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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史劇ドラマ台湾で人気好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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ドラマ ¥"飢荒の後¥"が台湾で新しい寒流風を起こしている.

29日台湾ドラマ専門チャンネル ETTVによれば ¥"飢荒の後¥"は台湾で視聴率 5.35%を記録して今年海外プログラム中最高の視聴率を果たした.

これは去る 2004年に放映されて 6.22%で歴代最高の寒流ドラマ視聴率を記録した ¥"大長今¥" 以後 5%を越した記録でもある.

台湾 ETTV 側は飢荒の後の人気秘訣で寒流スタインハ・ジウォンとジチァングウックの熱演と緻密な劇の流れ, 胸が痛む愛話と派手な画面が影響を及ぼしたことで解いた.

アイリングチォウドラマチャンネル編成部長は “韓国史劇にも ‘元国’という中国背景が登場したのが台湾視聴者たちに興味を誘発させたし, 完璧に翻訳された良質のコンテンツが人気上昇の原動力”と評価した.

一方 ¥"飢荒の後¥"は去る 4月 30%に迫る視聴率で人気裏に終映した.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09&aid=0002916559

中国元国の皇帝 スンゼ(順帝, 在位: 1333‾1370)の皇后である 飢荒の後(奇皇后,)は高麗の女人だった. 13世紀モンゴルの草原で起きて 14世紀東アジアを拠点で中東を通ってロシアと東欧まで一緒にする巨大領土を持った, 歴史上類例を捜してみることができない大帝国だった元国の皇后が高麗出身の女人だというのはかなりおもしろい事だ. それにこの飢荒の後は皇后の席に上がったことに止めないで皇后になった以後 37年間積極的に政治に介入して元国と高麗に多い影響を及ぼした.

高麗の工女で元国皇后になるまで

ジンギスカン[成吉思汗]がモンゴル不足を統合して出た征服戦争は中国大陸だけではなく, 隣り国を次から次へ打って入って行って終りもなしに領土を広げる戦争で拡がった. 破竹の勢いで起きてその誰もあう者いなかったモンゴル帝国の 7回もなる侵入にも煮こもうとする 30余年間屈せず抗したが, 結局大帝国建設の強烈な野望の前にひざまずいてしまった. 煮こもうとする長期間にかけた抗拒おかげさまでモンゴル帝国(院世祖[クビライ・カン]が首都を大刀[現在の北京]で移して国号を ‘院’にしたことが 1271年の事だ. この時期にはまだモンゴル帝国だった.)が征腹した他の地域たちとは違い完全に服属されないで, 自主的な国号と政権を認められる独立国家で残ることができた. しかし世界帝国だった元国のわく中に入った 100余年の間煮こもうとする院朝廷から幾多の内政干渉に苦しま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ことも事実だった.

王子たちは人質で元国に行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し, 王は院朝廷でわがまま取り替えたし, 婚姻通交を先に立たせて元国公州が高麗の王妃になって入って来て高麗政治に干渉する用事ができた. 韓半島の北地は元国の直接統治区域になったし, 元国の征服戦争を助けるというミョングブンハに幾多の物資と軍事が掠奪に近く動員さ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その中でも元国は高麗に ‘工女’という非常に野蛮的な要求をして来た. 工女と言う(のは)言葉とおり女を供え物で捧げるのだ. 元国の工女要求は 80年間情事に残っていることだけ 50余回に至って, この外に王室や貴族が個人的に要求したこともあまたあったと言う.

原義工女要求理由は遊牧民族出身である元国王室に女が不足だったからだった. 元国には王室で要する女外にも, 原義貴族と高官たちが要求する女も供給してく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し, どんな場合には軍人集団などの婚姻のために多くの数の女を要したりした.

