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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ZDF 다큐멘터리 훈족은 한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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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P {margin-top:2px;margin-bottom:2px;} 고대 유럽 호령한 훈족 수장 아틸라는 한민족
유물·유적 통해 추적해본 한민족의 뿌리

독일TV ZDF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 중 ‘잃어버린 고리 찾기’ 편은 375년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해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아시아 유목민족 훈족을 집중적으로 추적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훈족의 원류가 아시아 최동단, 즉 한국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실제 신라 및 가야인과 훈족의 유물, 유적 등을 비교해보면 편두(扁頭, 일명 납작머리)와 금관 머리장식 등 여러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당나라를 끌어들였다는 점은 우리의 과거사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 중 하나다. 통일에 외세를 개입시킨 나쁜 선례를 남긴 데다,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를 당나라에 모두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이 좋아 통일이지,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아시아 동북부 일원에서 고구려가 막강한 중국에 맞서 수백 년간 영토를 확장하며 위세를 떨쳤기 때문일까. 한국 사람들은 멸망한 대국, 고구려에 강한 매력을 느낀다. 고구려는 지리적 여건이 불리했음에도 한때 한민족 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광개토대왕(375∼413) 재위 당시 고구려 영토는 서쪽으로는 요하, 북쪽으로는 개원, 동쪽으로는 옥저와 예, 그리고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에 이르렀다.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413∼491) 시대에 고구려가 고조선이 차지했던 영토를 거의 모두 되찾은 것으로 추정한다.

현대의 과학문명은 유럽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원전 500년경 그리스에 이어 로마가 정치적, 군사적으로 ‘세계의 중심’이 된 이후, 세계 역사는 유럽 중심으로 흘러왔다. 로마가 유럽을 지배하던 시대에 몇몇 아시아 민족이 유럽에 진출하긴 했지만, 로마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로마를 멸망시킨 세력은 다름아닌 아시아 민족인 훈족(Huns). 서기 375년, 기마 민족인 훈족이 볼가강을 건너와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동고트를 공격했고, 동고트는 서고트를 공격했다. 이에 서고트는 로마제국의 영토로 들어가 보호를 요청했다.

게르만족이 로마 영토에서 살게 된 지 100년 후인 476년, 서로마제국은 결국 게르만족의 수장(首長)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한다. 이후 게르만족이 서유럽과 아프리카 북부 등 여러 지역으로 갈라지면서 유럽에는 새 국경이 그어졌다. 이때 성립된 국경은 대부분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훈족은 한민족의 일파

그런데 최근 서유럽에서 게르만족의 이동을 촉발시키고 로마제국을 풍전등화의 운명속으로 몰아넣은 주인공인 훈족이 실은 한민족의 일파임이 세계 각지에서 발굴된 유물과 사료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적 주장에 흥미를 갖는 사람도 많지만, ‘무슨 얼토당토 않은 소리냐’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훈족이란 이름 자체가 우리에게 생소할 뿐더러,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서기 4∼5세기경 한반도에 살고 있던 한민족이 어떻게 유럽을 공격할 수 있었겠느냐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훈족이 한민족의 일파라는 역사적 주장이 곧 한민족이 유럽을 직접 공격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훈족은 흉노(匈奴, 북방 기마 민족을 통칭한다)의 한 분파로,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4세기까지 약 700년간 중원 지역을 놓고 중국과 각축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흉노는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했다. 이때 흉노에 속해 있던 한민족 원류 중 일부가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훈족으로 성장했고, 또 한 부류는 한반도 남부지역까지 진출해 현재의 한민족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프랑스 등 서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예들에게서 몽골반점이 발견되고 있다. 몽골반점은 꼬리뼈 높이의 엉덩이에 나타나는 색소 변색으로 유전학적으로 몽골계통의 민족에게서 나타나는 신체적 특징이다. 몽골반점이 한민족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은 아니지만, 훈족 후예들이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난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한민족과 훈족은 친척의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훈족은 그들 특유의 예맥각궁(濊貊角弓)을 사용했다. 예맥각궁은 만드는 데만 5년, 제대로 쏘기 위해 활을 익히는 데만 10년이 걸리지만, 1분 안에 15발 이상 쏠 수 있다고 알려진 활이다. 훈족이 예맥각궁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인 아퀼레이아에 자리한 크리프다 아프레시 교회의 프레스코화가 말해준다.

