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건너뛰기

KJCLUB 한일 문화교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종군위안부의 증거가 발견된

조회수 : 858
JA 255 pinknohat 1,817,411 / 2,811,753

이렇게는 송곳과!

■한국이 취급한 위안부야말로 진짜「성 노예」

「자신의 일은 제쳐놓는 평소의 녀석("A`) 」


한국군은북한의 딸(아가씨)를 강제 연행하고, 한국군의 종군위안부겸 가정부로서 혹사했다것이다.
거기에강제적으로도 사기적으로도 위안부를 모았다고하고, 증거 사진도 게재되고 있다.
동민족이라고 하면서적아군으로의 강간이나 략탈.
거기서 피해를 당한 여성이,많이 위안부로서 합류하며 갔다고 한다.
그 일부가”위안부”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국제 조약이라든지 대변이라든지 관계 없습니다.
한국 군인은이것들 위안부에게 취사나 세탁·가사, 까지 시키고 있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적으로 전쟁이 끝나고 보면,한국 전쟁전의 사창수약 5만이, 전후에는 30만명에 증가하고 있었다, 라고 분명하게 이야기의 앞뒤가 맞는 것입니다.


한국 전쟁시의 한국군에게 위안부 제도가 있던 것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국제 심포지엄 일본 대회에서 밝혀졌다.
발표한 것은 한국·경남 대학의금귀옥객원 교수.
김씨는 한국의 육군 본부가 1956년에 편찬 한 공문서에
「고정식 위안소-특수 위안대」
의 기술을 찾아내 4개소,89명의 위안부가 52년의 1년에만20만 4560회
의 위안
을 실시했다고 적는 특수 위안대 실적 통계표가 첨부 되고 있었다고 한다.
(일인당 2303회/년이군요.365일 환산으로1 닛뻬의 성교가 6.3회.굉장하다("A`) .)
http://japanese.joins.com/article/article.php?aid=24331&servcode=400§code=400
(중앙 일보)

오 마이 뉴스 2002-02-26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67635


한국군 "특수 위안대"는 사실상의 공창?하아?
[창간 2주년 기념 발굴 특종] 한국군도 "위안부"운용했다 ②

기자가 충남 논산의
육군 제 2 훈련소에 입소한 1980년 당시까지 해도
논산 훈련소 울타리를 넘으면 이른바 "모포 부대"에 맞을 수 있었다.

당시 , 훈련병이었던 기자가
"모포 부대"를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훈련소 조교나 기간병들은,
스스로가 "모포 부대"와 조우해 "격전"를 실시한 "무용담"를 잘 이야기하거나 했다.

"모포 부대"는 훈련소 울타리의 밖에서
모포 한 장을 "무기"로 하고, 훈련병들을 대립되는 창녀들의 속칭.
이런 이동식 사창 형태의 모포 부대원 이야기는, 미담이나 신화와 같이 들리거나 했다.
그러나 군이 직접 위안 부대를 설치해 운용하면 문제가 바뀐다.

▲한국군의 한국 전쟁 기간 "위안부"운용 사실을
보도한 일본 <아사히 신문 > 2월 24 날짜 기사.

지난 2월 22일 에 "한국군도 위안부 운용한"라고 말한다
발굴 기사의 첫회분이 보도된 이후, 독자적인 반응은 크게 3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제일, 군의관 어두운 치부를 공개해 반성하자고 하는 것.
제2, 구일본 군대 위안부 제도와는 다른 공창이므로 불법은 아니라고 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공창에서도 사창이라도 군이 전시에, 사기 고양을 위해서 위안부를 이용했던 것이 무엇이 잘못일까하고 말한다.

이 2회분기사는,
주로 그 두번째 반응과 직결된 대답을 번창하고 있다.

이 발굴 기획 기사의 첫회분에 잘 본 것처럼,
한국군이 1951년경부터 1954년까지 "특수 위안대"라는 이름으로,
고정식 혹은 이동식 위안부 제도를 도입해 운용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 사실은 육군 본부가
1956년에 편찬 한 공식 기록인 <후방 전사)
>(인사의 분)와 목격자들의 증언에 뒷받침 된다.

