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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血書를 쓰고 만주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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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趙甲濟) 기자가 관련자들을 쫓아다니면서 얻어낸 증언을 토대로 쓴 글입니다



http://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517&C_CC=AC



"박정희는 血書를 쓰고 滿軍에 갔다"연재5/교사의 길에서 군인의 길로

趙甲濟  



나는 박정희를 "교사, 군인, 혁명가"라고 표현한다. 이 세 가지 이력과 性格이 한 몸에 통합되어 있다. 그는 국민들을 군대식으로 가르치고 국가를 혁명적으로 改造한 사람이다. 그가 문경 산골의 국민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군인의 길로 가지 않았더라면 혁명가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1998년 서울 강남구에 살고 있던 유증선 할아버지는 나이가 87세였지만 상당히 또렷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박정희와 함께 교사 생활을 했던 분들 중에서는 유일한 생존자이다. 지금까지 박정희 선생에 대한 증언들은 거의 전부가 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자연히 과장과 오해, 그리고 미화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동료 교사 유증선의 증언은 객관적이고 좀더 정확할 것이다. 그의 증언을 요약해본다. 
  
  <내가 문경공립보통학교에 부임한 것은 1938년 4월 초로서 박정희 선생이 근무 중일 때였다. 나의 아내는 임신 중이라 친정으로 보내고 하숙집을 찾아야 했다. 그때 학교 숙직실은 박정희 선생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박 선생의 양해를 얻어서 한 방에서 同宿(동숙)했다. 당시 나는 50원의 월급을 받고 있었다. 생활비를 줄이려고 시작한 숙직실 생활은 아리마 교장이 개입하면서 중단되었다. 그는 점잖게 ‘숙직실은 숙직 교사들을 위한 것인데 두 분이 여기서 잠을 자면 곤란하지 않은가’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짐을 싸들고 하숙집을 구해서 내려갔다. 박 선생은 김순아 여인의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숙직실에서 가까이 지낼 때 박정희 선생은 도무지 말이 없었다. 그러나 할 말은 반드시 하는 사람이었다. 강직한 성품에서 나는 ‘이 사람은 군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바로 대쪽이었다. 남이 싫어하고 피하는 일도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거침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해치우는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이런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 신기했다. 한번은 운동장에서 나를 옆에 세워놓고 기계체조를 해 보였다. 그는 가볍게 철봉을 잡더니 ‘大車輪(대차륜)’을 하는 것이었다. 철봉에 매달려 몸을 쉬지 않고 휘휘 돌리는 것이었다. 꼭 철봉에 붙어 있는 것같이 자유자재였다. 공부벌레들만 있다고 하는 대구사범에서 저런 운동을 언제 배웠는지 놀랄 따름이었다. 
  
  박 선생은 교사들과는 비사교적이었지만 희한하게도 어린이들에게는 다정다감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코흘리개들과도 사근사근 이야기를 잘도 하는 것이었다. 보통 교사들이 제자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은 권위를 지키는 것이 교육상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 선생은 반대였다. 소풍을 가면 박 선생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이들과 어울려 웃고 노래 부르는 것이 꼭 어린아이 같았다>
  
  유증선 할아버지는 안동교육대학 국문학과 교수를 지낸 뒤 은퇴했다. 그는 박정희가 왜 만주군관학교에 갔느냐에 대해서 通說(통설)과는 다른 새로운 증언을 했다. 
  
  <1938년 5월경이라고 생각된다. 숙직실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솔직한 이야기를 서로 털어놓을 때였다. 박 선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아무래도 군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제 성격이 군인 기질인데 문제는 일본 육사에 가려니 나이가 많다는 점입니다. 만주군관학교는 덜 엄격하다고 하지만 역시 나이가 걸립니다.”
  
  박 선생은 호적상의 나이를 고치기 위한 방도를 이야기하면서 형 박상희에 대해서도 주섬주섬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존재에 비해서 형은 굉장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깔고 하는 말이었다. 
  
  “우리 형님은 지금 고향에서 면장을 하고 있소. 성격도 활달하시고, 저는 이렇게 작고 보잘 것이 없지만 형님은 체격이 크고 외모도 훤칠하시지요. 저는 형님을 존경합니다.”
  