이 그림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나오는, 말을 탄 채 활로 동물을 사냥하는 고구려 무사들과 똑같다. 고분벽화에 나오는 화살촉은 도끼날 화살촉인데, 이 화살촉은 날아가면서 회전하기 때문에 목표물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매우 크다. 훈족도 바로 이 도끼날 화살촉을 사용했다.

관습적인 공통점도 발견되고 있다. 훈족의 골상이 편두(扁頭, 납작머리)라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몽골지역부터 독일 튀링겐과 오덴발트, 프랑스 칼바도스 지방에 이르는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분묘에서 나온 훈족의 인골을 분석한 결과, 훈족은 관자놀이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 있었고 머리 둘레에 고랑 같은 주름이 팼으며,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편두라고 알아냈다. 그런데 가야국이 창립했던 경남 김해에서도 편두 두개골이 발견됐다. 또 법흥왕 등 신라의 왕들도 편두였다고 한다. 최치원은 신라의 국사 지증대사의 공덕비에 법흥왕이 편두라고 기록했다.

고대 인도에서 행해졌던 관습, 혹은 코카서스 북부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의 풍습으로도 알려진 편두는 한민족과 연관성이 크다. ‘삼국지’의 ‘위지동이전(魏璡夷傳)’에는 ‘진한(辰韓) 사람은 모두 편두’라는 기록이 있다. 또 고조선에는 일찍부터 편두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편두는 중국인과는 구별되는, 동이(東夷)족 사이에 매우 오랫동안 성행했던 풍습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점은 훈족에게선 편두가 발견되지만, 흉노에게선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유럽을 공격한 훈족은 편두 습속을 가지고 있는 특수 부족으로,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및 신라 지역과 친연성(親緣性)이 있다고 유추할 수 있다.

한편 훈족의 이동경로에서는 대·소형의 동복(cup cauldrons)이 발견된다. 유목 부족장들에게 바쳐진 동복은 정화 의식(Purification rite)에서 고기를 제물로 바칠 때 쓰는 동제 용기로 대형 화분처럼 생겼다. 이러한 동복은 가야시대 고분인 경남 김해의 대성동과 양동리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동복은 가야국 등의 원류가 북방의 기마민족이라는 증거로 자주 거론되어 왔다. 훈족은 동복을 말 잔등에 싣고 다녔는데,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국보 91호) 토기에도 말 잔등에 동복을 싣고 다니는 모습이 발견된다. 게다가 이 기마인물상의 주인공들도 모두 편두이다.

또한 훈족의 동복 등에서 발견되는 문양은 한민족의 금관 등 머리 장식 양식과 유사하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에는 나무형상(출(出)자형 장식)과 녹각형상(사슴뿔 장식)이 많다. 이는 북방 민족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풍습으로 북방민족이 한반도로 이동해 정착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북방 유목민족의 전형적인 습속인 순장(殉葬) 또한 가야 지역의 고분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특히 금관가야 유적인 대성동 고분군 1호분에선 우마(牛馬)의 머리를 베어 곽 위에 얹어놓은 목곽(木槨)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훈족을 포함한 북방 유목민족의 동물 희생 행위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훈족이 나무에 빨간 헝겊을 달아 악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는 기록과 곰을 평화의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점은 우리 민족이 마을 어구에 장승이나 솟대를 세워 염원을 빌고 곰을 토템으로 삼은 점과 매우 유사하다. 대다수 유목민족들은 곰이 아닌 다른 동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토템 대상으로 가장 일반적인 순록과 수달 등은 지금까지도 몽골 지역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서쪽의 훈족, 동쪽의 한민족

그렇다면 고대 한민족의 원류는 어떤 과정을 통해 아시아 대륙의 훈족과 한반도 남부의 가야 및 신라인으로 갈라서게 됐을까. 이는 진시황제 때부터 중국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흉노의 흥망성쇠와 연계된다.

