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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済仏教の日本電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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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百済仏教の日本電波

 元興寺縁起によれば, 聖王が 使者を日本に送って 太子像・潅仏器・≪説仏起書巻≫を 倭国 朝廷に送ったと言う. これは盛旺 16年(538)の仕事として, 仏教が日本に初めて伝わった史蹟を言うと日本学界では理解している.111)≪ソルブルギソグォン≫銀釈迦の 伝記なので上の太子上はすぐ 悉逹太子像と言う.112)


 6世紀後半は 威徳王(553〜597)の 治世として彼は新羅の侵攻を阻むことに力を注ぐ一方 内治にも力をつくして高度の仏教文化の花を咲かせた. 在位 24年(577)には経典外にも 律師・禅師・尼・呪禁師・造仏工・造瓦工 などを日本に送った. 在位 30年にはバックゼスング 日羅が日本に渡って, 31年には 鹿深臣が百済から弥勒石像を持って日本に帰って来て, 同じ年に 佐伯連も仏像 1躯を持って帰国した. ノックシムシンが持って来た弥勒石像は 半跏思惟像だったのに推測されているのに, これは百済で半連像を頻繁にaようにしたという話になる.


 左白蓮の持って来た仏像は 蘇我馬子が受けて 仏殿に仕えて, 司馬逹等と 池辺水田に命じて 修行者を求めるようにした. そして 播磨に暮していたげんぞくした高句麗の 老夫婦, 恵便と 法明に会った. サマダルドングの娘たちは 法明を師匠にして嫁入りしたが, 善信尼・禅蔵尼・恵善尼が彼らだ.113) が史蹟は日本において仏教収容が具体化される過程だとよく称えられている. 正式で係を受けないソンシンニなどは 戒師から係を受けるために小児麻子に百済に送ってくれと請じた. 威徳王 34年(587)に日本へ来た百済使臣の説明によれば, 百済で尼が係を受けようとすれば先に 尼寺で 10人の 尼師を請じて係を受けた後 法師のお寺へ行って 10人の法師を請じて係を受けると言う. だから百済では比丘のお寺と尼のお寺がお互いに鐘の音を聞くことができる位に近くの距離(通り)にあった.


 威徳王 35年に百済は 令照律師と彼の弟子 恵聡, 令威法師とその弟子 恵勳, 道厳法師とその弟子 令契の六僧侶と 40人の 工人, そして 鏤盤師・瓦師 など 一団を日本に送った. それは 受戒に必要な僧侶及び寺を作る 工人の派遣を小児麻子が要請したからだ. 小児麻子はこれら百済技術者の指導を受けて 尼寺として 建興寺を, 法師寺として 法興寺を作り始めた. 法興寺 造営は 東漢氏のガムドックハに 忍海・朝要・鞍部・山西の 4豪族を 首領にしてその事由民によって成り立った. 言い換えれば法興寺造営の指導は百済技術者が引き受けて, 作業を担当した人々は小児さんの支配の下にあった 渡来氏族だった.114) これを通じて当時百済仏教の高い水準を充分に見当をつけることができる.


 威徳王 37年にソンシンニなどは正式尼になって百済から帰って来た. 威徳王 40年にゴンフングサ(豊浦寺)の金堂と 礼仏堂が竣工されたし, 遂にその 3年後には法興寺塔が竣工された. ゴンフングサもそういう例だが, 仏寺を作ることにあって先に塔から建てることは百済の 仏寺造営 方式だと理解されている. 高句麗僧侶 慧慈とバックゼスング 慧聡 二人は日本最初の 法師寺である法興寺に仕えられたし, 以後法興寺は日本において 仏法興隆の中心地になった.


 武王 3年(602)にバックゼスング 観勒は 暦本・天文地理書・遁甲方術書を持って日本へ行った. ヤマト調整では 書生 数人を抜いてそれぞれ暦法, 天文及び遁甲方術を学ぶようにした.115) が記事を置いて次のように説明する. 第一百済では僧侶が仏教以外に 陰陽道に係る学問を 修得した. 二番目グァンルックが体得した学問は弟子に 教授するほどに高い水準だった. 三番目日本では 暦学を含んで 陰陽道をその後政府のドックゾムハに置いて 局外者がこのようなものなどを運用するとか 教授することは禁止されたが, 僧侶が易学などを学ぶことができた百済では僧侶と政府ないし宮廷との関係が密接だった.116)

 それから 22年後にグァンルックは日本最初の 僧正職に上がった. 一方≪本朝高僧伝≫には次のように記述している.


百済人々は 三論を研究したし, 外学にも通じた(≪本朝高僧伝≫圏 1, 百済国沙門観勒)

 伊豆音は百済だけではなく中国と高句麗の仏教係でも三論学が一般的に流行った. このような傾向は次の事実を通じて見当をつけることができる. 高句麗勝 慧潅は日本の第2代 僧正に任命されたが, 日本三論宗の詩調だった. しかしグァンルック・慧潅皆自分たちの専攻である三論哲学を日本で講義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ことは当時日本仏教学界が三論を理解するほどの水準に至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からだ. そのため グァンルックが当時の 民度に合わせて 暦・遁甲・方術 などを教えたことはウェグックスングとして一つの方便だったろう言う.117) そして近頃日本の 僧官制度が僧正を中心にする 南朝系ヨッドン位百済の僧冠制度も南朝係だったと推測される.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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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불교의 일본 전파



