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글] 남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 하면서 신경쓰는 것은.
남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 하면서 신경쓰는 것은 그 만큼 자신의 진실을 드러낼 횟수와 기회를 점차 줄이는 것이라 하겠다. 아래는 일본의 위대한 대철학자 무묘앙에오가 작성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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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야기-인간이 식물을 키우는 진짜 이유
언제나처럼 원숭이는 장자에게 자기 자랑을 하고 있었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지겹게 떠들어댄 다음 원숭이는 히죽 웃으면서 장자를 한번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 장자에게 굉장하다든가 재미있다는 말 한 마디라도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 드디어 장자가 입을 열었다. "평소 나는 그저 앉은 채로 하루를 보내도 전혀 따분하지도 않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는데 너무나 심한 네 시시한 이야기 때문에 오랜만에 따분함이라는 것을 맛보았다. 고맙다 원숭아." 그말을 들은 원숭이는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굳어진 얼굴을 풀지 않자 장자는 말했다. "무엇 때문에 화내고 있는 거냐? 난 네 이야기가 시시하다라고 말했지 네가 시시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네 이야기가 유치하다고 말했을 뿐 네 자신이 나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유치하다는 것이지 네가 유치하다고 말하지 않았단 말이다. 그런데 넌 왜 화를 내는 거냐? 그렇게 일일이 무언가 말하거나 또 무언가를 할 때마다 너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재미있는 원숭이라고 생각되길 바라거나 시시한 녀석으로 보이지 말아야지 나쁘게 보이지 말아야지 따위에 신경쓰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거니? 그렇다면 넌 정말 불쌍한 녀석이구나." 이말을 들은 원숭이는 장자의 말을 이해하는 듯했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삐죽거리고 말았다.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단다. 어떤 원숭이가 매일같이 아주 소중하게 나무 화분을 안고 다녔다. 날씨가 흐려지면 화분을 들고 다니면서 다른 원숭이에게 "식물을 사랑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야" 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그때 내가 그 원숭이를 보고 있었다. 원숭이가 보리를 빻을 때마다 보릿가루가 날리는 바람에 나뭇잎이 굉장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언제쯤이면 그 사실을 알아차리까 싶어 3개월을 기다리며 지켜봤지만 원숭이는 끝내 그 사실을 깨닫지 못
했다. 드디어 나무가 시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그 사실을 원숭이에게 알렸다. 다음날부터 원숭이는 바람이 안 부는 곳에서 보리를 빻게 되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어느날 원숭이를 지켜보고 있자니 가까운 산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를 나무에게 주고 있었다. 그 산의 물은 암염이 많아 식물의 성장에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물은 빗물을 받는 것이 좋다고 알려주자 원숭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 내가 나무를 가꾸는 방법에 불만이라도 있어? 하지만 이건 내 나무야." 난 원숭이에게 말했다. "봐라, 이 산에는 작은 풀은 돋아도 나무가 없잖느냐. 가까운 연못에는 물고기도 없어. 이 부근의 물은 좋지 않기 때문이란 말이다." 이후 원숭이는 강물이나 빗물을 받아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양지에 화분을 놓아두고 있는 원숭이를 3개월동안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서 이젠 원숭이가 귀를 기울일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고 말을 건넸다. "자연의 빛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축복을 주고 있단다. 날씨가 흐린 날은 왜 밖에 내놓으려 하지 않지? 풀은 흐린 하늘에도 불평하지 않는단다. 맑은 날도 흐린 날도 비가 와도 풀과 나무는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 날씨가 좋거나 나쁘다고 차별하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다. 흐린 날에는 흐린 날대로 맑은 날에는 없는 흐린 하늘 나름대로의 부드러운 빛이 있단다. 때문에 맑은 날 태양아래 무리하게 화분을 내놓는 것은 사람들이 제멋대로 생각한 배려란다. 게다가 사람들은 날씨가 좋은 날에도 물을 주는데 자연 속에 있는 풀뿌리는 맑은 날에 자연으로부터 물을 받는 일이 없어. 자연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물은 비오는 날이나 개인 날에 주는 것이 좋단다." 이말을 들은 원숭이가 화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원숭이는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뭐니뭐니 해도 빛이 제일이야. 게다가 당신은 이 나무의 주인도 아니잖아. 쓸데없는 참견하지마. 난 남에게 설교하는 것은 좋아
