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가야금 노래 춤에 의한 연출 형태가 많았는데 무애무
元曉大師가 불교 포교를 위해 호리병을 들고 다니며 춤을 추었다는 무애무 (無舞)
憲康王때 處容 說話에서 유래한 處容舞
憲康王이 慶州 포석정에 행차하였을 때 남산의 神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霜髥舞 등
이 시대에 이르러 독자적인 춤의 이름과 구체적인 구성을 가진 춤이 등장함으로써 춤의
영역이 점차 전문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1.300년전 신라 가야금
新羅琴이라고도 한다
또한 국선이 중심이 되어 天靈名山大川과 龍神을 섬기던 八關會가 본격적으로 행하여지기 시작 하였으므로
八關會와 관련된 巫覡儀式의 춤과 百戱歌舞도 이 시대의 중요한 춤 문화로 등장하였다
또한 백성들 사이에 연행된 집단젇 기예도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 악지에 의하면
신라의 무용수들은 放角峰頭 紫大袖 公襴紅정 鍍金腰帶 烏皮靴를 착용하였다고 쓰고 있는데
이 중에 紫大袖를 착용하는 것은 백제 무용수와 같고 烏皮靴를 신었던 것은 고구려 무용수와 같다

신라 여인 토용 7세기 후반
당시 복식을 추측할 수 있다
한편 807년 애장왕 때 연출된 여러가지 춤의 복식은 위에 설명한 무용수 복식과 다른 것이 있다
즉 思內琴舞의 무용수는 靑衣
가야금 연주자는 赤衣
노래 부르는 歌尺은 琴尺에 繡扇을 들고 彩衣에 錦鏤帶를 매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시대에 주목되는 것은 崔致遠의 鄕樂雜詠의 5首이다
이 詩는 향악이라고 불리던 5개의 춤
즉 金丸 月顚 大面 束毒 狻猊를 詩의 소재로 삼은 것으로 춤의 형태와 내용에 관한 기록이 있다
金丸은 고구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공을 던지는 기예의 일종으로 본다
大面은 황금 색의 탈을 쓰고 추는 춤
束毒은 남색의 탈을 쓰고 추는 춤
月顚은 난장이 무리가 음악에 맞추어 희극적인 몸짓으로 演戱하는 놀이다
이 중에 狻猊는 사자의 탈을 쓰고 추는 춤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이와같은 演戱 내용은 백제인 味摩之가 일본에 전해 주었다는 伎樂舞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船遊樂
己丑年 進饌圖屛의 일부
신라시대 부터 있었다고 전하는데 조선 후기에 창작되었다
1795년 圓幸乙卯整理儀軌에 전하는 船遊樂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여러가지 무늬의 배를 설치하고 여러 기녀들이 나누어 배(船)가 떠나는 모습을 한다 닻줄을 끌면서 船을
둘러서서 춤을 춘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때 부터 있었다고 한다
신라시대 百戱歌舞중에 四仙樂府에 龍 鳳 馬 車 船이 있었는데 船이 船遊樂과 관련되었다고 한다
處容舞

1848戊申進饌圖屛
오른쪽 위 處容舞가 공연되고 있다
處容舞
高麗史節要 등 기록으로 處容舞는 무용수 1인이 공연했던 것으로 알 수 있었는데
조선 世宗(재위 1418년~1450년)때에 이르러 무용수는 5인으로 늘었다
樂學軌範 (1493년 왕명에 따라 제작된 악전으로 한문 한글로 제작되었다 )에 의하면
處容舞는 음력 섣달 그믐날 묵은해의 疫神과 악귀를 쫓기 위해 행하는 儺禮의식에서 2회에 걸쳐
춤을 추었다고 한다
5명의 무용수는 가가 西 東 北 南 중앙 五方을 상징하는 白 靑 黑 紅 黃 5색의 옷을 입었다
處容舞는 음양오행설에 근거하여 악운을 쫓는 의미가 있다
춤의 형식
處容舞는 壽齊天(하늘만큼 영원한 생명)음악에 맞추어 왕을 향해 나간다
新羅盛代昭盛代(밝고 번성한 시대 신라)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첫 首를 言樂이라는 서정적인
가락에 맞추는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왕에게 인사한 후에
鄕唐交奏(향악과 당악을 번갈아 연주하는 음악)에 맞추어 무대 중앙으로 나간다
細靈山의 느린 가락에 맞추어 정방형을 이루며
散作花舞(꽃의 형태로 흩어진다)를 추고 오른쪽으로 돈다 십자형으로 대열이 바뀌면 3개 현악기로
연주하는 느린 음악 삼현 도드리로 변경된다
垂揚手舞(팔을 들어 올려 흔들며 추는 춤)와 무릎을 움직여 방향을 바꾸는 춤을 마치고
5인의 무용수는 배열을 원형으로 바꾸고 왼쪽으로 돈다
다시 한번 일렬로 대열을 바꾸고 무용수들은
山河千里國(멀고 먼 산 또는 평야)으로 시작하는 處容歌다시 가곡 羽編가락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 후
頌九如之曲(도드리의 일종)에 맞추어
落花流水(떨어지는 꽃잎과 흐르는 물)을 추며 무대에서 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