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을 넘어 하나로
가 볼 곳충남 논산 개태사만날 사람견훤, 궁예, 왕건주요 사건후삼국 통일후백제의 서울, 완산주 땅에 발을 디딘 왕건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삼한이 통일되었음을 선언하였다. "이제 나라를 어지럽힌 무리를 모두 무찔렀다. 백성들은 안심하고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하라."
■ 다시 맞서는 삼국
900년, 견훤은 호남 들판에서 백제의 깃발을 다시 들었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한 지 어느덧 200여 년이 지난 때였다. 이듬해에 궁예도 철원 땅에 터를 잡고 고구려 부활을 외쳤다. 신라 말부터 나타난 호족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며 서로 흩어지고 뭉친 끝에 이렇게 정리가 되었다. 그 무렵 신라는 경주 근처를 다스리며 간신히 나라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다시금 삼국이 맞서는 시대가 열렸다.
처음에는 후백제의 국력이 가장 돋보였다. 견훤이 신라 장수 출신이어서 군사력이 강한 데다가 평야 지대를 차지했기 때문에 경제력도 든든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과 외교 관계를 가장 먼저 맺었다. 견훤은 자주 신라를 공격하였으므로 신라인들은 후백제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궁예 또한 신라 왕족 출신으로 승려가 되었다가 차츰 세력을 키워 나갔다.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병사들과 생사를 함께하였고, 자신이 세상을 구하는 미륵불이라며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얼마 가지 않아 궁예는 후삼국 가운데 가장 넓은 지역을 거느리게 되었다.
견훤 산성(경북 상주)견훤(867~936)은 원래 상주에서 태어나 신라 장수로 활약하다가 서남해안 쪽으로 세력을 키워 전라도를 주름잡았다.
■ 왕건, 고려를 세우다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세력을 다투고 있을 때 왕건이라는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송악의 호족으로 궁예를 도와 충청도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으며, 바다를 통해 나주 지역을 차지하여 후백제의 턱밑을 위협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왕건은 36세에 최고 관직에 올랐다.
왕건의 성장에는 호족들의 뒷받침도 큰 힘이 되었다. 호족들은 같은 호족 출신인 왕건이 자신들의 처지를 잘 이해해 줄 것으로 믿고 많이 도와주었다. 벌써 세력을 키운 궁예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폭력적인 통치를 하였기 때문이다. 918년, 마침내 왕건은 호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궁예를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으며 후삼국 통일의 뜻을 밝혔다.
왕위에 오른 왕건은 호족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에게 높은 벼슬을 내려 주었으며, 호족들과 친척 관계를 맺거나 왕씨 성을 주는 방법으로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또한 거듭되는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던 민중에게 세금을 궁예 때 내던 것의 3분의 2로 줄여 주면서 민심을 자기편으로 돌리려고 애를 썼다.
개국사 석등고려는 국초부터 불교를 중심으로 고려 사람들이 뭉칠 수 있도록 절을 짓고 불교 행사를 자주 열었다.
현화사 7층탑개성 부근에는 유난히 7층탑이 많다. 일찍이 왕건이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만들어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나는 개경에 7층탑을 짓고 서경에 9층탑을 지어 삼한의 통일을 이룩하겠다."라고 하였기 때문일까?
■ 대결, 견훤과 왕건
후백제는 927년 무렵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견훤이 이끈 군대가 신라의 국경을 넘어 수도인 경주마저 점령하였으며, 이를 구원하러 온 고려의 대군을 공산(대구 근처)에서 크게 격파한 것이다. 왕건이 겨우 목숨을 구해 달아날 지경이었으니, 후백제의 승리는 완벽해 보였고 통일 전쟁의 주도권은 후백제에게 넘어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전쟁에서 진 고려도 만만치는 않았다. 왕건은 신라를 끌어안는 정책을 추구하는 한편, 호족들을 설득하여 고려의 편으로 돌려세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군대를 착실하게 준비하여, 고창(안동) 전투(930)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번에는 견훤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돌아갔다.
고려가 승세를 잡자 후백제 편에 서 있던 30여 성이 한꺼번에 고려 편으로 돌아섰다. 호족들은 앞을 다투어 고려에 충성을 약속하였다. 대결의 주도권은 이제 고려로 넘어갔다.
충주 미륵대원사지 석불경순왕이 개경으로 떠나던 순간, 태자는 삼베옷으로 갈아입고 길을 나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불상 중 유일하게 북쪽을 향한 이 불상은, 마의태자라고 불린 경순왕의 아들이 금강산 가는 길에 세웠다고 한다. 맞은편 골짜기에는 경순왕의 큰딸인 덕주 공주가 세웠다는 바위 부처가 있어서 서로 마주 보는 형국이다.
개태사의 석불 입상(충남 논산)왕건은 후백제를 무찌르고 후삼국을 통일한 기념으로 개태사를 세웠다. 그래서인지 부처의 모습이 태권도 선수같이 보인다.
■ 통일로 가는 길
935년, 천년 왕국 신라는 스스로 나라를 고려에 넘겼다. 신라 경순왕은 나라를 더는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많은 신하와 백성을 데리고 고려로 들어갔다. 후삼국 통일에 한 걸음 바짝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이보다 앞서, 후백제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견훤에게 왕위를 물려받지 못한 맏아들 신검이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왕 행세를 하였으며, 견훤이 고려로 탈출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견훤은 고려군의 선봉에 서서 자기가 애써 키운 나라를 무너뜨리려고 길을 나섰다. 일선군(경북 선산)에서 치러진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적 전투는 오래 가지 않았다. 싸울 뜻을 잃어버린 장수들이 서둘러 항복하고, 호족들도 왕건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마침내 왕건의 고려군은 후백제의 서울, 완산주에 이르렀다. 그러고 나서 왕건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삼한이 통일되었음을 선언하였다.(936) 아울러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여 스스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900
후백제 건국
901
후고구려 건국
918
고려 건국
927
공산 전투
930
고창 전투
935
신라 통합
936
후삼국 통일
| 고려의 후삼국 통일
호족들이 중앙에서 독립하면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후삼국 사이의 경쟁은 호족들의 지지를 더 많이 받는 쪽의 승리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 나도 역사가
[네이버 지식백과] 후삼국을 넘어 하나로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2012.4.9, 휴머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