  나는 박 선생에게 “그러면 그 형님의 도움을 받아서 호적을 고칠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박 선생은 며칠동안 고향에 다녀와서 나이를 고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한 살 낮추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으로 문제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신원조회를 하면 학교에 있는 박 선생의 기록과 호적이 서로 틀려 말썽이 생길 것 같았다. 나와 박 선생은 숙직실에서 밤새 고민했다. 우리가 연구한 것은 ‘어떻게 하면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이 환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취할 것인가’였다. 
  
  내가 문득 생각이 나서 “박 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했다. 그는 즉각 찬동했다.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학생 시험 용지를 펴더니 면도칼을 작은 손가락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설마 했는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것이었다. 박 선생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썼다. 그는 이것을 접어서 만주로 보냈다. 그때 편지가 만주까지 도착하는 데는 1주일쯤 걸릴 때였다. 한 보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 선생 이야기가 실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혈서가 신문에 보도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때 만주에 가 있던 대구사범 교련주임 아리카와 대좌가 도와줘서 그 혈서건이 신문에 났는지, 아니면 만주군관학교에서 신문에 자료를 제공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아리카와가 보낸 편지가 박 선생 앞으로 도착했다. 
  
  박 선생은 “아리카와 대좌가 그렇게 군인이 되고 싶으면 자기에게 한번 다녀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 며칠 뒤 박 선생은 만주에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 아리카와를 만난 모양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동양사》 등 몇 권의 책들을 들고 왔는데 “한번 시험을 쳐보라고 했으니 해볼 수밖에 없지”라고 했다. 
  
  그 직후에 우리는 교장의 지시로 숙직실을 떠나 하숙집으로 옮겼던 것이다. 박 선생은 아마도 교장한테 다시 양해를 얻어 숙직실로 돌아온 것 같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숙직실에도 나폴레옹 초상화를 걸어놓은 박 선생이다. 붉은 망토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말을 탄 나폴레옹이었다. 내 아들 柳浩文(유호문·전 건설부 산업입지국장)은 1939년에 문경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담임선생은 박 선생이었다. 이 해 가을에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시험을 쳤다. 박 선생이 일본인 교장과 싸우고 만주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싸운 일이 없다. 내가 1939년 봄에 한 3주간 일본시찰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면 몰라도. 나는 박 선생이 만주군관학교로 떠날 때쯤, 즉 1940년 봄에 영주로 전근을 갔다. 그 뒤에 소식을 들으니 박 선생이 만주군관학교를 거쳐서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에 긴 칼을 차고 문경에 들러 대환영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역시 가야 할 길을 갔구나’하고 생각했다. 5·16 혁명 직전에 그가 대구에서 2군 부사령관으로 있을 때 만났더니 그는 영어책을 읽고 있다가 불쑥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뭔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될 기운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고 말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박 선생을 만난 것은 그가 죽기 석 달 전이었다. 내 아들과 제자들도 함께 청와대로 초청하여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대통령은 나를 보고 “어. 대머리가 되셨네요”라고 말하여 좌중이 폭소를 터트렸다>
  
  
  박정희 선생이 혈서를 써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시험을 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는 동료 교사 유증선의 증언은 지금까지의 통설과 상반된다. 통설은 박정희가 교장과 싸우고 교사직을 그만둔 뒤 만주로 갔다는 것이다. 이런 통설은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많이 유포되었다. 이 통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박정희가 ‘독립운동을 할 힘을 기르기 위해서 滿軍(만주군) 장교가 되려고 했다’는 신화로 발전하기도 했다.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할 때 혈서說(설)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박정희는 대구사범 재학 때나 문경 교사 시절에 늘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워 가고 있었다. 교장과의 불화 때문에 충동적으로 군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집념의 실천이었다. 1962년에 당시 최고회의 의장 비서였던 이낙선 중령이 정리해둔 비망록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발견된다. 
  
