メインへ

KJCLUB 日韓文化交流へようこそ。

イナオリ強盗伊藤博文

閲覧数 : 72
KO 255 zoskek 2,317,356 / 2,811,753

Itoとの初出会いで乙未事変( 明聖王后 暗殺) 挙論できなかった高宗
 
一番目はItoが三番目内閣を終わらせて, 2ヵ月あまりの長期中国旅行を行く道に 2週間韓国に滞留した時だった.

1898年 8月末で 9月初にゴルチョソだ. この時彼は気持ちが良かったみたいだ. 奥さんに出した手紙に “皇帝及び政府人民から考えの外で親切な大宇なので夢みたいな芯(心地)だった”と書いた.(伊藤博文伝)


‘考えの外で親切な大宇’が何の言葉か. 閔の後暗殺(閔后暗殺)はわずか 2年前, Itoの 総理在職の時だったし, 暗殺を指揮決行した韓国駐在日本公使Miura(三浦梧樓)の任命権者はItoだったのだ.

Miuraが軍事指揮圏を行使するように取り計いしてくれたことも伊藤 総理だった. (金文子, <朝鮮王妃殺害と 日本人>, 高文研) 日本は暗殺に加わった幅も 48人を兔職されたMiura(三浦)とともに, 広島(広島) 地方裁判所に連れて来て裁判したが, 証拠不十分だと兔訴(兔訴)処分, 皆方面してしまった.
総理在任の中に起きたし, 釈然としなく後始末されたこの暗殺事件を, 韓国へ来ながら, そしてジアビ高宗皇帝に会いながらItoは意識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はずだ.

この時に高宗はこの問題を口があげなかったみたいだ. ‘考えの外で親切な大宇’はこれで出た末日のだ.
Itoが二番目で高宗と会う雰囲気を見る.
である・ロゾンゼングの宣戦布告は 1904年 2月 10日だった.

開戦するやいなや日本は漢陽から占領して 2月 23日韓日議定書を締結した. 韓国の地を収容して軍事基地にして韓国人を軍需人足に動員するなど韓国を日本の戦争体制にひいて入れるためのことだった. おびただしい侵略行為だった.
議定書には韓国皇室との親誼(親誼)を作ること, そして韓国の独立と領土保全を保障する弔文がある. この土台の上でItoは韓国に ‘皇帝慰問特使’で 3月中旬に派遣されたのだ.

開戦とともに高宗の銃身(寵臣) 李・ヨンイクなどロシアと近かった要因たちが大挙追い出されて雰囲気が慌しくなって, 日本軍の軍事作戦による民衆の不満が高くなると, 日本政府は最高の文民カードItoをソウルに行かせることに したのだ.


この時にItoは 10個グループにわたって, 高宗皇帝の前で, ‘東洋平和’維持, 西洋文明収容と改革の原則, ‘侵略的な西洋人’ ロシア排除などを講義するように列べた.

 この中には “韓国皇帝が私たちの日本と存亡を一緒にして, 東洋平和の維持方策に協動したら … 長く韓国の傘下を爆陣(暴秦-ロシア)の場中に落ちないように, まるで日本自らの存亡とようにして…お互いに安危存亡(安危存亡)を一緒にして… ”という文具も見える.
“ハンファング(韓皇)はこれを仮納(嘉納)下賜, 球(公・Ito)の元々(遠来)の苦労を多いとおっしゃって, 手ずからデフン(大勳) グムチォックデスザング(金尺大綬章)を授与して, その晩大官定(大観亭)でヒャングチァンを下げた”と, Itoの公式電気の <伊藤博文前>(伊藤博文伝)(春畝公追頌会便, 原書房)に見える.


が位なら高宗も伊藤と親近が積もったと信じたことではないか.

そうしてわずか 1年半ほど経って, 戦争も終わって今度にも ‘慰問特使’で来たから前日の言辞と友好ムードを信じて, 一言したら, ‘誰のため息でも付いているのか分かるのか’で出たのだ.

 ‘イナオリ強盗’の典型をこの時のItoから見る.

‘お互いに安危存亡(安危存亡)を一緒にして’だとしたことがいつなのに. ‘イナオリ強盗’の不意打ちの前に誰でもオックザングが崩れて, ギガ産卵さ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はずだ.

 相手が強大国との戦争で勝った国の最高権力者で見れば. 実はこのすべての版がゾソンタングを軍事占領している日本手の平で開かれていることに高宗がもう一度目覚めざるを得なかったはずだ.