工女は高麗全体に大きい試練を抱かれてくれた. 幼い娘を工女で奪われないために早目に結婚をさせる仕事が多くなって早婚の風習までできるほどだった. 工女は下層民でばかり差出するのではなく元国王室の要求に相応する位の身分を持った女も必要だったから貴族の女息たちも例外ではなかった. 高麗で渡った工女たちはたいてい元国宮廷の宮女や高官貴族の妻妾になる場合が多かったが, 距離(通り)の芸者で売られて異国で悲しい生涯を暮さなければならない場合たちもあった. 工女はそれほど高麗女人たちの未来を見積る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する恥辱だったからその中には工女で選ばれれば行かないために自殺をする場合もあった.

src=http://ncc.phinf.naver.net/ncc02/2011/7/1/182/img_02-1.jpg?type=w646

元国の最後の皇帝スンゼ(ブックワンの恵宗).

飢荒の後もこんな高麗工女中の一人だった. 飢荒の後の本館は布巾でお父さんは ギザオ(奇子敖)だ. 記者来る門下侍郎平章社を執り行なった ギユンスック(奇允肅)の曽孫で, 蔭補で官職に上がるほどだったからそのように韓米した家ではなかったようだ. 飢荒の後はこの記者奥義末娘に生まれた. 慰労お兄さんが五つにお姉さんがふたりいた. 飢荒の後は工女で選ばれて 1333年高麗出身宦官だった 雇用補(高竜普)の取り持ちで院王室の宮女になった. 当時元国王室には高麗出身宦官たちが多かった. 元国は少数のモンゴル族が多数の漢族を治める国だったから漢族たちが中央政府で進出して力を得ることを極度に阻んでいた. しかし支配構造を維持するためには必ず識者層が必要だった. 遊牧民出身で教養を積む振ることがなかった元国支配層たちはこんな要求を高麗で捧げた文が分かる宦官たちを通じて解決した. 雇用補も高麗から院に行った宦官だった.

雇用補は祖国, 高麗から来た飢荒の後を車を付く宮女席に座らして皇帝であるスンゼの目立つようにした. 当時元国皇帝であるスンゼ(恵宗)は独特の履歴を持っていた. 幼い時代彼は王室政争の間で高麗の大青島に 1年間流刑を行った経験があった. 高麗で住んだ経験のせいだったろうか? スンゼはまもなく飢荒の後を寵愛した.

皇帝の寵愛は皇后の妬みを催すものと決まっている. 飢荒の後は当時スンゼの第1皇后だったタナシルリから逼迫を受けた. タナシルリは飢荒の後に随時にむち打ちをして焼きごてで肉を煎りつけたりしたと言う. スンゼの第1皇后タナシルリはスンゼと静寂関係だった家の娘で, スンゼとの間もすごく良くなかった. 飢荒の後がスンゼの寵愛を受けてから 2年目になった 1335年, 皇后タナシルリの兄弟たちがスンゼに反対する謀反を起こすものの失敗した. この事件で皇后タナシルリも反乱に加わったという罰を受けて皇后の席で廃位されて出宮にあったし以後死亡した.

スンゼは寵愛して麻紙ない飢荒の後を皇后席に乗せようと思ったが, 実権者だった バヤン[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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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극드라마 대만에서 인기 호조 ^-^

드라마 "기황후"가 대만에서 새로운 한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29일 대만 드라마 전문채널 ETTV에 따르면 "기황후"는 대만에서 시청률 5.35%를 기록하며 올해 해외 프로그램중 최고의 시청률을 달성했다.

이는 지난 2004년에 방영돼 6.22%로 역대 최고의 한류드라마 시청률을 기록했던 "대장금" 이후 5%를 넘긴 기록이기도 하다.

대만 ETTV 측은 기황후의 인기 비결로 한류 스타인 하지원과 지창욱의 열연과 치밀한 극전개,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와 화려한 화면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했다.