  <원래 일본 육사는 연령초과였고 만주군관학교도 연령초과였으나 군인이 되고자 하는 일념에서 군관학교에 편지를 하였다. 그 편지가 만주 신문에 났다(이렇게 군관을 지원하는 애국 정신이 있다고…). 이 신문을 보고서 姜(강) 대위가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되었고 그와의 상면은 만주의 여관에서였다. 그로부터 강은 박의 引導人(인도인)이 되었고, 강은 당시 시험관이었다. 강-울산인>
  
  이낙선 중령이 당시 취재한 내용도 유증선의 증언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러면 신화는 어떻게 탄생했던가. 대구사범 동기생으로서 그때 문경과 가까운 상주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권상하(전 대통령 정보비서관)의 증언. 
  
  <1939년 10월 아니면 11월에 박정희가 보따리를 싸들고 나를 찾아 왔다. 머리를 길렀다고 질책하는 視學(시학·장학사) 및 교장과 싸운 뒤 사표를 던지고 나오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만주로 가서 대구사범 교련주임 시절에 자신을 총애해 주었던 아리카와 대좌를 만날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집에서 하룻밤을 잔 뒤 열차편으로 떠나는 정희를 전송했다>
  
  박정희는 권상하 이외에도 몇 사람들에게 비슷한 말을 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39년 10월에 만주군관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학교로 돌아와서 계속해서 근무하다가 다음해 3월에 만주로 떠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박정희가 아리마 교장을 패주었다느니 술상을 뒤엎었다느니 싸우고 갔다느니 하는 말들은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 더욱 이상한 것은 1976년 2월 17일 대통령 공보비서관 鮮于煉(선우연)이 작성하여 박 대통령의 결재까지 받아둔 ‘대통령 이력서’의 내용이다. 이 자료는 박 대통령이 읽고서 교정을 본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자료는 박정희가 만주로 떠난 동기에 대해서 ‘道(도) 장학사가 나이가 많은 아리마 교장에게 불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고 혐오를 느낀 것이 교사직 사임 원인의 하나이다’고 했다. 아리마 교장이 여기서는 동정의 대상으로 둔갑하고 있다. 박정희는 그러면 왜 이런 신화가 만들어질 소지가 있는 말을 했을까. 혹시 자신의 만주行(행)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스스로 꾸며낸 말이 아닐까. 박정희보다 네 살 위인 누님 박재희는 생전에 이런 증언을 남겼다. 
  
  “동생이 가끔 내 집에 와서는 ‘죽어도 선생질 더 못해 먹겠다’고 말하곤 했어요. 어느 날 밤늦게 동생이 또 저를 찾아왔습니다. 만주군관학교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하는 거예요. 아버님과 상희 형에게 교사를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가 호통만 들었다면서 만주로 갈 수 있도록 노자를 달라고 했습니다. 며칠 뒤에 돈을 받아서는 본가에 들르지도 않고서 만주로 갔지요.”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장남 재석에 따르면 박상희는 동생이 안정되고 대우받는 교사직을 팽개치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여러 번 경찰서와 감옥에 끌려간 적이 있는 항일투사 박상희는 동생의 변절을 허용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이러한 비난에 대한 일종의 변명거리로서 일본인 교장 및 시학과의 충돌설을 꾸며내거나 과장하여 퍼뜨린 것이 아닐까. 모든 신화에는 작은 근거가 있듯이 박정희의 신화도 작은 사실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있다. 박정희가 만주로 시험을 치러 간 시기에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제자 황실광은 박 선생보다는 다섯 살 아래로서 졸업한 뒤에도 박 선생한테 자주 놀러갔다. 1939년 10월 어느 날 하숙집에 갔더니 그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너하고도 자주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다. 나쁜 놈 같으니 센진(鮮人)이 뭐야, 센진이. 그래 놓고도 지서장을 불러와 화해를 하라니.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그런 것으로는 화해 못 한다.”
  
  박 선생이 전해준 사연은 아리마 교장이 視學을 접대하는 술자리에서 조선인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고 자신이 크게 반발했는데 이런 논리였다는 것이다. 
  