 

 軍事力による国権強奪版が基本だったことだ.
 

道徳的低能児Ito
 
もう一つ見逃すことができないことは, この時Itoの対応にブダブ(不答)の恐喝が同時にあったという事実だ.

 高宗は以前二度にかけて会った時までは触れなかったし, その間 “臣僚(臣僚)は勿論, 宗親にさえイブテだなかったこと”を, 今度は何番(回)の出会いが作り上げた親近ムードを信じたのか引き出したのだ.

高宗がどうして夢寐にでも明成皇后問題を忘れることができたのか. 

当時韓国政府は事件を大院君と王宮警備(経費)訓練台の所作で駆って, 三人の人の訓練台士官(士官)を暗殺者で処刑した.

当時の 親日政府が日本側に手練された のだ.

高宗は日が変わってロシア公使館で身を避けるやいなや, 事件真相調査から指示した.

事件の真相を半年も行かなく高宗は把握した.

そしてMiura公使を含めた日本暴徒たちが貴族作為も回復して, 懲罰されなかったのみならず, 日本社会が英雄視するということも分かったはずだ.


日本側は背後をMiuraで切ったが, 高宗は信じなかったはずだ.

内謁県席の目の前にある当時の日本内閣総理大臣Itoは基本的, 道義的責任から脱することができない者なので何か一言すると期待したはずだ.

その席で高宗は “…考えがここに及べばあまりにも悔しくて口惜しく怨めしくて悔しいこと言い尽くせない.”とまでいったのだ.

‘慰問特使’ 伊藤は慰労と謝りどころか, 一挙に ‘イナオリ強盗’の姿勢にうって変わったのだ.

 ‘暗殺問題’の挙論にはブダブであるまま, ‘イナオリ強盗’で言葉を受けることで, 恐喝メニューに一挙に ‘暗殺’をあげる状態をItoは高宗を相手に作り上げたのだ.


Itoの道徳不感症に 大海はもう一つついておくのがある.

1990年代に翻訳されて韓国でも話題を起こしたスノ−だ厚謝して(角田房子)の力作 <明成皇后(閔妃)暗殺>の終り部分に次のような句節がある.

“明成皇后の流体横にいた日本人の中に, 同胞である私としては使いにくい行為があったことが報告されている.

私は法制局(法制局) 参事官で, 当時朝鮮政府の内部(内部・内務省) 顧問官だったイシズカエイゾ(石塚英蔵)が法制局長官スエマスゲンチォ(末松謙澄)に送った見て中に ‘まことにこれを筆で移すことたまらないが …’と前提して, その行為を具体的に書いておいた.”
何をもっと指摘することができようか. 何人かの日本人たちの中でこの仕業をしたなんて, これは近代化したとほらを吹いたがあの時の日本人たちが人間未達の人種なのを現わすこと以外に何でもない.

日本はその根深い野獣的蛮性を西洋人にだけ隠そうとばたついてから結局亡びたのだ.


朝鮮の国母(国母)に向けたこの凌蔑を王政は消えても朝鮮の人たちは 1000年がたっても忘れることができないだろう. それは韓民族(韓民族) 全体の象徴に加えた凌蔑だからだ.


が仕事をここに使うことは, 右に出ても報告書を受けたスエマスはItoの壻として, Ito情報人脈の核心的存在だったという事実のためだ.(佐佐木 隆, <伊藤博文の 情報戦略>, 中公新書) スエマスが責任引き受けた法制局と言う(のは)日本近代化作業衣善導機関でもあった.


そうするので  惨殺された皇后に加えられた日本人たちの凌蔑が絶対に分からないことができないItoが高宗が皇后の話引き出すから, ‘イナオリ強盗’の姿勢を取って出たということ,

これは何を話すか. 明治の一番文官Itoの国権強奪者としての有能性と道徳的低能牙城を同時に知らせてくれるのだ.

 

 近代日本が敗亡で終わるしかない理由が圧縮してItoの中にあるのではないか.

 

 

  ............中略................

 

原文を見る

이나오리 강도 이토 히로부미

이토와의 첫 만남에서 을미사변( 명성왕후 암살) 거론 못한 고종
 
첫 번째는 이토가 세 번째 내각을 끝내고, 2개월여의 장기 중국여행을 가는 길에 2주간 한국에 체류했을 때였다.

