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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타케시마의 뉴스 ;;;;;;;;;; 혹시 mayuchan 님이 저의 메일 친구일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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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분류: 자유주제 KO 0 yonsanin 4,566
혹시 mayuchan 님이 저의 메일 친구일지 모르지만 사실에 대해서만 잘쓰여진 내용이 있어서 올려드립니다. 시네마현이나 일본이 주장하는 내용과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 1. 고대의 독도 아직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독도는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않았던 섬으로 추정되며, 거리상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울릉도에서 사람들이 왕래하였을 것으로 얘기되고있다. 자, 그렇다면 이 시간여행을 위해서는 울릉도에서 언제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는가 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울릉도에서 언제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느냐 하는 물음을 시원스레 풀어줄 역사적 자료가 빈약한 형편이지만, 남아있는 유물들로 짐작해보자. 현재 울릉도 에서 찾아낸 유물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갈색무늬토기(승문토기)라고한다. 이 시기는 기원후 약300년무렵(서양 : 로마시대, 우리나라 :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인데, 경상남도 바닷가에서 발견되는 "김해토기"와 같은 종류라고 한다. 이외에도 신라토기들이 주로 발견되는 점을 미루어, 울릉도는 신라와 많은 교류가 있었으며, 주민들도 신라 동해안에서 건너온 사람들로 짐작되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맑은날이면 울릉도에서 독도가 뚜렷히 보인다. 울릉도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독도의 존재를 앞서 인식했을 것이며, 울릉도와 주변해역에서 고기를 잡았던 우산국 사람들이 그들의 생활 구역으로 아주 먼 옛날부터 독도와 더불어 사는 방법을 터득했음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즉, 독도가 우리겨레의 생활터전으로 함께 하게된 시기는 울릉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라고 짐작되는 기원후 1세기 전후가 될 것이라 고려되고 있다. 2. 삼국시대 우리겨레의 문헌에서는 언제부터 독도가 기록되어 있는가?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1145년)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조와 [열전] 이사부조 에 오늘날 우리가 독도로 인정하는 우산도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이 자료들에 의하면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라는 두개의 섬이 우산국이라는 하나의 독립국을 형성하고 있다. "신라 지증왕13년(512년)에 이슬라주 군주로 이찬 벼슬에 있는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정복하게 하였으며, 이사부 등 신라의 군사들은 우산국 사람들의 위세를 목우사자(나무로 만든 사자 인형)를 이용하여 꺽음으로서 결국 우산국 사람들로부터 항복받기에 이르렀다." 이로서 울릉도,우산도(독도)는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 후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으며, 신라가 망한 뒤에는 고려에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3. 