  “내선일체의 정신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하나가 되어 美英鬼畜(미영귀축)을 몰아내자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당신들은 조선인을 차별함으로써 천황의 뜻을 어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朴교사가 천황을 들먹이면서 교장을 몰아세우자 아리마가 당황하여 일본 경찰을 중간에 넣어 화해를 꾀했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충돌이 우연의 일치로 만주군관학교 시험 시기와 비슷한 때에 발생했기 때문에 ‘항일 의식이 강렬한 박 선생이 악질 일본인 교장과 싸우고 독립을 준비하기 위하여 만주로 갔다’는 과장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정작 박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소년용 傳記를 준비하고 있던 김종신 공보비서관이 “각하는 왜 만주에 가셨습니까”라고 묻자 단순명쾌하게 이야기했다.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 
  
  사소한 사연은 어쨌든 이 말이 박정희의 만주행 미스터리에 대한 가장 정직한 해답일 것이다. 박정희는 1939년 10월 만주 무단장(牧丹江)성에 있는 만주군 6관구 사령부內 장교구락부에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시험을 치렀다. 시험과목은 수학, 일본어, 작문, 신체검사 등이었다. 李再起(이재기·작고·육군 대령 예편)도 같은 장소에서 시험을 치렀다. 이재기는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에 만주군 대위가 국민복을 입은 청년을 데리고 들어오길래 시험 감독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청년이 수험생 자리에 앉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대위는 간도 특설대에 근무하던 강재호였고 수험생은 박정희였다. 다음해 1월 4일자 <만주국 공보>에 ‘육군군관학교 제2기 예과생도 채용고시 합격자 공보’가 실렸다. 박정희는 240명 합격자(조선인이 11명 포함된 만주계) 가운데 15등, 李翰林(이한림·전 1군사령관)은 봉천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20등이었다. 
  
  박 선생을 졸졸 따라다니던 5학년생 강신분, 어유남, 서광옥은 박 선생이 만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하숙집을 찾아갔다. 울면서 매달리는 이들에게 박 선생은 “우리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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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煕は 血書を使って満洲へ行った

爪甲制(趙甲済) 記者が関連者たちを追い回しながら得た証言を土台で書いた文です



http://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517&C_CC=AC



¥"朴正煕は 血書を使って 満軍に行った¥"連載5/教師の道で軍人の道に

趙甲済  



私は朴正煕を ¥"教師, 軍人, 革命家¥"と表現する. この三種類履歴と 性格が一身に統合されている. 彼は国民を軍隊式で教えて国家を革命的に 改造一人だ. 彼が聞慶山里の小学校教師職をやめて軍人の道に行かなかったら革命家はな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はずだ. 
  
  
  1998年ソウル江南区に住んでいた遺贈ではお爺さんは年が 87歳だったがよほどあざやかな記憶力を持っていた. 彼は朴正煕と一緒に教師生活をした方々の中では唯一の生存者だ. 今まで朴正煕先生に対する証言たちはほとんど全部が弟子たちによって行われた. 自ずから課長と誤解, そして美化があり得た. そんな点で同僚教師遺贈船の証言は客観的でもうちょっと正確だろう. 彼の証言を要約して見る. 
  
  <私が聞慶公立初等学校の旧称に赴任したことは 1938年 4月初として朴正煕先生が勤務中日の時だった. 私の妻は姙娠の中だから実家に行かせて下宿屋を捜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あの時学校宿直室は朴正煕先生がもう占めていた. 生える朴先生の了解を得て一部屋で 同宿(相宿)した. 当時私は 50ウォンの月給を受けていた. 生活費を減らそうと始めた宿直室生活はArima校長が介入しながら腰砕けになった. 彼はおとなしく ‘宿直室は宿直教師らのためのことなのにお二人様がここで眠ったら困らないか’と言ったのだ. 私は荷物を持って下宿屋を求めて下がった. 朴先生はギムスンよ女人の下宿屋に帰った. 
  
  私たちが宿直室で身近に過ごす時朴正煕先生はまったくものがなかった. しかし言うものは必ず言う人だった. 強直な性分で私は ‘この人は軍人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人だな’ する考えをした. 彼がすぐ竹ひらだった. 他人が嫌やがって避ける事も自分の判断に真似らなければならない仕事だと思えば触りなく自分の所信を明らかにしてやっつけるのだった. 私はどんなにこんな性格を持つようになったのか不思議だった. 一度は運動場で私を横に建てておいて器械体操をして見た. 彼は軽く鉄棒を取ったら ‘大車輪(大車輪)’をするのだった. 鉄棒にぶら下げられて身を休まないでフィフィ回すのだった. 必ず鉄棒に付いていることのように自由自在だった. ガリ勉たちだけいると言う大邱師範であんな運動をいつ学んだのか驚くだけだった. 
  