흉노는 진나라,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한나라와 중원의 패권을 놓고 장기간에 걸쳐 혈투를 벌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57년 동과 서로 양분되어 서로 전쟁을 벌인다. 서흉노의 선우(흉노의 왕으로 ‘하늘의 아들’을 뜻함)인 질지(?支)가 동흉노의 호한야에게 패하자 일족을 이끌고 우랄산맥 너머 시르다리아강 중류에 당도한다. 이것이 흉노의 제1차 서천(西遷)이다. 질지는 견곤(추강과 탈라스강 사이)을 수도로 하는 ‘아정(牙庭)’이란 나라를 세웠다. 서유럽은 이때를 흉노 제국 출현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한편 중국에 후한(後漢)이 들어서면서 세가 불리함을 느낀 남흉노는 48년 고비사막 이남의 8개 집단을 이끌고 광무제(BC 6년∼AD 57년)를 찾아가 투항했다. 광무제는 남흉노에게 아예 내몽골 영토를 주어 투항하지 않은 북흉노를 견제하게 했다. 그리고 73년에 이르러 한나라는 남흉노와 연합해 북흉노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패배의 고배를 든 북흉노는 아시아의 북쪽 막북(漠北)으로 이동하는데, 이것이 흉노의 제2차 서천이다. 북흉노는 서역제국을 장악한 후 그 세력을 규합하면서 한나라와의 대결을 꾀한다.

그러나 한나라는 화제(和帝, 89∼105) 원년인 89년에도 남흉노를 규합하여 북흉노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치명상을 입고 사분오열된 북흉노는 대부분 동호(東胡)에서 분리된 선비(鮮卑)에 예속되었다. 그러나 일부 북흉노는 천산산맥 북쪽으로 계속 서진하여 페르가나 분지를 지나 발하시호와 아랄해 사이의 강거(康居) 땅에 이르렀다. 이것이 흉노의 제3차 서천이다.

흉노와 훈족을 연결시키는 또 다른 연결 고리는 한나라 왕조가 붕괴될 무렵에 등장하는 남흉노이다. 304년 당시 산서의 태원에 자리잡고 있던 유연(劉淵, ?∼310)은 진(晉)나라 혜제에 의해 남흉노의 왕으로 책봉된다. 그러나 유연은 과거 선조 중에 한나라의 공주가 있었음을 근거로 자신이 한나라의 후예라고 내세우며 스스로를 황제로 칭했다. 그는 308년 태원에서 북한(北漢, 즉 前趙)을 세운다. 318년 석륵(石勒, 274∼333)은 전조를 폐하고 후조(後趙)로 알려진 새로운 흉노 국가를 세웠고, 349년 석민(石閔)이 후조의 정권을 잡았다. 석민은 흉노에게 원한이 많은 한인(漢人)들을 부추겨 대대적인 흉노 토벌에 나서도록 한 뒤 무려 20여 만명의 흉노가 살해되는 것을 방관한다.

흉노로서는 이것이 결정적 패배였다. 중국에 동화된 흉노와 유목 생활을 하던 흉노가 연합했음에도 패배하자, 살아남은 흉노들은 새 삶의 터전을 찾아 서쪽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흉노의 제4차 서천으로, 이들은 이미 1∼3차에 걸쳐 서천했던 흉노와 합류(또는 압박)한다. 설상가상으로 370년경부터 혹독한 한파가 엄습하자 흉노는 보다 서쪽으로의 이동을 단행, 375년 서유럽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한편 한반도에서 훈족과의 친연성이 가장 두드러진 지역은 가야와 신라 지방인데, 중국과의 전쟁 와중에 훈족의 지배집단 중 일부가 동천(東遷)하여 한반도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여기서 훈족의 지배집단이란 유목민의 수령(首領)이 속한 부족을 말한다.

학자들은 흉노·동호·선비·오환 등 북방 기마 민족들의 흥망이 가야국의 건립시기와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삼국지’의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는 늦어도 1∼3세기까지 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삼한이 존재하고 있었다. 3세기 중엽 이후 마한은 백제로, 진한은 신라로 통합되었고, 변한은 3세기 이후 가야란 명칭을 갖게 된다. 이는 3세기말∼4세기 초에 변한이 가야사회로 전환됐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가야란 나라가 신라나 백제와 달리 내부에 다양한 여러 나라들을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가야의 건립시기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 중엽까지 무려 5세기의 차이를 보이는 등 논란이 많다.