고려/조선 시대 지증왕때의 우산국 복속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오기까지 우산국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고려 첫임금인 태조13년(930)년에 백길과 태두라는 울릉도 사람이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사) 현종9년(1018)에 동북 여진족 해적들의 노략질로 우산국의 농업이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접하여 뭍으로 도망나온 섬주민들에게 농기구를 나누어었으며 계속해서 해적들의 침입이 끊이질 않아 현종13년(1019)에는 본토로 도망나온 우산국 민호를 지금의 경상도 영해지방에 살도록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계속되는 동북여진 해적들의 침입으로 하나 둘 섬을 떠나면서 거의 빈섬이 되다시피 했다고한다. 하지만 고려조정에서는 우산국의 관리방법으로 "공도정책(섬을 비우게 함)"을 채택한 것은 아니었다. 의종11년(1157)의 고려사 기록은 왕이 동해 중에 울릉도 가 있는데, 이곳의 땅이 기름지며 주현을 설치할때도 있었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 감창전중내급사 "김유립"으로 하여금 조사토록 함. 김유립이 복명하기를 암석이 많아 백성들을 사민하기에 적합지 않다고 함에 사민 계획을 중지함 이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울릉도에 다시 사민계획을 세운것은 명종27년(1197)에 "최충헌이 울릉도의 토양이 비옥하여 진귀한 나무와 해산물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사민시켰는데 풍랑으로 배가 전복되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자 민호를 다시 돌아오게함 " 이라는 기록에서 발견되고있다.(증보문헌비고, 여지지) 이처럼 해적들의 침입과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자연환경등의 이유로 독도생활권인 울릉도는 거의 빈섬이 되다시피 했다. 조선에 들어와 태종7년(1407)에 "대마도수호 종정무가 동해 중 무릉도(울릉도)에 저들의 마을을 옳겨 살게해 달라고 간청함에 조의를 거쳐 거절"(태종실록)을 계기로 울릉도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때 울릉도 옆의 작은 섬에 대한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태종실록) 세종7년(1425년)에 울릉도를 공도화하기위해(태종때부터 공도정책이 실시됨) 김인우를 파견했을 때 관직명이 "우산.무릉등처안무사"이었음을 볼때 공도정책의 대상으로 우산도(독도)를 포함시켰음을 알수 있다. 또한 공도 정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432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울진 현조>의 기록 "우산과 무릉 이 두섬이 울진현 정동의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이 거리가 멀지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 를 통해 독도에 대한 조선시대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중종26년(1531)에 출간된 신증 동국여지승람과 이 책에 덧붙여진 팔도총도(우리나라에서 인쇄본으로 간행한 가장 오래된 조선전도. 우산도(독도) 가 울릉도의 안쪽에 그려져 있다-상단 우측그림 참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러 문헌상의 기록과 사람들의 기억속에 흐려질때 쯤 우산도(독도)가 다시 새롭게 재기된것이 17세기말 일본과의 최초의 영유권 분쟁때였다. 