  朴先生は教師らとは非社交的だったが珍しくも子供たちには多情多感するように対するのだった. はな垂らしたちとも愛想よく話をよくもするのだった. 普通教師らが弟子たちとよく似合わないことは権威を守るのが教育上もっと有利だと判断するからだ. ところで朴先生は反対だった. 遠足を行けば朴先生は何の話をするのか子供達と交わって笑って歌うのがまるで子供みたいだった>
  
  遺贈ではお爺さんは安東教育大学国文学科教授を勤めた後引退した. 彼は朴正煕がどうして満洲軍官学校へ行ったのかに対して 通説(通説)とは違う新しい証言を言った. 
  
  <1938年 5月頃だと考えられる. 宿直室で一緒に寄居しながら率直な話をお互いに打ち明ける時だった. 朴先生がこんなに言うのだった. 
  
  “私はどうしても軍人にな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私の性格が軍人気質なのに問題は日本陸士に行くだろう年上だという点です. 満洲軍官学校は不十分に厳格だと言うがやっぱり年がかかります.”
  
  朴先生は戸籍上の年を直すための方途を話しながら兄さんパク・サンヒに対しても無意識的に言うのだった. 自分の存在に比べて兄さんはすごい人という意識を敷いて言うことだった. 
  
  “うちの御兄さんは今故郷で兔将をしていなさい. 性格も活逹で, 私はこんなに小さくてボザルのがないが御兄さんは体格が大きくて外貌もきれいで爽やかですね. 私は御兄さんを尊敬します.”
  
  生える朴先生に “それではその御兄さんの助けを借りて戸籍を直すことができないか”と言った. 朴先生は何日の間故郷に行って来て年を直したことで分かっている. 彼が一歳低めたと言ったことを憶えている. それで問題が終わるようではなかった. 身元問い合わせをすれば学校にいる朴先生の記録と戸籍がお互いに違って悶着が生ずるようだった. 私と朴先生は宿直室で一晩中悩んだ. 私たちが研究したことは ‘どのようにすれば満洲軍官学校人々が歓迎するしかない行動を取ろうか’だった. 
  
  私がふと思い出して “朴先生, 指を切って血書きを書けばどうかな”と言った. 彼は直ちに賛同した. 直ちに行動に移すのだった. すぐ側にあった学生試験用紙を広げたらかみそりを小さな指に当てるのだった. 生える中にまさかしたが指を突いて血を出すのだった. 朴先生はピッバングウルで試験紙に ‘盡忠報国 滅私奉公(所忠報国滅私奉公)’と書いた. 彼はこれを折って満洲に行かせた. あの時手紙が満洲まで到着するには 1週間頃かかる時だった. 一半月が経っただろうか, 誰かが満洲で発行される新聞に朴先生話が積まれたと言うのだった. 私はどんな過程を経ってその血書きが新聞に報道されたのかわからない. あの時満洲に行っていた大邱師範教錬株アリカと対座が手伝ってくれてその血書き件が新聞に出たのか, ではなければ満洲軍官学校で新聞に資料を提供したのかわからないがとにかく目的は達成されたのだ. 
  
  それから何日後アリカ瓦家送った手紙が朴先生の前で到着した. 
  
  朴先生は “アリカと対座がそのように軍人になりたければ自分に一度いらっしゃりなさいと言った”と言った. その何日後朴先生は満洲に行って来たことで分かっている. アリカとを会ったようだった. 彼はわき腹に 《東洋史》 など何冊の諸本を持って来たが “一度試験を受けて見なさいと言ったからして見るしかないでしょう”と言った. 
  