학자들은 경상도의 가야고분에서 전형적인 북방 기마민족의 유물이 발견된다는 것 자체가 북방 기마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특히 금관가야는 흉노가 직접 한반도에 들어와 세웠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볼 때 흉노 속에 포함됐던 한민족의 일파가 서천하여 훈족으로 성장했고, 또 다른 일파가 동천하여 가야 등으로 성장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결혼 조건으로 로마의 절반 요구

가장 넓은 대국을 건설한 역사적 인물을 꼽으라면 칭기즈 칸과 알렉산더 대왕, 그리고 아틸라(Attila, 395∼453)를 들 수 있다.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한 아틸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보다 20년 늦은, 훈족이 서유럽을 침공한 지 20년이 지난 395년에 문주크왕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틸라의 생애는 로마의 역사가 프리스코스와 요르다네스에 의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로마는 훈족에 공물을 주어 화친(和親)하면서 게르만족을 경계했다. 이에 따라 당시 외교 관례대로 아틸라는 410년경부터 서로마 황제 호노리오스가 수도로 삼은 라벤나 궁정에서 자랐다.

434년 왕위 후임자였던 삼촌 루가가 사망하자, 훈족의 전통에 따라 아틸라는 형 블레다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새 왕으로서 자신들의 힘을 대외적으로 과시할 기회를 노리던 이들은, 동로마가 훈족에게 보내야 할 공물의 납기를 번번이 어기자 435년 동로마로 진격했다. 이에 동로마는 공물을 두 배로 올리기로 약속하고 아틸라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어 아틸라는 서로마로부터 서고트에 대한 경찰권을 넘겨받는다. 이로써 훈족은 로마제국을 제치고 사실상 유럽의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443년 블레다가 사망하자 아틸라는 훈족의 단일지도자가 됐다. 아틸라가 지배한 훈제국의 통치권은 남으로는 발칸반도, 북으로는 발트해안, 동으로는 우랄산맥, 그리고 서로는 현재의 프랑스 땅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영토에 미쳤다. 치하의 종족만 해도 45개 종족에 달했다.

이때 아틸라를 국제적 전쟁에 뛰어들게 한 여인이 등장했다.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인 호노리아가 바로 그 여인. 호노리아는 450년 동생을 황제자리에서 밀어내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동로마의 수도원으로 추방됐다. 그러자 호노리아는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아틸라에게 자신의 금반지를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반지를 보내는 것은 구혼을 뜻했다. 아틸라는 이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로마제국의 절반을 결혼 지참금으로 요구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틸라의 요청을 거절하고 호노리아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켰다.

서로마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아틸라는 451년, 현재의 벨기에와 프랑스의 메츠, 랑스, 오를레앙 등에 이르는 갈리아 지역을 공격했다. 아틸라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서로마 중심까지 진격했다. 그러자 서로마는 아틸라의 친구이자 ‘최후의 로마인’으로 불리는 아에티우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 훈족과 적대 관계에 있는 게르만족들을 규합해 아틸라에 대항했다.

451년 6월20일, 프랑스 트루아시(市)에선 세계 15대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살롱 대전투’가 벌어졌다. 각각 20만명에 이르는 대군이 참전해 15만명의 전사자를 낳은 대규모 전투였다. 그러나 승부는 나지 않았다.

아틸라는 살롱 대전투 후 판노니아(현재의 헝가리)로 철수했다가 이듬해인 452년 다시 서로마를 침공했다. 이번에는 이탈리아 반도가 표적이 됐다. 아틸라는 아퀼레이아 점령을 시작으로 파두, 베로네, 피비 등 북이탈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당시 훈족의 공격을 피해 해안지역으로 피난한 로마인들이 ‘베이네티암(Veni etiam, 나도 여기에 왔다)’이라고 외쳤는데, 베네치아란 지명이 바로 이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허망한 멸망, 유럽의 미움

