홍례문을 헐어내고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기초 공사를 하는 모습 >

 일제는 나아가 조선의 궁궐인 창경궁을 놀이공원화하는 만행을 저질러 한국인의 자존심을 망가뜨렸습니다.일제는 1907년 순종 황제가 창덕궁으로 옮기자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바로 옆 창경궁을 놀이동산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창경궁의 보루각(報漏閣-물시계인 자격루를 설치했던 곳) 일대의 전각을 무단으로 철거한 뒤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꾸미고 주변에 사쿠라를 심었습니다. 이어 박물관도 짓더니 1911년부터 창경궁의 이름을 아예 창경원(昌慶苑)으로 바꾸었습니다. 임금이 사는 "궁(宮)"을 일개 놀이 동산인 "원(苑)"으로 격하시킨 것입니다. 성스럽고 엄격한 궁궐 창경궁은 동식물 구경하고  밤벚꽃 즐기는 놀이동산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이르면 일제의 문화재 파괴는 극에 달한다. 무조건 파괴였습니다. 1943년 "유림의 숙정 및  반(反)시국적 고비(古碑)의 철거"란 비밀 명령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일제는 이 명령을 명분으로 삼아 한국의 민족의식이 담긴 비석들을 모조리 파괴하거나 매장해 버렸습니다. 전남 해남의이순신 명랑대첩비, 충남 아산의 이순신 신도비, 전북 남원의 이성계 황산 대첩비, 경기 고양의행주 전승비 등 20여 점의 석비가 그렇게 사라져 갔습니다.

 

  일제가 무참하게 약탈해간 문화재 가운데 일부는 1966년 5월 우리 땅에 돌아왔는데,  약탈 문화재 반환은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을 체결하면서 맺은 "한일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약탈재 반환 협상이 시작된 것은 이보다 앞선 1958년부터인데, 1962년엔 일본에 반환 대상 목록을 제시했지만  문화재 반환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결국엔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해 문화재 반환이 이뤄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한일협정에 따른 일본의 문화재 반환은 터무니없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으며, 지극히 일부만 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반출해 간 고분 출토품과 일본인이 개인적으로 약탈 해 간 문화재 등 모두 4,479점의 문화재를 반환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대상은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된 1905년부터 1945년 사이에 약탈해 간 문화재였습니다.

 

  대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총독부가 반출해간 고분 출토품 689점(도쿄국립박물관, 도쿄대 소장), 통감 및 총독이 반출해 간 도자기 103점, 데라우치 총독이 소장한 서화 245점, 불상 8점, 통감부 전적 1,015점, 일본 국유에 해당하는 분묘 출토품과 체신관련 문화재 758점, 오쿠라 컬렉션 80점, 기타 개인 소장품 1,581점 등 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개인 소유 문화재를 제외한 채 국유 공유 문화재 1,431점만 반환하고 끝내 버렸습니다(이 가운데 창녕 교동 고분군 출토품 106점은 1958년에 반환) 당시 한국 정부가 강력히 반환을 요청했던 경남 양산 부부총 출토품 489점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소장처인 도쿄국립박물관의 반대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반환된 것은 반환 요청 문화재의 32%에 불과하다.일제가 실제로 약탈해 간 문화재에 비하면 지극히 일부였습니다. 이같은 반환 결과는 당시 한국 정부의 안일한 대응 탓이었습니다. 문화재 반환 협약에 "개인 소유 문화재는 자발적인 기증을 권고한다" 고만 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당시 문화재 반환 협정 관련 문건을 보면 , 한국 정부는  "일본 측의 강력한 소망과 우리나라에 이보다 월등이 우수한 유사 문화재가 국립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 해 반환포기한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었으며 분통터지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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