하지만 설교받는 것은 좋아하질 않는다고." 난 말했다. "길가에서 어린애가 넘어지면 그 애의 부모가 누구든 간에 난 달려가 안아 일으킨단다. 네게도 그와 같은 행동을 했을 뿐이야. 부모로부터 우리 애에게 쓸데없는 짓 하지마란 말을 들어도 난 개의치 않고 어린애를 일으켜 세워. 그런 여유로 나는 이 가엾은 식물을 안아 일으키는 거란다." 남에게 말 듣는 걸 싫어하는 원숭이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 원숭이에게 다시 말하기 위해 항상 2개월 이상의 시간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무가 거의 숨 넘어가기 일보 직전까지. 어느날의 일이다. 꽤 자란 그 나무가 나에게 말했다. "나, 배고파요." 그래서 나는 낙엽을 모으고 근처에 떨어진 까마귀의 알껍질을 모아 나무에게 주었다. 원숭이는 "누구야, 이런 짓을 하는 자식이..." 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나무에게 결코 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나에게 화내러 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너무 물을 많이 주어 뿌리가 썩기 시작했다. 난 원숭이가 없는 틈을 타, 받침접시에 고인 물을 혀끝으로 맛보았다. 그 물에서는 뿌리가 썩었을 때의 맛이 났다. 그래서 살짝 접시에 고인 물을 비웠다. 원숭이는 그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만두지 못해. 이건 내 꺼야. 내가 사서 키우고 내가 사랑하는 거야." 난 말했다. "그래, 그건 자네꺼야. 그러나 그 생명은 자네가 만든 게 아니야. 자네는 빛을 찾아 화분을 안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다른 일에는 눈곱만큼도 마음을 쓰지 않잖아. 풀을 사랑한다는 것은 흙속에 있는 징그러운 벌레들, 땅 속의 시체, 오물에도 경의를 표하고, 맑은 날이나 흐린 날에도 경의를 표하며, 눈에 안 보이는 뿌리를 키우기 위해 물과 흙도 한께 사랑하며, 자연으로부터 주어지는 건 무엇 하나 싫고 좋고를 가려서는 안 된단다. 빛이나 물뿐이 아니라 모든 것이 나무의 성장을 돕고 있어. 나무가 하늘에 닿기 위해선 지옥까지 뿌리내릴 필요가 있는 것처럼 커지면 큰 화분에 옮겨 심어야 하지 않니.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자연 속에서 나무의
성장을 돕는 것들이야. 때문에 무엇 하나 사람의 약아빠진 짓에 의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놔둘 일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연 안에서 죽으려 하지 않는 풀은 한 포기도 없다는 진실이다. 자연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연은 그 절반이 죽는 것으로 지탱되고 있다. 시드는 것을 거부하는 꽃은 하나도 없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연은 풀과 꽃 천지가 되고 또 벌레투성이가 되고, 세계는 그것을 잡아먹으려는 새들로 가득 차고 말 거야. 죽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과 똑같이 중요한 것이란다. 요컨대 대지로부터 무언가를 잘라내어 키우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야. 꽃을 보고 싶으면 산으로 찾아가면 돼. 우리에게는 자신의 감상을 위해서건 취미를 위해서건 아무리 미미한 풀 한 포기라도 자연으로부터 잘라낼 자격이 없다. 따라서 원래부터 꽃장수도 분재장수도 멍청한 놈들이다. 애당초 그것은 사람이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무언가를 빼앗으면 결국 자네처럼 억지로 자연과 가까워지기 위해 마음 고생을 하게 돼 있어. 물과 흙과 바람에 대한 배려와 고생이 끊이질 않는단 말이다. 원래대로라면, 풀은 혼자 자라고 혼자 죽어간다. 그것이 식물에게는 가장 큰 행복이다. 본시 사랑하는 행위는 쓸모없는 것, 즉 쓸데없는 일을 하지 말 일이다." 이 말을 들은 원숭이는 더욱 더 화를 내며, "그렇다면 네 맘대로 키워봐." 하며 나를 향해 화분을 내팽개쳤다. 그의 소중했을게 분명한 화분, 사랑하고 있을게 분명한 그 화분을 말이다. 그러고 보면 원숭이는 나무를 사랑했던게 아니라 나무를 사랑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다른 원숭이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원숭이는 자신의 마음에 물을 주고 자신의 마음에 남의 칭찬이라는 빛을 쪼이고 싶었던 것이다. 원숭이가 내팽개친 화분을 받아든 나는 풀과 이야기하며 풀의 마음을 들
어주었다. 나는 풀을 화분에서 꺼내 구덩이를 파고 땅 속에 묻었다. 그 풀이 죽었는지 또는 잘 자랐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다. 그것은 애당초 우리가 알 바가 아닌 것이다.. 이제 잘 알아들었나?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장자의 조삼모사의 진의다. 좋다든가 나쁘다, 즐겁다든가 시시하다는, 모두 물건을 나누어 갈라놓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치우침이다. 잠깐 저울을
생각해보자. 밸런스를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무리하게 중도를 보전하려는 자는 항상 저울 양쪽에 있는 접시의 무게에 신경이 쓰여 걱정이 끊이질 않는다. 저울의 양쪽에 있는 접시는 사람들의 좋다 나쁘다, 예쁘다 더럽다, 즐겁다 괴롭다, 그리고 살고 죽는 두 가지 기준을 나타낸다. 자연 안에서 본래 하나인 생과 사를 둘로 나누는 것은 인간의, 그리고 너희들 원숭이의 사고법이다. 원래부터 하나인 것을 둘로 나누어놓고는 그것을 또다시 하나로 통합하려 하는 짓이야말로 사서 고생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두개의 접시는 아무리 기울어도 괜잖다. 불행투성이에 행복 제로라도 괜잖다. 행,불행 등의 구분은 두개의 접시 이름, 즉 라벨일 뿐이다. 당신은 저울이 아무리 흔들리고 기울어져도 결코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면 된다. 아무리 기울여도 결코 기울어지지 않는 장소에 살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부동의 점에 그저 있으면 된다.그것이 붓다들이 말한 중도다. 그것은 저울의 축, 한가운데다. 잘 알아들었니? 원숭아, 사람아, 이 유인원아? 따라서 잠자코 정숙하게 살며, 한껏 바보가 되어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잊은채 그저 존재하며 음미하는 것이 선의 즐거움이다. 무엇이든 구하는 자는 본질을 놓치고, 말하는 것은 본질을 모르며, 실제 이 세상은 안 것조차 없으며, 그저 존재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이말을 들은 원숭이는 어리둥절해서 자기 자랑을 잊어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