아이링처우 드라마채널 편성부장은 “한국 사극임에도 ‘원나라’라는 중국 배경이 등장한 것이 대만 시청자들에게 흥미를 유발시켰고, 완벽하게 번역된 양질의 콘텐츠가 인기 상승의 원동력”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기황후"는 지난 4월 30%에 육박하는 시청률로 인기리에 종영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09&aid=0002916559

중국 원나라의 황제 순제(順帝, 재위: 1333~1370)의 황후인 기황후(奇皇后,)는 고려의 여인이었다. 13세기 몽골의 초원에서 일어나 14세기 동아시아를 거점으로 중동을 지나 러시아와 동유럽까지 아우르는 거대 영토를 가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제국이었던 원나라의 황후가 고려 출신의 여인이라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게다가 이 기황후는 황후의 자리에 오른 것에 그치지 않고 황후가 된 이후 37년간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여 원나라와 고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고려의 공녀에서 원나라 황후가 되기까지

칭기즈칸[成吉思汗]이 몽골 부족을 통합하고 나선 정복 전쟁은 중국 대륙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를 닥치는대로 치고 들어가 끝도 없이 영토를 넓히는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파죽지세로 일어나 그 누구도 당할 자 없었던 몽골제국의 7차례나 되는 침입에도 고려는 30여 년간 꿋꿋이 항거하였지만, 결국 대제국 건설의 강렬한 야망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고려는 장기간에 걸친 항거 덕분에 몽골 제국(원 세조[쿠빌라이 칸]가 수도를 대도[현재의 북경]로 옮기고 국호를 ‘원’으로 한 것이 1271년의 일이다. 이 시기에는 아직 몽골 제국이었다.)이 정복한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완전히 복속되지 않고, 자체적인 국호와 정권을 인정받는 독립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 제국이었던 원나라의 테두리 안에 들어간 100여 년 동안 고려는 원 조정으로부터 수많은 내정간섭에 시달려야만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왕자들은 인질로 원나라에 가야만 했고, 왕은 원 조정에서 마음대로 갈아치웠으며, 혼인 통교를 앞세워 원나라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되어 들어와 고려 정치에 간섭하는 일이 생겼다. 한반도의 북쪽 땅은 원나라의 직접 통치 구역이 되었고, 원나라의 정복 전쟁을 돕는다는 명분하에 수많은 물자와 군사가 약탈에 가깝게 동원되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원나라는 고려에 ‘공녀’라는 매우 야만적인 요구를 해왔다. 공녀란 말 그대로 여자를 공물로 바치는 것이다.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80년간 정사에 남아 있는 것만 50여 회에 이르고, 이 외에 왕실이나 귀족이 개인적으로 요구한 일도 허다하였다고 한다.

원의 공녀 요구 이유는 유목 민족 출신인 원나라 왕실에 여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원나라에는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여자 외에도, 원의 귀족과 고관들이 요구하는 여자도 공급해주어야 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군인 집단 등의 혼인을 위해 많은 수의 여자를 필요로 하기도 하였다.

공녀는 고려 전체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어린 딸을 공녀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결혼을 시키는 일이 많아져 조혼의 풍습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공녀는 하층민에서만 차출하는 것이 아니라 원나라 왕실의 요구에 상응하는 정도의 신분을 가진 여자도 필요했기 때문에 귀족의 여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려에서 건너간 공녀들은 대개 원나라 궁궐의 궁녀나 고관 귀족의 처첩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거리의 기생으로 팔려가 이국땅에서 슬픈 생애를 살아야 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공녀는 그만큼 고려 여인들의 앞날을 가늠할 수 없도록 만드는 치욕이었기 때문에 개중에는 공녀로 뽑히면 가지 않기 위해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제(북원의 혜종).

기황후도 이런 고려 공녀 중의 한 명이었다. 기황후의 본관은 행주이고 아버지는 기자오(奇子敖)이다. 기자오는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기윤숙(奇允肅)의 증손으로, 음보로 관직에 오를 정도였으니 그렇게 한미한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기황후는 이 기자오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가 다섯에 언니가 둘 있었다. 기황후는 공녀로 뽑혀 1333년 고려 출신 환관이던 고용보(高龍普)의 주선으로 원 왕실의 궁녀가 되었다. 당시 원나라 왕실에는 고려 출신 환관들이 많았다. 원나라는 소수의 몽골족이 다수의 한족을 다스리는 나라였기에 한족들이 중앙 정부로 진출해 힘을 얻는 것을 극도로 막고 있었다. 하지만 지배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식자층이 필요했다. 유목민 출신으로 교양을 쌓을 틈이 없던 원나라 지배층들은 이런 요구를 고려에서 바친 글을 아는 환관들을 통해서 해결했다. 고용보도 고려에서 원으로 간 환관이었다.