1898년 8월 말에서 9월 초에 걸쳐서다. 이때 그는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부인한테 띄운 편지에 “황제 및 정부 인민으로부터 생각 밖으로 친절한 대우여서 꿈 같은 심지(心地)였다”고 썼다.(伊藤博文傳)


‘생각 밖으로 친절한 대우’가 무슨 말인가. 민후암살(閔后暗殺)은 불과 2년 전, 이토의 총리 재직 때였고, 암살을 지휘 결행했던 한국주재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의 임명권자는 이토였던 것이다.

미우라가 군사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조처해준 것도 이또 총리였다. (金文子, <朝鮮王妃殺害와 日本人>, 高文硏) 일본은 암살에 가담했던 폭도 48명을 면직된 미우라(三浦)와 함께, 히로시마(廣島) 지방법원에 데려다가 재판했으나, 증거 불충분이라고 면소(免訴)처분, 모두 방면해 버렸다.
총리 재임 중에 일어났고, 석연치 않게 뒤처리된 이 암살 사건을, 한국에 오면서, 그리고 지아비 고종황제를 만나면서 이토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에 고종은 이 문제를 입이 올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생각 밖으로 친절한 대우’는 이래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이토가 두 번째로 고종과 만나는 분위기를 본다.
일·러전쟁의 선전포고는 1904년 2월 10일이었다.

개전하자마자 일본은 한양부터 점령하고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한국땅을 수용하여 군사기지로 하고 한국사람을 군수인부로 동원하는 등 한국을 일본의 전쟁체제에 끌어넣기 위한 것이었다. 엄청난 침략행위였다.
의정서에는 한국 황실과의 친의(親誼)를 가꿀 것, 그리고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하는 조문이 있다. 이 바탕 위에서 이토는 한국에 ‘황제 위문특사’로 3월 중순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개전과 함께 고종의 총신(寵臣) 이용익 등 러시아와 가까웠던 요인들이 대거 몰려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고, 일본군의 군사작전에 따른 민중의 불만이 높아지자, 일본정부는 최고의 문민카드 이토를 서울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이때에 이토는 10개조에 걸쳐, 고종황제 앞에서, ‘동양평화’유지, 서양문명 수용과 개혁의 원칙, ‘침략적인 서양인’ 러시아 배제 등을 강의하듯 늘어놓았다.

 이 속에는 “한국황제가 우리 일본과 존망을 함께하고, 동양평화의 유지 방책에 협동한다면 … 오래 한국의 산하를 폭진(暴秦-러시아)의 장중에 떨어지지 않게, 마치 일본 자체의 존망과 같이하여…서로 안위존망(安危存亡)을 함께하고… ”라는 문구도 보인다.
“한황(韓皇)은 이를 가납(嘉納)하사, 공(公·이토)의 원래(遠來)의 노고를 많다 하시고, 손수 대훈(大勳)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을 수여하시고, 그날 밤 대관정(大觀亭)에서 향찬을 내리셨다”고, 이토의 공식전기인 <이등박문전>(伊藤博文傳)(春畝公追頌會편, 原書房)에 보인다.


이 정도면 고종도 이또와 친근이 쌓였다고 믿었을 것 아닌가.

그러고서 불과 1년 반쯤 지나, 전쟁도 끝나고 이번에도 ‘위문특사’로 왔기에 전날의 언사와 우호무드를 믿고, 한마디 했더니, ‘누구 때문에 숨이라도 붙어 있는지 아느냐’로 나온 것이다.

 ‘이나오리 강도’의 전형을 이때의 이토에게서 본다.

‘서로 안위존망(安危存亡)을 함께하고’라 한 게 언제인데. ‘이나오리 강도’의 기습 앞에 누구든 억장이 무너지고, 기가 산란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상대가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이긴 나라의 최고권력자이고 보면. 실은 이 모든 판이 조선땅을 군사점령하고 있는 일본 손바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에 고종이 다시 한번 눈 뜨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군사력에 의한 국권 강탈판이 기본이었던 것이다.
 

도덕적 저능아 이토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때 이토의 대응에 부답(不答)의 공갈이 동시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종은 그전 두 번에 걸쳐 만났을 때까지는 건드리지 않았고, 그동안 “신료(臣僚)는 물론, 종친에조차 입떼지 않았던 것”을, 이번에는 몇 번의 만남이 만들어 낸 친근무드를 믿었던지 끄집어 냈던 것이다.

고종이 어찌 몽매에라도 명성황후 문제를 잊을 수 있었겠는가. 