그러나 아틸라와 훈족의 종말은 너무도 허망했다. 453년, 아틸라는 일디코(혹은 힐디코)라 불리는 게르만 제후의 딸과 결혼했는데, 결혼식 다음날 아침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게르만족의 유명한 대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에는 크림힐트란 이름으로 불리는 일디코가 자신의 가족이 훈족에게 살해된 것에 앙심을 품고 잠든 아틸라를 살해한 것으로 묘사됐다. 그러나 학자들은 아틸라가 결혼식 날 과음으로 질식했거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암투로 살해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강력한 지도자인 아틸라가 죽자 그의 아들인 덴기지크가 훈족의 지도자가 됐다. 그러나 여러 부족으로 구성된 훈제국은 분열하기 시작했고, 469년 동로마에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뒤 역사에서 사라졌다.

동로마에 패배한 훈족의 대다수는 카스피해 북부로 귀향했다. 그러나 일부는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러시아 남쪽과 크림 지역에 정착했다. 또 몇몇 부족들은 프랑스와 스위스 지역에 자리잡았다. 이때 훈족의 일부가 발라니아에 잔류했다가 후일 마자르인들과 합쳐 헝가리 민족을 구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트란실바니아(현 루마니아)의 세켈리족은 자신들이 훈족 아틸라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드라큘라 백작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루마니아에서는 아틸라를 강력한 힘을 가진 드라큘라 백작의 원조로 여기고 있다.

아틸라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진, 세계 역사상 몇 명 되지 않는 지배자 중의 한 명이다. 아이들은 그의 이름에서 연상되는 강력함과 정열, 그리고 거대한 힘에 매력을 느낀다. 아틸라가 파괴와 약탈만 일삼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비감을 더해주기도 한다. 아틸라는 교묘한 협상을 통해 상대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어내는 외교적 수완도 발휘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인 로마를 상대로 말안장에 앉은 채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으며, 호노리아와의 결혼 지참금으로 서로마의 절반을 달라는 대담성도 보였다.

그러나 아틸라는 동시에 유럽인들로부터 신랄한 비난을 받고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유럽의 소설, 연극, 오페라 등에서 잔인한 폭군으로 나오기 일쑤긴 것. 단테는 ‘신곡’ 중 지옥편 제12곡에서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아틸라를 묘사했다.

1968년 1월23일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함선 프에블로호가 나포되었을 때 아틸라는 또 한 번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북한에 나포된 프에블로호 선장 리오드 버처는 북한측에 “아틸라 이래 가장 현명치 못한 행동”이라며 사죄했다. 이같이 아틸라가 서양인들로부터 혹독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아시아인인 그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심장부를 유린하는 등 그들의 자존심을 짓밟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훈족과 한민족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져 왔다. 이는 훈족의 원류가 흉노(몽골계-투르크계)라 하더라도, 훈족의 지배집단은 서양계 투르크 민족이라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흉노가 몽골과 퉁구스, 기타 북방민족의 혼합체이지만 흉노의 언어 특성을 연구한 결과 그들의 정치적 지배집단은 투르크 계열이라고 추정한다. 시라토리 구라기치를 비롯한 학자들은 흉노가 투르크가 아닌 몽골 계열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흉노가 투르크 계열의 특징을 지녔다는 데는 동조한다.

훈족은 아시아계 민족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가야·신라 고분과 유사한 북방민족의 쿠르간, 훈족의 동복, 김해 대성동에서 출토된 동복, 훈족의 편두.
투르크인은 한자로는 돌궐(突厥)로 표기되며 서융(西戎)에 속한다. 투르크는 6세기 중엽 몽골계 유목민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후 1493년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키고 오스만투르크 대제국(현재의 터키)을 이루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조시모스는 훈족을 일컬어 ‘형태 없는 돌덩이인 얼굴을 가졌다’면서 ‘피부색이 어둡고, 눈 대신 어두운 구멍이 두 개 나 있고, 코는 납작하고, 뺨에 상처가 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눈 대신 어두운 구멍이 두 개 나 있고(눈이 작다는 뜻) 코가 납작하다’는 것은 동양인의 얼굴을 표현한 것임에 틀림없다.