조선 숙종때 2차례에 걸친 일본 본토내에서의 안용복의 활약으로 울릉도, 독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은 일본측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의 문서를 보내옴으로서 일단락 되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 후 1868년에 일본의 막부체계가 무너지고 메이지 정권이 들어설때까지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일본의 막부세력은 1854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기 시작하여 영국, 러시아 등 외국열강과 수교를 맺어나갔지만 이러한 개항의 과정이 왕의 허락없이 진행되자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반막부세력에 반발에 부딪혀 결국 1868년 막부체계는 붕괴되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신생 메이지 정부는 일본을 번벌 연합국가 체계에서 중앙집권체계로 전환하는 한편 막부 말기의 양산된 무사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조선에 대해 "정한론"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긴장 관계를 형성함으로서 외환을 통해 내환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를 세워나갔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1876년에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때부터 일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울릉도에 들어와 고기잡이와 마구잡이로 나무를 베어 갔다. 이무렵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영토임을 인정"하는 특별한 결정을 하였다. 1876년에 일본 내무성은 일본 전국의 지적을 조사하고 지도를 편제하기 위해 각현에 조사를 지시했다. 이때 시네마현은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츠시마(독도)를 그들의 현에 포함시킬것인가 아닐것인가에 대해 내무성에 질문하였다. 이에 내무성은 17세기말의 조선과의 관계서류를 검토한 후, "일본은 관계가 없다"라 고 잠정결정을 내린뒤 태정관(총리대신)에게 최종확인을 부탁하였다. 이때 태정관은 "죽도(울릉도)외 1도는 우리나라와 관계없음을 명심할 것" 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처럼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던 일본은 점차적으로 제국주의적 만행을 저지르며 왜곡된 영토인식을 심화시켜 나가게된다. 이러한 시기에 조선조정은 1881년 울릉도에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과 마찰이 발생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일본에 항의하는한편, 이규원을 울릉도 감찰사로 임명하여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조선 태종이래 400년동안 실시해온 공도정책을 폐지하고 1883년 4월에 54명을 울릉도에 들여 보냈다. 조선조정이 울릉도 일대에 대해 적극적인 정책들을 펼쳤지만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경제.정치 침탈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조선의 현실에 편승해 일본사람들의 불법침입과 산림벌체는 날로 더해갔다. 1899년 10월의 울릉도 조사단의 조사를 바탕으로 일본인의 불법 침입과 산림도벌의 심각함을 깨달은 조정은 1900년 10월에[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을 공포하여 대책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군청의 위치와 관할 범위를 명시한 2조이다. 군청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석도를 관할할 사부분이다. 여기에서 석도는 독도를 얘기하며, 죽도는 울릉도 바로 옆의 죽서도를 의미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4. 