당시 한국정부는 사건을 대원군과 왕궁경비 훈련대의 소행으로 몰아, 세 사람의 훈련대 사관(士官)을 암살자로 처형했다.

당시의 친일정부가 일본측에 농간당한 것이다.

고종은 해가 바뀌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자마자, 사건진상조사부터 지시했다.

사건의 진상을 반년도 안가 고종은 파악했다.

그리고 미우라 공사를 비롯한 일본 폭도들이 귀족 작위도 회복하고, 징벌되지 않았을 뿐더러, 일본사회가 영웅시한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일본 측은 배후를 미우라에서 끊었지만, 고종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내알현 자리의 눈앞에 있는 당시의 일본 내각총리대신 이토는 원천적, 도의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이므로 뭔가 한마디 할 거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고종은 “…생각이 이에 미치면 너무도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하기 그지없다.”고까지 했던 것이다.

‘위문특사’ 이또는 위로와 사과는커녕, 일거에 ‘이나오리 강도’의 자세로 돌변한 것이다.

 ‘암살 문제’의 거론에는 부답인 채, ‘이나오리 강도’로 말을 받음으로써, 공갈메뉴에 일거에 ‘암살’을 올리는 형국을 이토는 고종을 상대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토의 도덕불감증에 대해서는 하나 더 짚어 둘 것이 있다.

1990년대에 번역되어 한국에서도 화제를 일으켰던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의 역작 <민비(閔妃)암살>의 끝 부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민비의 유체 옆에 있었던 일본인 중에, 동포인 나로서는 쓰기가 어려운 행위가 있었던 것이 보고되어 있다.

전 법제국(法制局) 참사관으로, 당시 조선정부의 내부(內部·내무부) 고문관이었던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가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겐초(末松謙澄)에게 보낸 보고서 속에 ‘참으로 이것을 붓으로 옮기기 견딜 수 없지만 …’이라 전제하고서,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써 놓았다.”
뭘 더 적시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명의 일본인들 속에서 이 짓을 했다니, 이는 근대화했다고 떠벌렸지만 그때의 일본인들이 인간 미달의 인종임을 나타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일본은 그 뿌리 깊은 야수적 야만성을 서양사람들한테만 감추려고 발버둥치다가 결국 망한 것이다.


조선의 국모(國母)를 향한 이 능멸을 왕정은 없어졌어도 조선사람들은 1000년이 가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한민족(韓民族) 전체의 상징에 가한 능멸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여기 쓰는 것은, 위에서 든 보고서를 받은 스에마쓰는 이토의 사위로서, 이토 정보인맥의 핵심적 존재였다는 사실 때문이다.(佐佐木 隆, <伊藤博文의 情報戰略>, 中公新書) 스에마쓰가 책임 맡았던 법제국이란 일본 근대화 작업의 선도기관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참살당한 황후에 가해진 일본인들의 능멸을 절대로 모를 수 없는 이토가 고종이 황후 얘기 끄집어내니까, ‘이나오리 강도’의 자세를 취하고 나왔다는 것,

이건 뭘 얘기하는가. 메이지의 제일 문관 이토의 국권강탈자로서의 유능성과 도덕적 저능아성을 동시에 알려주는 것이다.

 

 근대일본이 패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압축해서 이토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

 

 

  ............중략................

 

いいね・コメントにはログインが必要です。

コメント ( 4 )

投稿一覧

2,317,356 / 2,811,753

  1. 閲覧数 : 304
    JA 255 f671
  2. 閲覧数 : 62
    KO 255 pcam2580
  3. KO 255 Miji89
  4. 2317344 test 2
    閲覧数 : 49
    JA 0 linxcat
  5. 閲覧数 : 119
    JA 0 runthc
  6. 閲覧数 : 85
    KO 255 gimozzionani
  7. KO 255 pcam2580
  8. JA 255 NEO99
  9. KO 255 pcam2580
  10. KO 255 Miji89
  11. JA 0 paly
  12. 2317353 伊藤博文 6
    閲覧数 : 231
    JA 255 Member_50305
  13. JA 0 Member_51229
  14. JA 100 mxpbh
  15. 閲覧数 : 72
    KO 255 zoskek
  16. 閲覧数 : 114
    KO 255 zoskek
  17. JA 0 illwill(malice)
  18. JA 0 Member_51229
  19. 閲覧数 : 120
    JA 255 Member_5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