클레르몽의 주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도 훈족에 심한 거부감을 보이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들은 혐오감을 준다. 그들의 코는 모양이 없고 평평하며, 광대뼈는 튀어나왔다. 두 개의 눈에는 눈꺼풀이 조그맣게 열려 있어 광선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이지만, 꿰뚫어보는 이 눈은 훨씬 더 먼 곳을 볼 수 있다’고 적었다. 이 설명도 서양인이 아닌 동양인의 얼굴인 셈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자료는 그리스인 프리스코스가 묘사한 아틸라의 모습이다. 프리스코스는 449년 동로마 사절단의 일원으로 아틸라의 궁정에 머무르며 그와 여러 번 대면했다. 프리스코스는 현재 일부분만 남아 있는 ‘비잔티움사’ 7권에서 아틸라를 전형적인 훈족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는 아틸라를 ‘몸집이 작고 가슴이 넓고 머리가 컸다’고 설명하면서 ‘눈은 가늘게 찢어졌고 코는 납작했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숱이 적은 턱수염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사마천 또한 흉노를 전형적인 동양인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신체는 작지만 땅땅한 편이고, 머리는 아주 크고 둥글며, 안면은 넓고 광대뼈가 튀어나왔다. 머리카락은 전부 잘라 겨우 정수리에만 남아 있다. 눈썹은 짙고 눈동자는 불타듯이 강렬하며 눈은 째진 모양이다.’

한편 흉노의 후손인 후월(後越)의 태자 손진(孫珍)이 한인(漢人)의 시중(侍中)인 최약(崔約)이란 자에게 안질 치료법을 질문한 일화는, 몽골인과 중국인의 외모가 구별됨을 보여준다.

손진이 “눈을 어떻게 물에 잠기게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자 최약은 “당신의 눈은 움푹 들어가서 바로 물에 잠길 수 있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손진은 최약 부자를 살해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 따르면 흉노인 손진은 한인과 달리 눈은 움푹 들어가고 코는 높았다.

이처럼 흉노에 대해 사마천은 동양인으로, 최약은 서양인으로 묘사했는데, 많은 부족들이 광대한 영토를 가졌던 흉노가 서로 다른 모습을 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투르크인들이 건설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후손 터키인들과 한국인은 외모부터 명백히 구별된다. 터키인의 체격은 유럽인, 특히 고대 로마인에 비해 결코 작은 편이 아니다. 코 역시 유럽인만큼 높다. 그러나 동로마 황제들이 훈족의 지도자를 알타이어로 ‘강한 사람’을 뜻하는 ‘투르크 왕자’라고 불렀기 때문에 훈족이 곧 투르크족이라고 짐작되었다. 더욱이 역사적으로도 투르크인이 결속된 종족으로 부상하던 시기는 훈족이 유럽으로 진출했던 때보다 200∼300년 늦은 6세기부터이다.

60만명에 이르는 상비군을 둔 서로마제국은 야만족인 게르만족에 의해 476년 멸망한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자존심 상해하는 것은 게르만족을 몰아낸 장본인이 게르만족보다 더 야만적인 훈족이란 점이다.

그러나 유럽의 역사가 훈족에 의해 다시 쓰여졌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유럽 역사학자들은 다소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다. 훈족이 유럽을 침공해 제국을 세우긴 했지만 훈족의 유럽 지배가 겨우 100년(375∼469)에 지나지 않았다고 자위하는 것이다.

동·서양 주름잡은 우리의 선조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 및 사료들을 한민족의 그것과 연결시켜볼 때 훈족의 지배집단을 한민족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이는 한민족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4∼5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서양에서는 훈족이 로마제국을 유린했으며, 동양에서는 고구려가 아시아 동북방의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다. 물론 훈족은 고구려보다는 가야(변한) 및 신라(진한)와 더 가까운 관계로 추정되지만, 이들 모두는 한민족이다. 아틸라를 한민족의 선조라고 간주할 때 우리는 4∼5세기경 각각 서양과 동양에서 패자로 군림한 당당한 두 선조, 아틸라와 광개토대왕을 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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ドイツZDF ドキュメンタリーフン族は韓民族

0 P {margin-top:2px;margin-bottom:2px;} 古代ヨーロッパ号令した フン族 首長アティルという韓民族
遺物・遺跡通じて追跡して見た韓民族の根

ドイツTV ZDFのドキュメンタリーシリーズ ‘スフィンクス, 歴史の秘密’ 中 ‘忘れてしまった掛けがね探し’ 便は 375年ゲルマン民族の大移動を触発してローマ帝国を滅亡させたアジア遊牧民族 フン族を集中的に追跡した.