근대/현대 시대 1903년 2대 심홍택군수가 취임할 무렵 울릉도에는 일본인이 63호나 살고 있었고, 일본정부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도동에 주재소까지 설치하는 침략성을 보였다. 1904년 8월에 일본정부는 대한제국 정부를 강요해 "한일협정서"를 성립시켰으며, 이 협정서에 의해 정부의 주요 부서에 일본인 재정 고문관과 외국인 외교고문관을 두어 식민지 정벌의 절차를 밟아 나갔다. 이 무렵 러일전쟁중인 일본해군은 러시아 해군을 정찰할 목적으로 1904년 8월에 울릉도에 망루를 설치했으며 1905년에는 독도에도 망루를 쌓았다. 1905년에 일본은 독도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조치를 취하기에 이른다. 일본시마네현의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어업사업가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도에서 강치등 어로의 독점권을 얻기위해 일본정부에 교섭을 해줄 것을 농상공부에 요청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일본해군성"은 그로 하여금 " 대한제국 정부에 빌려달라고 요청할 것이 아니라 일본정부에 독도를 편입하고 빌려줄것을 요청"하게 하였다. 이에 나카이는 "량고 도(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하고 자신에게 빌려줄것을 요청하는 청원서" 를 일본정부에 제출하였으며, 이에 일본정부는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북위 37도9분30초, 동경1백31도55분, 오키도와의 거리가 서북쪽으로 85리에 달하는 지점의 섬을 죽도(다케시마)라 부르고, 지금부터 본현 소속의 오키도사의 소관으로 한다." -메이지 38년 2월 22일. 시마네현 지사 송영무길- 그 뒤, 1년 후인 1906년 3월 28일에 시마네현의 사무관을 통해 일본은 서면이 아닌 구두로 울릉군 군수 심흥택에게 알렸다. 이때 대한제국은 일본인 통감이 통치하는 상황이었다. 이 사실을 심흥택군수로 부터 보고 받은 대한제국 정부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조처"라고 반발했지만, 외교권이 박탈당한 상황속에서는 그 어떠한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하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독도는 1943년 12월1일 성립된 카이로선언의 내용(한국 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해 적절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서 만들것을 결의한다. 일본이 탈취했거나 점령한 모든 태평양 섬들은 일본으로부터 박탈한다) 에 따라 독도의 원상회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1952년에 4월에 발효된 패전국 일본을 상대로 한 대일강화조약 (센프란시스코조약) 에서 SCAPIN 677호에서 명시적으로 표기되었던 독도가 센스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빠졌다는 이유를 들어 독도가 한국영토로부터 제외된다는 논리을 펼치고 있다. 1948년 8월 15일에 남측만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정부는 독도에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1번지를 부여하는 행정조치를 취하였다. 이 즈음 독도에 참으로 어이없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1948년 6월 8일 미 B29 폭격기들이 독도주변에 조업중인 우리 어선들을 오인하고 폭격을 했던 것이다. 이때 독도는 미공군의 폭격연습지였다고 한다. 참으로 어이없고 비통한 일이다. 1953년 4월, 한국전쟁으로 인해 독도해역에 대한 경비가 소홀할 때 "홍순칠"대장을 비롯한 33명의 "독도의용수비대원" 들은 1956년 12월에 경북경찰청 소속 독도경비대에 수비권을 넘길때까지 3년 8개월동안 50여회의 전투를 치르며 독도를 사수하였다. 