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세종 때 그곳을 점령하여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아내는 등 영향력을 끼쳤으나, 일본 해적들이 조선약탈의 전진기지로 자주 이용되었다. 본래 대마도는 신라 때 신라의 영토였으며 조선 때도 조선이 점령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등 분명 우리 영토였다.
대마도는 가락국의 영토
대마도가 우리 땅임을 밝히는 고증사료는 우리의 역사와 함께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다. "주서(周書)"와 "수서(隨書)"에는 "대판만에는 담로(擔魯)와 일치하는 담로도(淡魯島)가 있었다.
일본열도 내에 한국어 계통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A.D. 18/년에 공주에 도읍한 비류 백제는 처음부터 백가가 되는 많은 세력이 바다를 건너왔다.(初以百家濟海)"라고 나와있다.
또한 "일본국가의 기원"이라는 책을 보면 "규슈에는 7개의 담로(對馬, 壹岐, 伊都奴, 投馬, 邪馬臺)가 있었다. 서기 100년경에 이미 규슈지역의 키 작은 원주왜인(고고학상의 키 작은 남방계 단신인)을 정복하고 비류백제 왕실의 자제("양서 백제전")가 담로주로 통치하고 있었다.("위지왜인전"). 이 때문에 담로가 많이 있었다."라고 나와있다.
또한 "일본서기"의 신대성기(神代成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음신과 양신이 성교하여 부부가 된 이후 산월(産月)에 이르러 이들 담로주를 모태로 대일본을 낳았다."
이상의 내용은 백제인이 세운 담로가 일본 혼슈(本州)는 물론 규슈연안과 대마, 일기도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예로부터 규슈와 대마도는 곧 삼한(三韓)에서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이 사는 지역이 아니었으며, 임나(任那)가 또 나뉘어 삼가라가 되었는데, 소위 가라란 그 지방에서 중심되는 마을을 일컫는다.
임나는 대마도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명칭이며, 동과 서에 마을들이 있어 치소(治所)가 있고 조공하기도 하며 배반하기도 하였는데, 그 후 대마도섬이 드디어 임나에 지배되었으므로 그때부터 모두 임나를 대마라고 일컬었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어름에 있었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히고 국미성에 치소가 있었다.
영락 10년에 세 가라(대마도)가 모두 고구려에 구속되었고 이로부터 바다와 육지의 모든 왜가 임나에 통합되어 열 나라로 나뉘어 다스리니 이름하여 연정(聯政)이라 하였다(400~479년).
이들 연정(대마도·일기도·말로국·규슈·세도연안·야마토왜)은 고구려에 직할되어 열제(광개토대왕)의 명령 없이는 제멋대로 행할 수 없었다(400~479년). 그 후엔 백제가 관할하였다.
또한 가락국 6대 좌지왕 2년(408년) 왕비 용녀(傭女)가 붕당을 일으키어 국력이 쇠잔할 때 고구려 연정(대마왜)이 지배하였다(신라 실성왕7년, 동진 安義熙 3년, 일본 皇反正 3년).
또한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 실성왕7년조)에 따르면 "왜가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가락국과 신라는 같이 근심하였다. 대마도를 정벌하려 하는데 미사품(未斯品)의 간언으로 중단했다"고 나와있다. "삼국사기"의 본조(本條)에도 임나국은 가락의 영토라 했다. 이 때 대마왜는 임나연정의 고구려 지배 하에 있었다.
대마도는 가락국의 영토로서("삼국사기" "가락국기" "대동세보"), 비단무역의 거점으로 용성국(나가사키)→오키나와→리만 해류를 타고 싱가포르→중국 복강성→갠지스 강→아유타국→아라비아 대상이 비단을 나른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