고용보는 조국, 고려에서 온 기황후를 차를 따르는 궁녀 자리에 앉히고 황제인 순제의 눈에 띄게 했다. 당시 원나라 황제인 순제(혜종)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왕실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고려의 대청도에 1년간 귀양을 간 경험이 있었다. 고려에서 살았던 경험 탓이었을까? 순제는 곧이어 기황후를 총애했다.

황제의 총애는 황후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기황후는 당시 순제의 제1황후이던 타나실리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타나실리는 기황후에게 수시로 채찍질을 하고 인두로 살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순제의 제1황후 타나실리는 순제와 정적 관계이던 집안의 딸로, 순제와의 사이도 무척 좋지 않았다. 기황후가 순제의 총애를 받은지 2년째가 되던 1335년, 황후 타나실리의 형제들이 순제에 반대하는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황후 타나실리도 반란에 가담하였다는 벌을 받고 황후의 자리에서 폐위되어 출궁을 당하였으며 이후 사망했다.

순제는 총애해 마지 않는 기황후를 황후 자리에 올려놓으려 했지만, 실권자이던 바얀[伯顏, 메르키트 바얀]이 몽골족이 아니면 황후가 될 수 없다고 반대하여 끝내 이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황후 자리는 몽골 옹기라트 부족 출신의 바얀 후투그[伯颜忽都]에게 돌아갔다. 바얀 후투그는 매우 어진 성격으로 황후가 되고 나서도 거의 앞에 나서지 않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한번 황후의 꿈이 좌절되었던 기황후는 이후 1338년 아들 아이유시리다라[愛猷識里答臘, 1338~1378]를 낳고 이듬해 메르키트 바얀이 실각하자 마침내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원나라의 실권자로 부상하다

기황후는 황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어차피 제1황후는 허수아비와 다름없었다. 그녀는 황후의 직속 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으로 개편하여 고용보를 자정원사(資政院使)에 앉히고 왕실 재정을 장악하였다. 막대한 왕실 재정을 틀어쥐게 된 기황후는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1353년에는 황제를 압박하여 자신의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를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고, 같은 고향 출신인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군사 책임자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삼아 군사권도 장악하였다.

기황후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풍속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한다. 고려의 복식과 음식들이 원나라 고위층들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고, 명문가에 속하려면 고려 여자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 퍼졌다.

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 그는 북원의 소종이 되었다.

한편, 기황후가 원나라 정치를 쥐락펴락하게 되자 고려에 남은 그녀의 가족들도 덩달아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원나라에서는 그녀의 아버지 기자오를 영안왕(榮安王)으로, 부인을 왕대부인으로 하였으며, 선조 3대를 왕의 호로 추존하였다. 또한, 기황후의 오빠 기철(奇轍)을 원나라의 참지정사, 기원(奇轅)을 한림학사로 삼자, 고려에서도 이들을 덕성부원군, 덕양군에 봉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기씨 집안이 고려를 넘어서 원나라로부터 힘을 얻게 되자 고려 조정은 이들 기씨 집안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다. 문제는 이 기씨 집안의 아들들이 원나라의 힘을 고려에 유익하게 쓰기보다는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쪽으로 이용했다는 데 있었다. 기황후도 가족들을 위해 고려에 대한 내정간섭을 지나치게 했다. 기씨 집안의 악행은 결국 공민왕(恭愍王) 즉위 후 원나라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이들을 비밀리에 제거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때도 기황후는 공민왕을 제거하고 충선왕(忠宣王)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이미 원나라의 국세가 기울고 고려가 원나라 군대를 잘 막아내서 실패로 그쳤다.

물론 고려 여인인 기황후가 원나라의 황후가 되어서 좋은 점도 있었다. 충렬왕 때 시작되어 80년간 지속된 공녀 징발이 금해진 것도 이 시기였고, 고려가 원나라의 테두리 안에 들어간 후 계속 제기되었던 입성론(立省論), 즉 고려의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고 원나라에 속하는 한 개의 성으로 만들자는 논의가 사라진 것도 이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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