  その直後に私たちは校長の指示で宿直室を発って下宿屋で移したのだ. 朴先生はたぶん校長にまた了解を得て宿直室に帰って来たようだ. 今も記憶に残ることが宿直室にもナポレオン肖像画をかけておいた朴先生だ. 赤いマントに勲章をふさふさとつけて馬に乗ったナポレオンだった. 私の息子 柳浩文(ユホムン・の前建設部産業立地局長)は 1939年に聞慶普通学校に入学したが受け持ち先生は朴先生だった. 今日秋に朴正煕は満洲軍官学校に入学試験を受けた. 朴先生が日本人校長と争って満洲に発ったという話があるのに争った事がない. 私が 1939年春におおよそ 3週間日本視察旅行をしたことがあるのにあの時そんな事があったら分からなくても. 生える朴先生が満洲軍官学校に発つ時頃, すなわち 1940年春に領主で転勤を行った. その後に消息を聞いたら朴先生が満洲軍官学校を経って日本陸士を卒業した後にだと刀をさして聞慶に立ち寄って大歓迎を受けたというのだった. 私は中に ‘やはり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道に行ったな’と思った. 5・16 革命直前に彼が大邱で 2群副指令官でいる時会ったら彼は英語の本を読んでいる途中だしぬけにこんなものを言うのだった. 
  
  “我が国がこれではなりますか. 何か新たに生まれなければならない機運が起きているようなのにどう思いますか.”
  
  私は “政治に関心がなくてそれはよく分からないです”と言っただけだ. 最後に朴先生に会ったことは彼が死ぬ三甘い私はだった. 私の息子と弟子たちも一緒に青瓦どおり招待して昔の話で花を咲かせた. 大統領は私を見て “うん. はげ頭になりましたね”と言って一座が爆笑を噴き出した>
  
  
  朴正煕先生が血書きを書いて満洲軍官学校に入学試験を受け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許しを得たという同僚教師遺贈船の証言は今までの通説と相反する. 通説は朴正煕が校長と争って教師職をやめた後満洲に行ったというのだ. こんな通説は朴正煕が大統領である時たくさん流布した. この通説は一歩進んで朴正煕が ‘独立運動をする力を育てるために 満軍(満洲だね) 将校になろうと思った’と言う神話で発展したりした. 
  
  多くの人々の証言を総合する時血書き説(お正月)がもっと信憑性があったように見える. 朴正煕は大邱師範在学の時や聞慶教師時代に常に軍人になるという夢を育て行っていた. 校長との不和のため衝動的に軍人の道を選択したのではなく長年の執念の実践だった. 1962年に当時御前会議議長秘書だった李ナクソン中佐が整理しておいた備忘録でも似ている書き入れ時が発見される. 
  
  <元々日本陸士は年齢超過だったし満洲軍官学校も年齢超過だったが軍人になろうとする一念で軍官学校に手紙をした. その手紙が満洲新聞に出た(こんなに軍官を支援する愛国精神があると…). この新聞を見て 姜(川) 大尉が積極的に後援するようになったし彼との対面は満洲の旅館であった. それから川は朴の 引導人(インド人)になったし, 川は当時試験管だった. 川-蔚山である>
  
  李ナクソン中佐が当時取材した内容も遺贈船の証言とほとんど一致している. それでは神話はどんなに誕生したのか. 大邱師範同期生としてあの時聞慶と近くの常住で教師に勤めていた権尚夏(前大統領情報秘書官)の証言. 
  
  <1939年 10月ではなければ 11月に朴正煕が包みを持って私を尋ねて来た. 髪を伸ばせたと責めつける 視学(メトリック・視学) 及び校長と争った後辞表を投げて出る道というのだった. 彼は満洲に行って大邱師範教錬株時代に自分を寵愛してくれたアリカと対座に会う予定だと言った. 我家でひと晩を杯後列車便に去るゾングフィを送った>
  
  朴正煕は権尚夏以外にも何人々に似ているものを言ったことで現われている. しかし朴正煕は 1939年 10月に満洲軍官学校入学試験を受けて学校に帰って来て続いて勤めている途中翌年 3月に満洲に発ったことで確認されている. 朴正煕がArima校長をぶんなぐってくれたとか酒のテーブルを覆したとか争って行ったとかする言葉は裏付されていない. もっと変なことは 1976年 2月 17日大統領公報秘書官 鮮于煉(ソンウヨン)が作成して朴大統領の決栽まで受けておいた ‘大統領履歴書’の内容だ. この資料は朴大統領が読んで校正を見た跡が残っている. この資料は朴正煕が満洲に発った同期に対して ‘道(度) 視学が年上なArima校長に不遜な態度を取ることを見て嫌悪を感じたのが教師職辞任原因の一つだ’と言った. Arima校長がここでは同情の対象で化けている. 朴正煕はそれではどうしてこんな神話の作われる素地があるものを言っただろうか. もし自分の満洲行(行)を合理化するために自ら作り上げたものではないか. 朴正煕より四歳偉人姉上バックゼフィは在世にこんな証言を残した. 
  