<후방 전사>에 쌓아진 "특수 위안대 실적 통계표"
(은)는 1952년도에 4우대로 편성된 위안대 89사람이
연간 20만 4560명의 병력을 "위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안부 1명이 하루 평균 6~7인의 장병을 위안 했던 것이다.
또 최 명신·치규혼·김피오 등,
예비역 장군들도 한국 전쟁 기간에 경험한 위안부 제도에 대해서
"나타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군부의 치부이지만 사실이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물론, 한국군 위안부 제도는
구일본군 "종군위안부"제도를 흉내자취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제도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국군 위안부는,
위안부 동원 방식이나 규모등에서도
구일본군종군위안부라고 비교가 되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후자는 강제성을 띠고 있는 국가 동원 체제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고 하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그 같은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위안대는 설치 동기나 운영 방식면에서
일본군종군위안부 제도를 흉내는 비슷한 모습을 한 것 또 사실이다.

말하자면 위안소의 전으로 열을 이루고 위안부를 기다리는 군인들과
전투력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성병 검진을 하는 군의관의 모습 등은
일본군종군 위안소의 풍경과 다른 곳(중) 않은것이다.

또 군표(일본군) 대신에 티켓(한국군)같은
대가가 지불해 된 거래 형식에 운용된 점도 외형상을 닮아 있는 모습이다.
일본 우익은 이것을 세우고, 여분의 위안소 제도를 일종의 공창제와 같은 일로 정당화 하거나 한다.

그러나 군표는 일본의 주요 은행이 언제라도 돈으로 주고 받아 주는 일종의 "유가증권"였다.

또 공창제가 국가가 여성의 성을 통제했을 경우라면, 위안소의 경우는 전시 전시라고 하는 상황으로,
국가 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군이 관리·운영의 주체라고 하는 점으로 피해 여성들에 대한다
인권염린은 더 극심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


한국군 "특수 위안대"는 사실상의 공창


그런데 주목하는 사실은 당시 국군이 설치해 운영했다
이 "특수 위안대", 즉 고정식 위안소의 성격이 사실상의 공창이었다고 하는 점이다.

말하자면 군의관 공식 기록에는 "휴전에 의해서 이러한 시설의 설치 목적이 해소되기에 이르고,
공창 폐지의 조류에 순명 해 단기 4287년 3월 이것을 일제히 폐쇄했다"
(<후방 전사 > 148~149페이지) 괴로워서 있다.

여분의 스스로가 "특수 위안대"를 공창으로 인정하고 있다.

단기(단기)를 서기(서기)로 환산하면, 위안소를 "일제히 폐쇄"일시점은 1954년 3월이다.

그런데 1947년 11월 11일, 미군 정청이 공포한 공창 폐지령(법률 제 7호)의 발효 한 시점은 1948년 2월부터다.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위안소 설치 시점은 1951해에 추정된다.

따라서 군은 공창 폐지령에도 불구하고 1951년부터 1954년까지 약 3년간 불법으로
공창을 설치·운영한 범법 행위를 제멋대로하게 했다
것이다.

결국군이
"공창 폐지의 조류에 순명 해 위안소를 폐쇄한"라고 하는 기록은, 문득 보면 사실같지만 실제에서는
자신의 범법 행위를 은폐 하기 위해서 사실을 교묘하게 왜곡했던 것이다.

군은 정부의 공창 폐지령에도 불구하고, 사실상의 공창을 3년간이나 불법으로 운영했지만
"공창 폐지의 조류에 순명 해 폐쇄"한 것과 같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전쟁 당시 , 여분의 위안소를 설치·운영하는 범법 행위의 주체는 누구일까.
이것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기록이나 증언을 찾을 수 없다.
단지 한국군의 "위안대"운용 사실을 처음으로 제기한 김그옥크 박사(경남 오키타 조선 전문대 학원객원교수)는
<후방 전사>와 예비역 장군들의 회고록 그리고 관련자의 증언등을 토대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특수 위안대", 즉 여분의 위안소는 육군에 의해서 설치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당시 , 한국군의 작전 체계상 여분의 위안대의 설치 및 관리 문제에 대해서상으로는
국제 연합군의 최종 승인아래에 운영되었던 것에 추정되고, 아래에서는 특수 위안대 부대장의 책임아래에 총괄된 것이라고 보인다."


