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척식 주식회사의 횡포
조회수 : 359
KO
0
Member_66723
2,334,020 / 2,811,753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같이, 일본정부의 직접적 지배하에서 그들의 특권에 기초한 독점적 특수회사이다.
일제는 1908년 의회에서 동양척식회사법을 통과시키고, 이를 한국정부에 강요하여 1000만 원 자금으로 한국에서 척식사업을 목적으로 회사를 설립하고, 일제는 이에 일정기간 상당액의 보급을 시행하고 한국정부는 사업용지의 일부를 제공하기 위하여 국유지를 출자함으로써 한국이 자원개발 식산진흥을 담당하게 하며, 일본으로부터 선량 근면하고 경험이 풍부한 농민을 이식하고 진보된 농법을 시범함과 동시에 기업가에 대해서도 이자가 싼 자금을 공급하여 식산사업에 이바지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설립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을 식민지화할 목적으로 창립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회사가 설립되자 한국정부로부터 토지 1만 7714정보를 출자받고, 1913년까지 토지 4만 7148정보를 헐값으로 매입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이후인 1920년 말에 회사 소유지는 경작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만 7천여 정보에 달하였다. 이와 더불어 일제는 국유지를 강제로 불하하여 막대한 면적의 산림지를 가로채어, 1942년 말 16만여 정보의 임야를 소유하였다.
이와 같이 강제로 빼앗은 토지를 소작인에게 빌려주어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고, 영세 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20% 이상의 고리를 추수 때 현물로 거둬들였다.
또한 그 소유지는 일본인 이주자에게 싼값으로 양도되어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의 직영지 면적은 점차 감소되었으나, 1937년 동척이 직접 경영한 경작지 면적은 6만여 정보에 달하였다. 동척의 농업이민정책은 경제적인 목적보다 정치적인 목적에서 추진되었다.
일본은 각종 특혜를 주고 1910∼1926년에 17회에 걸쳐 일본인 이민 희망자 약 1만 명을 엄선하여 조선침략의 담당자로 활용했다. 이들 이주민은 경기·경상·전라·황해·충청도에 가장 많았는데, 그들은 조선민중을 착취 압박한 일제의 대변자이며 앞잡이가 되었다. 이에 따라 1926년까지 조선인 빈농 약 29만 9천이 토지를 상실하고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한편, 동척은 조선민중에 대한 가혹한 착취로 세력이 확대되자, 1917년 회사법을 개정하여 본점을 도쿄[東京]로 이전하고 조선에만 국한하던 침략 및 착취의 대상과 범위를 몽골·러시아령 아시아·중국·필리핀 및 말레이반도까지 확장시켜 대륙에 대한 침략자금의 공급, 기타 척식사업을 경영하였다.
동척의 사업지역이 중국의 둥베이[東北]·네이멍구[內蒙古]로 확대되었으나, 조선에서의 동척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야기한 이후 일제가 한반도를 그들의 병참기지화하기 위해 중공업에 집중 투자하자, 동척도 광공업 부분에 관심을 기울여 전기·탄광·제철 등 각 분야에 투자하였으나, 여전히 동척의 사업 중심은 조선의 농업에 대한 수탈이었다.
1920, 1930년대 농민의 격렬한 소작쟁의는 동척의 조선민중에 대한 수탈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또한 1926년 12월 28일 의열단원 나석주 열사가 동척을 기습하여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은 바로 이러한 민족적 증오의 한 표현이었다. [출처] 동양척식주식회사 [東洋拓殖株式會社 ] | 네이버 백과사전
번역문보기
東洋拓殖株式会社の横暴
イギリスの東インド会社と一緒に, 日本政府の直接的支配の下で彼らの特権に基礎した独占的特殊会社だ.
日帝は 1908年議会で東洋拓殖会社法を通過させて, これを韓国政府に強要して 1000万ウォン資金で韓国で拓殖事業を目的に会社を設立して, 日製はここに一定期間対当額の普及を施行して韓国政府は事業用紙の一部を提供するために国有地を出資することで韓国が資源開発殖産振興を担当するようにして, 日本から善良勤勉で経験が豊かな農民を移植して進歩された農法を示範することと同時に企業家に対しても利子が安い資金を供給して殖産事業に貢献するようにするという名目で設立した. しかし実際では朝鮮を植民地化する目的に創立されたから韓国の反応は冷淡だった.
会社が設立されると韓国政府から土地 1万 7714情報を出資受けて, 1913年まで土地 4万 7148情報を捨値で買い入れた. 土地調査事業が完了した以後の 1920年末に会社所有地は耕作地の 3分の 1にあたる 9万 7千余情報に達した. これと連れて 日製は国有地を強制に払下げして莫大な面積の山林誌を横取りして, 1942年末 16万余情報の林野を所有した.
このように強制で奪った土地を小作人に貸してくれ 50%が越える高率の小作料を取り立てて, 零細小作農に貸してくれた穀物に対しては 20% 以上の掛けがねを秋収の時の現物で取り入れた.
もその所有地は日本人移住者に安値に譲り渡しされて東洋拓殖株式会社(以下東拓)の直営誌面積は徐徐に減少されたが, 1937年東拓が直接経営した耕作地面積は 6万余情報に達するだ. 東拓の農業移民政策は経済的な目的より政治的な目的で推進された.
日本は各種特恵を与えて 1910〜1926年に 17回にわたって日本人移民希望者約 1万人を厳選して朝鮮侵略の担当者に活用した. これら移住民は競技・慶尚・全羅・黄海・忠清道に一番多かったが, 彼らは朝鮮民衆を搾取圧迫した日製の代弁者で岡っ引きになった. これによって 1926年まで朝鮮人貧農約 29万 9千が土地を喪失して北間島で移住した.
一方, 東拓は朝鮮民衆に対する苛酷な搾取で勢力が拡がると, 1917年会社法を改正して本店を東京[東京]に移転して朝鮮にだけ局限した侵略及び搾取の対象と範囲をモンゴル・ラッシュ鉄アレイアジア・中国・フィリピン及びマライ半島まで拡張させて大陸に対する侵略資金の供給, その他拓殖事業を経営した.
東拓の事業地域が中国のドングベイ[東北]・ネイモンググ[内蒙古]で拡がったが, 朝鮮での東拓事業の占める比重は圧倒的だった. 1931年満州の変と 1937年日中戦争を引き起こした以後日帝が韓半島を彼らの兵たん基地化するために重工業に集中投資すると, 東拓も鉱工業部分に関心を傾けて電気・炭鉱・製鉄など各分野に投資したが, 相変らず東拓の事業中心は朝鮮の農業に対する収奪だった.
1920, 1930年代農民の激しい小作争議は東拓の朝鮮民衆に対する収奪と決して無関係ではなかった. また 1926年 12月 28日義烈単元ナソクチュ烈士が東拓を奇襲して爆弾を投擲する事件は正しくこのような民族的憎悪の一表現だった. [出処] 東洋拓殖株式会社 [東洋拓殖株式会社 ] | ネイバー百科事典
좋아요·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
댓글 ( 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