그 뒤, 1965년에 최종덕 옹께서 독도의 서도에 집을 지으며 살기 시작 했던 것을 시작으로 1987년에는 조준기씨 일가와 송재욱씨가 1991년에는 김성도씨가 부인 김신렬씨와 함께 주민등록증을 독도에 옮기며 살았다 1989년에는 푸른독도가꾸기 모임이 결성되어 독도가 국제섬으로 인정받기 위해(나무,물,사람이 있어야 한다) 매년 독도에 나무를 심어왔다. 그런 정성으로 1994년 현재 1500여그루의 나무가 독도의 모진환경을이기며 자라고 있다. 한편 KBS 독도 다큐멘타리 제작팀은 지난 1992년 3월부터 1993년 4월까지 1년간 독도에 거주하며 많은 귀중한 독도생태계 자료들을 비디오에 담아, "독도 365일" 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독도는 1982년 환경부가 "독도 해조류 번식지"를 천연기념물 33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1995년에는 "생태계보호대상지"로 지정되었다. 아울러 1997년 8월 울릉도 도동 약수공원에 독도의 수많은 자료를 전시하는 "독도 박물관"이 개관되었으며, 1997년 11월에는 "독도접안시설"이 준공되어 독도를 경비하는 독도경비대원들과 독도를 찾는 많은 국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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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竹島のニュース ;;;;;;;;;; もし mayuchan 様が私のメール友達かも知れないが

もし mayuchan 様が私のメール友達かも知れないが事実に対してだけザルスになった内容があってあげます. シネマ県や日本が主張する内容と比べて見てください. ====================================================================== 1. 古代の独島 まだ確かに明かされたところはないが独島は長い間人が住まなかった島に推定されて, 距離(通り)上独島で一番近くの鬱陵島で人々が往き来したことに話されている. さあ, それならこの時間旅行のためには鬱陵島でいつから人が住んでいたのかから調べる必要がある. 鬱陵島でいつから人が住んでいたかする問いを爽やかに解いてくれる歴史的資料が貧弱な都合だが, 残っている遺物たちに見当をつけて見よう. 現在鬱陵島で捜し出した遺物中に一番古いのが茶色柄土器(僧門土器)ラゴする. この時期は紀元後約300ニョンムリョブ(西洋 : ローマ時代, 我が国の : 高句麗.百済.新羅の三国時代)なのに, 慶尚南道海辺で発見される ”金海土器”のような種類と言う. 以外にも新羅土器たちが主に発見される点を延ばして, 鬱陵島は新羅と多くの交流があったし, 住民たちも新羅東海岸から渡って来た人々に見当がついている. 今もところが晴れた日なら鬱陵島で独島が明らかに見える. 鬱陵島人々が目に見える独島の存在を先立って認識したはずであり, 鬱陵島と周辺海域で魚を捕った 于山国人々が彼らの生活区域でとても遠い昔から独島と合せて暮す方法を悟ったのは当たり前の帰結であるでしょう. すなわち, 独島が私たち同胞の生活基盤に一緒にするようになった時期は鬱陵島に人が住み始めた時と見当がつく紀元後 1世紀前後になるはずだから考慮されている. 2. 三国時代 私たち同胞の文献ではいつから独島が記録されているか? 高麗時代金腐食が編纂した(1145年) 三国史記の [新羅本紀] ジズングワング 13ニョンゾと [熱戦] 引っ越し浮き彫りに 今日私たちが独島で認める傘島に対する記録が載せられている. この資料たちによれば鬱陵島と傘も(独島)という二つの島が于山国という一つの独立国を形成している. ¥"新羅ジズングワング13年(512年)にイスルラズ君主でイチァン官職にある引っ越し部にとって于山国を征腹するようにしたし, 引っ越し部など新羅の軍事たちは于山国人々の威勢を牧牛獅子(木で作った獅子人形)を利用して折ることで 結局于山国人々から降参受けるのに至った.¥" これとして鬱陵島,傘も(独島)は国史の一部分に入って来るようになったし, その後于山国は新羅に 毎年物産を捧げたし, 新羅が滅びた後には高麗に物産を捧げたという記録が伝わる. 3. 高麗/朝鮮時代 ジズングワングテの于山国服属以後高麗時代に入って来るまで于山国に対する記録は発見されていない. 