국제 연합군의 최종 승인아래에 운영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추정은 1950년 7월 한국 정부가 륙·해·공군의
작전 지휘권을 국제 연합군 총사령관에게 위임했던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후방 전사>도 분명히 하고 있도록(듯이), 위안소 운영은 전선이 아닌 후방에 한정하고 있었다.
또 위안대 제멋대로 설치는 작전 지휘권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국제 연합군의 최종 승인아래에 운영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추정은 설득력이 뒤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시 국방성과 육군의 수뇌부는 이러한 불법 행위의 책임으로 자유롭지 않는 것 같다
(국방성에 합동 참모 회의의 설치된 시점은 "특수 위안대"를 폐쇄하는 것 불과 1월전의
1954년 2월이므로, 합동 참모는 위안부 설치·운영의 계 선상으로부터 제외해진다).



▲ 조_·이르그전 육참총장.
한국 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제도를 흉내
"특수 위안대"를 군에 설치한 불법 행위의 핵심 책임자중의 한 명에 추정된다.


위안소를 설치·운영한 시점의 역대 육참총장은
△5대 조_·이르그 중장(1950. 6~1951. 6)
△6대 이종찬 중장(1951. 6~1952. 7)
△7대 박크손요브 대장(1952. 7~1954. 2)
△8대 조_·이르그 대장(1954. 2~1956. 6) 등이다.

원문보기

従軍慰安婦の証拠がみつかった

こんなにはっきりと!

■韓国が扱った慰安婦こそ本当の「性奴隷」

「自分の事は棚に上げるいつものヤツ("A`) 」


韓国軍は北朝鮮の娘を強制連行して、韓国軍の従軍慰安婦兼女中としてこき使ったのだ。
それに強制的にも詐欺的にも慰安婦を集めたそうで、証拠写真も掲載されている。
同民族と言いながら敵味方での強姦や略奪。
そこで被害にあった女性が、多く慰安婦として合流していったという。
その一部が”慰安婦”に編入されたと言う。
これが本当なら国際条約とか糞とか関係ありません。
韓国軍人はこれら慰安婦に炊事や洗濯・家事、までさせていたという。
で、その結果として戦争が終わってみれば、朝鮮戦争前の私娼数約5万が、戦後には30万人に増えていた、と、ちゃんと話の辻褄が合うわけです。


朝鮮戦争時の韓国軍に慰安婦制度があったことが、
「東アジアの平和と人権」国際シンポジウム日本大会で明らかにされた。
発表したのは韓国・慶南大の金貴玉客員教授。
金氏は韓国の陸軍本部が1956年に編纂した公文書に
「固定式慰安所―特殊慰安隊」
の記述を見つけ、4カ所、89人の慰安婦が52年の1年だけで20万4560回
の慰安
を行ったと記す特殊慰安隊実績統計表が付されていたという。
(一人当たり2303回/年ですね。365日換算で1日辺りの性交が6.3回。凄まじい("A`) 。)
http://japanese.joins.com/article/article.php?aid=24331&servcode=400§code=400
(中央日報)

オーマイニュース 2002-02-26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67635


韓国軍 "特殊慰安隊"は事実上の公娼?ハア?
[創刊 2周年記念発掘特種] 韓国軍も "慰安婦" 運用した ②

記者が忠南論山の
陸軍第2訓練所に入所した 1980年当時までにしても
論山訓練所垣根を越せばいわゆる "毛布部隊"にあえた。

当時、訓練兵だった記者が
"毛布部隊"を直接目撃したことではないが、訓練所助教や期間病たちは、
自分たちが "毛布部隊"と遭遇して "激戦"を行った "武勇談"をよく話したりした。

"毛布部隊"は訓練所垣根の外で
毛布一枚を "武器" にして、訓練兵たちを相対する娼婦たちの俗称。
こんな移動式私娼形態の毛布部隊員話は、美談や神話のように聞こえたりした。
しかし軍が直接慰安部隊を設置して運用したら問題が変わる。

▲韓国軍の朝鮮戦争期間 "慰安婦" 運用事実を
報道した日本 <朝日新聞> 2月24日付け記事.