(3) 백제불교의 일본 전파

 元興寺緣起에 의하면, 聖王이 使者를 일본에 보내어 太子像·灌佛器·≪說佛起書卷≫을 倭國 朝廷에 보냈다고 한다. 이것은 성왕 16년(538)의 일로서, 불교가 일본에 처음 전해진 사적을 말한다고 일본 학계에서는 이해하고 있다.111)≪설불기서권≫은 석가의 傳記이므로 위의 태자상은 곧 悉達太子像이라고 한다.112)


 6세기 후반은 威德王(553∼597)의 治世로서 그는 신라의 침공을 막는 데 주력하는 한편 內治에도 힘써 고도의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재위 24년(577)에는 경전 외에도 律師·禪師·비구니·呪禁師·造佛工·造瓦工 등을 일본에 보내었다. 재위 30년에는 백제승 日羅가 일본에 건너가며, 31년에는 鹿深臣이 백제로부터 미륵석상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오고, 같은 해에 佐伯連도 불상 1軀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녹심신이 가지고 온 미륵석상은 半跏思惟像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이것은 백제에서 반가상을 적지 않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좌백련이 가지고 온 불상은 蘇我馬子가 받아 佛殿에 모시고, 司馬達等과 池邊水田에게 명하여 修行者를 구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播磨에 살고 있던 환속한 고구려의 老夫婦, 惠便과 法明을 만나게 되었다. 사마달등의 딸들은 法明을 스승으로 하여 출가하였는데, 善信尼·禪藏尼·惠善尼가 그들이다.113) 이 사적은 일본에 있어서 불교수용이 구체화되는 과정이라고 흔히 일컬어지고 있다. 정식으로 계를 받지 않은 선신니 등은 戒師로부터 계를 받기 위해 소아마자에게 백제에 보내달라고 청하였다. 위덕왕 34년(587)에 일본에 온 백제 사신의 설명에 의하면, 백제에서 비구니가 계를 받으려면 먼저 尼寺에서 10인의 尼師를 청해 계를 받은 뒤 法師의 절에 가서 10인의 법사를 청해 계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백제에서는 비구의 절과 비구니의 절이 서로 종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위덕왕 35년에 백제는 令照律師와 그의 제자 惠聰, 令威法師와 그 제자 惠勳, 道嚴法師와 그 제자 令契의 여섯 승려와 40인의 工人, 그리고 鏤盤師·瓦師 등 一團을 일본에 보냈다. 그것은 受戒에 필요한 승려 및 절을 지을 工人의 파견을 소아마자가 요청했기 때문이다. 소아마자는 이들 백제 기술자의 지도를 받아 尼寺로서 建興寺를, 法師寺로서 法興寺를 짓기 시작했다. 법흥사 造營은 東漢氏의 감독하에 忍海·朝要·鞍部·山西의 4호족을 首領으로 하고 그 사유민에 의해 이루어졌다. 다시 말하면 법흥사 조영의 지도는 백제 기술자가 맡고, 작업을 담당한 사람들은 소아씨의 지배하에 있던 渡來氏族이었다.114) 이를 통해 당시 백제불교의 높은 수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위덕왕 37년에 선신니 등은 정식 비구니가 되어 백제로부터 돌아왔다. 위덕왕 40년에 건흥사(豊浦寺)의 금당과 禮佛堂이 준공되었고, 마침내 그 3년 뒤에는 법흥사 탑이 준공되었다. 건흥사도 그러한 예이지만, 佛寺를 짓는 데 있어 먼저 탑부터 세우는 것은 백제의 佛寺造營 방식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고구려 승려 慧慈와 백제승 慧聰 두 사람은 일본 최초의 法師寺인 법흥사에 모셔졌고, 이후 법흥사는 일본에 있어 佛法興隆의 중심지가 되었다.


 무왕 3년(602)에 백제승 觀勒은 曆本·天文地理書·遁甲方術書를 가지고 일본에 갔다. 야마또 조정에서는 書生 數人을 뽑아 각각 역법, 천문 및 둔갑방술을 배우도록 했다.115) 이 기사를 두고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백제에서는 승려가 불교 이외에 陰陽道에 관계되는 학문을 修得했다. 둘째 관륵이 체득한 학문은 제자에게 敎授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 셋째 일본에서는 曆學을 포함해서 陰陽道를 그 후 정부의 독점하에 두고 局外者가 이러한 것들을 운용하거나 敎授하는 것은 금지되었는데, 승려가 역학 등을 배울 수 있었던 백제에서는 승려와 정부 내지 궁중과의 관계가 밀접했다.116)

 그로부터 22년 뒤에 관륵은 일본 최초의 僧正職에 올랐다. 한편≪本朝高僧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백제 사람들은 三論을 연구하였고, 外學에도 통달하였다(≪本朝高僧傳≫권 1, 百濟國沙門觀勒)

 이즈음은 백제뿐 아니라 중국과 고구려의 불교계에서도 삼론학이 일반적으로 유행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다음 사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승 慧灌은 일본의 제2대 僧正으로 임명되었는데, 일본 삼론종의 시조였다. 그러나 관륵·혜관 모두 자신들의 전공인 삼론 철학을 일본에서 강의하지 못했던 것은 당시 일본 불교학계가 삼론을 이해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륵이 당시의 民度에 맞추어 曆·遁甲·方術 등을 가르쳤던 것은 외국승으로서 하나의 방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117) 그리고 이즈음 일본의 僧官制度가 승정을 중심으로 하는 南朝系였던만큼 백제의 승관제도도 남조계였다고 추측된다.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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