高麗最初賃金である太祖13年(930)年にバックギルと泰斗という鬱陵島人が物産を捧げたという記録が見える. (高麗史) 燎宗9年(1018)に東北搖り返し族海賊たちの盗みで于山国の農業が被害を被ったという消息を接して 陸でドマングナオン島民たちに農機具をナヌオオッウであり続いて海賊たちの侵入が絶えなくて 燎宗13年(1019)には本土でドマングナオン于山国民戸を今の慶尚道領海地方に住むように基盤を用意してくれたと言う. このように続く東北になった海賊たちの侵入で一つ二つ島を発ちながらほとんどビンソムになったようにしたと言う. しかし高麗調整では于山国の管理方法で ”公道政策(島を留守にするようにする)”を採択したことではなかった. ウィゾング11年(1157)の高麗史記録は王が東海の中に鬱陵島行っているのに, こちらの地が油っこくてチュ・ヒョンを設置する時も あったという話を聞いて明紬も疳瘡伝重内急死 ”ギムユリブ”にとっての調査するようにする. ギムユリブが復命するのを岩石が多くて 民たちを士民するのに適合誌ないと言うに士民計画を中止するという内容が込められている. 鬱陵島にまた士民計画を立てたことは明宗27年(1197)に ¥"崔忠・が鬱陵島の土壌が肥えて珍しい木と 海産物が多いという消息を聞いて士民させたが風浪でお腹が転覆して多くの人々が犠牲されると民戸をまた帰って来るようにする ¥" という 記録で発見されている.(増補文献費で, であられるの) このように海賊たちの侵入と人が住むには相応しくない自然環境等の理由で独島生活圏である鬱陵島はほとんどビンソムになったようにした. 朝鮮に入って来て太宗7年(1407)に ¥"対馬島守護宗正無価東海の中で武陵も(鬱陵島)に彼らの村をオルギョ暮すようにしてくれと懇請するに 弔意を経って拒絶¥"(太宗実録)をきっかけで鬱陵島にまた関心を持つようになったし, この時鬱陵島の隣の小さな島に対する存在を認識していた.(太宗実録) 世宗7年(1425年)に鬱陵島を公道化するために(太宗時から公道政策が実施される) キム・インウを派遣した時官職人が ”傘.武陵など先按撫使”だったのを見る時 公道政策の対象で傘も(独島)を含ませたことを分かる. また公道政策が盛んに進行の中だった 1432年に編纂された <世宗実録地理志江原道蔚珍玄祖>の記録 ¥"傘と武陵この二島が蔚珍県正東の海の中あるのに, 二つの島が距離が遠くなくて天気が晴れれば眺めることができる.¥" を通じて独島に対する朝鮮時代記録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る. この外にも中宗26年(1531)に出刊された信証東国輿地勝覧とこの本に付け加えられた8道総図(我が国で印刷本に刊行した一番古い朝鮮前も. 傘も(独島) 街鬱陵島の内側に描かれている-上端右側絵参照)でも確認することができる. 多くの文献上の記録と人々の記憶の中に曇る時くらい傘も(独島)がまた新しく再起されたのが 17世紀末日本との最初の領有権紛争時だった. 朝鮮肅宗時 2回にわたった日本本土内での安竜福の活躍で鬱陵島, 独島を取り囲んだ領土紛争は日本側が過ちを認めて謝りの文書を送ることで 一切りついた. このような事が発生した後 1868年に日本の幕府体系が崩れて明治政権の立ち入るまで日本は鬱陵島と独島が朝鮮の領土だというのに 異意を申し立てなかった. 日本の幕府勢力は 1854年アメリカと通商條約を結び始めてイギリス, ロシアなど外国列強と修交を結んで行ったがこのような開港の過程が王の許諾なしに 進行されると王政復古を主張する反幕府勢力に反発にぶつかって結局 1868年幕府体系は崩壊されて明治政府が立ち入るようになった. 新生明治政府は日本をボンボル連合国家体系で中央集権体系で切り替える一方幕府末期の生じた武士を效率的に処理するために朝鮮に対して ”鼎韓論”の雰囲気を造成するなど緊張関係を形成することで外為を通じて内患をあらかじめ防止しようとする意図を立てて行った. このような分委拘束で 1876年に ”韓日守護条約”が締結されたしこの時から日本の人々が本格的に鬱陵島に入って来て漁夫とくそみそに木を切って行った. 李頃日本は ”鬱陵島と独島が日本領土なのを認定”する特別な決定をした. 1876年に日本内務省は日本全国の指摘を調査して指導を編制するために各県に調査を指示した. この時シネマ県は竹島(鬱陵島)とMatsushima(独島)を彼らの現に含ませようかないだろうのかに対して内務省に質問した. ここに内務省は 17世紀末の朝鮮との関係書類を検討した後, ¥"日本は関係がない¥"だとその暫定決定を下げた後大政官(総理大臣)に最終確認を頼んだ. この時大政官は ¥"竹刀(鬱陵島)外 1度は我が国と関係ないことを肝に銘ずること¥" という決断を出した. このように独島を朝鮮の領土で認識していた日本は漸次的に帝国主義的蛮行をやらかして歪曲された領土認識を深化させて行くようになる. このような時期に朝鮮調整は 1881年鬱陵島で日本人たちが朝鮮人たちと摩擦が発生しているという報告を受けて日本にハングウィハヌンハンピョン, 李堰怨を鬱陵島監察司で 任命して状況を報告するようにしたし, これをきっかけで朝鮮太宗と言う 400年間実施して来た公道政策を廃止して 1883年 4月に 54人を鬱陵島に入れた. 朝鮮調整が鬱陵島一帯に対して積極的な政策たちを広げたが日清戦争に勝利した日本の経済.政治侵奪をまともに対応することができない朝鮮の現実に便乗して 日本の人々の不法侵入とサンリムボルチェはますますつのった. 1899年 10月の鬱陵島調査団の調査を土台で日本人の不法侵入と山林盗伐の深刻さを悟った調整は 1900年 10月に[鬱陵島を鬱陶で改称して 図鑑を軍需で改正したのは]を公布して対策を用意しようとした. ここで注目する部分は郡庁の位置と管轄範囲を明示した 2兆だ. 