去る 2月22日 に "韓国軍も慰安婦運用した"と言う
発掘記事の初回分が報道された以後、独自の反応は大きく三種類で分類することができる。

第一、軍医暗い恥部を公開して反省しようということ。
第二、旧 日本軍隊 慰安婦 制度とは違う公娼なので不法ではないということ。
そして終わりは、
公娼でも私娼でも軍が戦時に、士気高揚のために慰安婦を利用したのが何が過ちかと言うのだ。

この 2回分記事は、
主にその二番目反応と直結された返事を盛っている。

この発掘企画記事の初回分でよく見たように、
韓国軍が 1951年頃から 1954年まで "特殊慰安隊"という名前で、
固定式あるいは移動式慰安婦制度を取り入れて運用したのは否認することができない歴史的事実だ。

そんな事実は陸軍本部が
1956年に編纂した公式記録である <後方戦史)
>(あいさつの方)と目撃者たちの証言に裏付される。

<後方戦史>に積まれた "特殊慰安隊実績統計表"
は 1952年度に 4ヶ牛どおり編成された慰安隊 89人が
年間 20万4560人の兵力を "慰安"したと記録している。

慰安婦 1人が一日平均 6~7人の将兵を慰安したのだ。
またチェ名臣・チァギュホン・ギムフィオなど、
予備役将軍たちも朝鮮戦争期間に経験した慰安婦制度に対して
"現わしたくない恥ずかしい軍部の恥部だが事実だ"と証言している。

もちろん、韓国軍慰安婦制度は
句日本軍 "従軍慰安婦" 制度を真似った跡にもかかわらず二つの制度は本質的に違う。

韓国軍慰安婦は、
慰安婦動員方式や規模などでも
句日本軍従軍慰安婦と比較にならないが、なによりも
後者は強制性を帯びている国家動員体制の一環で施行されたという点が違う。

しかし、その同じ根本的な差にもかかわらず
韓国軍慰安隊は設置同期や運営方式面で
日本軍従軍慰安婦制度を真似って似ている姿をしたことまた事実だ。

言わば慰安所の前で列をなして慰安婦を待つ軍人たちと
戦闘力損失を防止するために定期的に性病検診をする軍医の姿などは
日本軍従軍慰安所の風景と違うところないのだ。

また軍票(日本軍) 大臣にチケット(韓国軍) みたいな
対価が支払いされた取り引き形式に運用された点も外形上に似ている姿だ。
日本右翼はこれを立てて、余分の慰安所制度を一種の公娼制のようなことで正当化したりする。

しかし軍票は日本の主要銀行がいつでもお金で取り交わしてくれる一種の "有価証券"だった。

また公娼制が国家が女性の性を統制した場合なら、慰安所の場合は戦時展示という状況で、
国家よりもっと力強い力を発揮する軍が管理・運営の主体という点で被害女性たちに対する
人権染躪はもっと極甚になるしかなかった。


韓国軍 "特殊慰安隊"は事実上の公娼


ところで注目する事実は当時国軍が設置して運営した
この "特殊慰安隊"、すなわち固定式慰安所の性格が事実上の公娼だったという点だ。

言わば軍医公式記録には "休戦によってこのような施設の設置目的が解消されるに至って、
公娼廃止の潮流に順命して檀紀 4287年 3月これを一斉に閉鎖した"
(<後方戦史> 148~149ページ)つらくてある。