  “弟(妹)がたまに私の家へ来ては ‘たまらなくてもソンセングジルもっとこしらえて食べる事ができない’と言ったりしました. ある日夜おそく弟(妹)がまた私を尋ねて来ました. 満洲軍官学校に行くことに決心したと言うんです. お父さんとサングフィ兄さん(型)に教師をやめるという話を取り出してから大どなりだけ入ったとしながら満洲に行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老子をくれと言いました. 何日後にお金をもらっては本家に立ち寄らなくても満洲に行ったんです.”
  
  朴正煕の二番目兄さん朴踊り子の長男在席によればパク・サンヒは弟(妹)が安定して待遇される教師職を投げ出して満洲軍官学校に入ろうと思うことを大変不満に思ったと言う. 
  
  何回警察署と監獄に引かれて行ったことがある抗日闘士パク・サンヒは弟(妹)の変節を許容するのが大変だったろう. 朴正煕はこのような非難に対する一種の言い訳距離(通り)として日本人校長及びメトリックとの衝突説を作り上げるとか誇張してまき散らしたのではないか. すべての神話には小さな根拠があるように朴正煕の神話も小さな事実で出発した可能性がある. 朴正煕が満洲で試験を受けて間時期にどんな事件があったことは事実であるようだ. 弟子皇室光は朴先生よりは五歳の下として卒業した後にも朴先生によく遊びに行った. 1939年 10月ある日下宿屋に行ったら彼は火を和らげ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もうお前ともよく会う機会がなさそうだ. 悪いやつみたいだからセンジン(鮮人)が何よ, センジンが. そうおいてからも支署場を呼んで来て仲直りをしてって. 私が他のものは分からなくてもそんなことでは仲直りできない.”
  
  朴先生の伝えた事情はArima校長が 視学を応待する酒席で朝鮮人を侮辱する発言をしたし自分が大きく反撥したがこんな論理だったということだ. 
  
  “内鮮一体の精神は朝鮮人と日本人が一人になって 美英鬼畜(美英鬼畜)を追い出そうというのではないか. ところであなたたちは朝鮮人を差別することで天皇の意を破っているのではないか.”
  
  朴教師が天皇を搖り動かしながら校長を責め立てるとArimaが荒てて日本警察を中間に入れて仲直りをはかったというのだ. この位の衝突が偶然の一致で満洲軍官学校試験時期に似ている時に発生したから ‘抗日意識が強烈な朴先生が悪質日本人校長と争って独立を準備するために満洲に行った’と言う課長が成り立った可能性がある. いざ朴大統領は自分に対する少年用 伝記を準備していた金終身公報秘書官が “各するどうして満洲へいらっしゃったんですか”と問うと単純明快するように話した. 
  
  “だと刀を差したくて行ったの.” 
  
  ちょっとした事情はとにかくこの言葉が朴正煕の満洲行ミステリーに対する一番正直な解答であるでしょう. 朴正煕は 1939年 10月満洲牧丹江(牧丹江)省にある満洲だね 6グァング司令部内 将校クラブで満洲国陸軍軍官学校第2期試験を受けた. 試験科目は数学, 日本語, 作文, 身体検査などだった. 李再起(李ジェギ・作故・陸軍大領予編)も同じな場所で試験を受けた. 李ジェギは試験が始まる直前に満洲だね大尉が国民服を口は青年を連れて入って来るから試験監督官であると思った. ところでその青年が受験生席に座るのではないか. 後で分かってみるから大尉は間島特設隊に勤めた鋼材号だったし受験生は朴正煕だった. 翌年 1月 4日付け <満洲国公報>に ‘陸軍軍官学校第2期予科生も採用考試合格者公報’が載せられた. 朴正煕は 240人合格者(朝鮮人が 11人含まれた満洲係) の中 15など, 李翰林(李翰林・の前 1軍司令官)は奉天で試験を受けたが 20位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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