郡庁位置は台霞洞で決めて, 区域は鬱陵前途と竹刀,石刀を管轄するサブブンだ. ここで石刀は独島を話して, 竹刀は鬱陵島すぐ側のズックソドを意味することで解釈している. 4. 近代/現代時代 1903年 2台シムホングテックグンスが就任する頃鬱陵島には日本人が 63号も住んでいたし, 日本政府はこれらを保護するという役目でドドングに駐在所まで設置する 侵略性を見せた. 1904年 8月に日本政府は大韓帝国政府を強要して ”韓日協定で”を成立させたし, この協定書によって政府の主要部署に日本人財政顧問官と 外国人外交顧問官を置いて植民地征伐の手続きを踏んで行った. この頃露日戦争中の日本海軍はロシア海軍を偵察する目的に 1904年 8月に鬱陵島に望桜を設置したし 1905年には独島にも望桜を積んだ. 1905年に日本は独島を彼らの領土で ¥"編入¥"させる措置を取るのに至る. 日本島根県のNakai邪曲部にという漁業事業家が大韓民国政府から独島であしか等語への独占権を得るために日本政府に交渉をしてくれることを 農商勉強に要請したが, この消息を接した ”日本海軍星”はそれにとって ¥" 大韓帝国政府に貸してくれて要請するのではなく 日本政府に独島を編入して貸してくれることを要請¥"するようにした. ここにNakaiは ¥"リャングゴ度(独島)を日本領土に編入して自分に貸してくれることを要請する請願書¥" を 日本政府に提出したし, ここに日本政府は 1905年 2月 22日島根県考試第40号として次のように発表した. ¥"北緯 37度9分30秒, 東京1百31度55分, Oki島との距離が西北方へ 85里に達する地点の島を竹刀(竹島)だと呼んで, 今から本県所属のOki道士の所管にする.¥" -明治 38年 2月 22日. 島根県知事ソングヤングムギル- その後, 1年後の 1906年 3月 28日に島根県の事務官を通じて日本は書面ではない靴で鬱陵邑軍需シムフングテックに知らせた. この時大韓帝国は日本人痛感が統治する状況だった. この事実をシムフングテックグンスから報告を受けた大韓帝国政府は ¥"何らの根拠がない取り計い¥"と反撥したが, 外交権が剥奪された状況の中ではそのどんなまともにできた対応もできなかった. 1945年解放とともに独島は 1943年 12月1日成立されたカイロ宣言の内容(韓国国民の奴隷状態に留意して適切な時期と手続きを経って韓国を自由で 独立された国として作ることを決意する. 日本が奪取したとか占領したすべての太平洋島々は日本から剥奪する) によって独島の原状回復が成り立つようになった. しかし日本は 1952年に 4月に発效した敗戦国日本を相手にした対日強化条約 (センプランシスコゾヤック) で SCAPIN 677号で明示上に表記した独島がセンスプランシスコ条約で抜けたという理由を聞いて独島が韓国領土から除かれるという ノンリウル広げている. 1948年 8月 15日に南側だけの大韓民国政府が樹立されたし, これと同時に政府は独島に慶尚北道鬱陵邑南面ドドング 1番地を付与する行政措置を取った. この頃独島にまことにあっけない惨事が発生した. 1948年 6月 8日米 B29 爆撃機たちが独島周辺に操業中の私たち漁船たちを見誤って爆撃をしたのだ. この時独島は米空軍の爆撃演習誌だったと言う. まことにあっけなくて悲痛な事だ. 1953年 4月, 朝鮮戦争によって独島海域に対する警備(経費)が疎かな時 ”ホングスンチル”大将を含めた 33名医 ”独島義勇守備隊員” たちは 1956年 12月に慶北警察庁 所属独島警備隊に守備圏を越すまで 3年 8ヶ月の間 50余回の戦闘を支払って独島を射手こんにちはだった. その後, 1965年にチェ・ジョンドク翁が独島の書道に家を建てながら暮し始めたことを始まりに 1987年には照準期さん一家とソングゼウックシが 1991年には金成都さんが 奥さんギムシンリョルシとともに住民登録証を独島に移しながら暮した 1989年にはプルンドックドがクギの集まりが結成されて独島が国際島と認められるため(木,水,人がいなければならない) 毎年独島に木を植えて来た. そんな真心で 1994年現在 1500余本の木が独島のモジンファンギョングウルイギであり育っている. 一方 KBS 独島ドキュメンタリー製作チームは去る 1992年 3月から 1993年 4月まで 1年間独島に居住して多くの貴重な独島生態系資料たちをビデオに収めて, ”独島 365日” というプログラムを放送したりした. また独島は 1982年環境府が ”独島海藻繁殖地”を天然記念物 336号に指定されて保存しているし, 1995年には ”生態系保護台上肢”に指定された. 同時に 1997年 8月鬱陵島ドドング薬水公園に独島の幾多の資料を展示する ”独島博物館”が開館されたし, 1997年 11月には ”独島接岸施設”が竣工されて 独島を驚備する独島警備(経費)隊員たちと独島を尋ねる多くの国民に便宜を提供するように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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