余分の自らが "特殊慰安隊"を公娼と認めているのだ。

短期(檀紀)を西紀(西紀)に換算すれば、慰安所を "一斉に閉鎖"一時点は 1954年 3月だ。

ところで 1947年 11月11日、米軍政庁が公布した公娼廃止領(法律第7号)の発效した時点は 1948年 2月からだ。

明確な記録はないが、慰安所設置時点は 1951年に推定される。

したがって軍は公娼廃止領にもかかわらず 1951年から 1954年まで約 3年間不法で
公娼を設置・運営した犯法行為をほしいままにした
のだ。

結局軍が
"公娼廃止の潮流に順命して慰安所を閉鎖した"と言う記録は、ふと見れば事実のようだが実際では
自分の犯法行為を隠蔽するために事実を巧みに歪曲したのだ。

軍は政府の公娼廃止領にもかかわらず、事実上の公娼を 3年間も不法で運営したけれども
"公娼廃止の潮流に順命して閉鎖"したことのように記録しているからだ。

それなら朝鮮戦争当時、余分の慰安所を設置・運営する犯法行為の主体は誰だろう。
これに対してはまだ明確な記録や証言を捜すことができない。
ただ韓国軍の "慰安隊" 運用事実を初めて申し立てたギムグィオック博士(慶南大北朝鮮専門大学院客院教授)は
<後方戦史>と予備役将軍たちの回顧録そして関連者の証言などを土台でこんなに主張する。

""特殊慰安隊"、すなわち余分の慰安所は陸軍によって設置されたのは間違いない事実だ。

当時、韓国軍の作戦体系上余分の慰安隊の設置及び管理問題に対しての上では
国連軍の最終承認の下に運営されたことに推定されて、下では特殊慰安隊部隊長の責任の下に総括されたことと見える。"


国連軍の最終承認の下に運営されたはずだという推定は 1950年 7月韓国政府が陸・海・空軍の
作戦指揮圏を国連軍総司令官に委任したことに根拠を置いている。

しかし <後方戦史>も明らかにしているように、慰安所運営は電線ではない後方に限っていた。
また慰安隊のさばる作戦指揮圏の範疇に含まれないから国連軍の最終承認の下に運営されたはずだという推定は説得力が劣ったように見える。

しかし当時国防省と陸軍の首脳部はこのような不法行為の責任で自由ではないようだ
(国防省に合同参謀会議の設置された時点は "特殊慰安隊"を閉鎖することわずか一月前の
1954年 2月なので、合同参謀は慰安婦設置・運営の係線上から除かれる)。



▲ チョ_ン・イルグォン前陸軍参謀総長。
朝鮮戦争当時日本軍 "慰安婦" 制度を真似った
"特殊慰安隊"を軍に設置した不法行為の核心責任者中の一人に推定される。


慰安所を設置・運営した時点の歴代陸軍参謀総長は
△5代 チョ_ン・イルグォン中将(1950. 6~1951. 6)
△6代 李鍾賛中将(1951. 6~1952. 7)
△7代 バックソンヨブ大将(1952. 7~1954. 2)
△8代 チョ_ン・イルグォン大将(1954. 2~1956. 6) などだ。

좋아요·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

댓글 ( 0 )

게시물 목록

1,817,411 / 2,811,753

  1. KO 255 Member_60388
  2. 조회수 : 256
    JA 70 koreancat
  3. JA 255 Member_52549
  4. JA 220 Member_50543
  5. JA 255 ΩWeapon
  6. JA 255 yaong_2
  7. 조회수 : 659
    JA 255 hunikuri
  8. JA 255 koajisai
  9. 조회수 : 307
    JA 0 フキハラ
  10. JA 255 josuncorea
  11. 조회수 : 858
    JA 255 pinknohat
  12. JA 255 ihmai1
  13. 조회수 : 234
    KO 255 efgd
  14. 조회수 : 205
    JA 255 Member_52549
  15. 조회수 : 369
    JA 255 ΩWeapon
  16. JA 255 koajisai
  17. JA 255 朝鮮征服
  18. JA 255 peacebridge
  19. 조회수 : 594
    JA 255 yuuki0801
  20. JA 255 Member_52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