がドキュメンタリーは フン族の源流がアジア催東端, すなわち韓国人である可能性があると言った. 実際新羅及び伽揶人と フン族の遺物, 遺跡などを比べて見ると偏豆(扁頭, 一名ナブザックモリ)と金冠頭飾りなどさまざまな共通点が発見される.

新羅が三国を統一する時唐を引き入れたという点は私たちのすぎ去った事で一番惜しい書き入れ時の中で一つだ. 統一に外勢を介入させた悪い先例を残したうえに, 高句麗の広大な領土を唐に皆奪われたからだ. それで言葉が良くて統一であって, ‘光良いまんしゅうあんず’に過ぎなかったという皮肉も出る.

アジア東北部一円で高句麗が莫強した中国に対立して数百年間領土を確張して威勢をふるったからだろう. 韓国の人々は滅亡した大国, 高句麗に強い魅力を感じる. 高句麗は地理的与件が不利だったにもひととき韓民族史上一番広大な領土を確保した. 広開土大王(375〜413) 在位当時高句麗領土は西の方では腰下, 北では開院, 東では玉箸とはい, そして南側では漢江流域に至った. 歴史学者たちは一般的に広開土大王と長寿王(413〜491) 時代に高句麗が古朝鮮が占めた領土をほとんど皆取り戻したことで推正する.

現代の科学文明はヨーロッパで始まったと言っても過言ではない. B.C. 500年頃ギリシアに引き続きローマが政治的, 軍事的に ‘世界の中心’になった以後, 世界歴史はヨーロッパ中心に流れて来た. ローマがヨーロッパを支配した時代にいくつかのアジア民族がヨーロッパに進出したりしたが, ローマを完全に征腹するには失敗した.

しかしローマを滅亡させた勢力は外でないアジア民族である フン族(Huns). 西紀 375年, 騎馬民族である フン族がボルガ川を渡って来てゲルマン族の一分岐点である同ゴートを攻撃したし, 同ゴートは西ゴートを攻撃した. ここに西ゴートはローマ帝国の領土に入って行って保護を要請した.

ゲルマン族がローマ領土で住むようになってから 100年後の 476年, 西ローマ帝国は結局ゲルマン族の首長(首長) オドアケルによって滅亡する. 以後ゲルマン族が西ヨーロッパとアフリカ北部など多くの地域で割れながらヨーロッパには新しい国境が引かれた. この時成立された国境は大部分現在まで続いて来ている.


フン族は韓民族の一派

ところで最近西ヨーロッパでゲルマン族の移動を触発させてローマ帝国を風前のともしびの運命の中に追いこんだ主人公である フン族が実は韓民族の一派なのが世界各地で発掘された遺物と史料を通じて明かされている.

このような驚くべきな歴史的主張に興味を持つ人も多いが, ‘何か馬鹿馬鹿しい音か’は反応を見せる人も少なくない. フン族と言う(のは)名前自体が私たちに疎い上に, 交通が発達しない西紀 4〜5世紀頃韓半島に住んでいた韓民族がどんなにヨーロッパを攻撃することができたのかは理由からだ.

しかし フン族が韓民族の一派という歴史的主張がすなわち韓民族がヨーロッパを直接攻撃したということを意味しない. フン族は匈奴(匈奴, 北方騎馬民族を通り名する)の一分派で, B.C. 3世紀から西紀 4世紀まで約 700年間中原地域をおいて中国と角逐戦をした.

が過程で匈奴は絶えず送ることを繰り返えした. この時匈奴に属していた韓民族源流の中で一部が西の方に進出しながら フン族で成長したし, また一部類は韓半島南部地域まで進出して現在の韓民族の一部になったというのだ.

このような主張は次のような点を根拠にしている.

フランスなど西ヨーロッパに暮している フン族の後裔たちからモンゴルまだらが発見されている. モンゴルまだらは尾骨高さの尻に現われる色素変色で遺伝学籍でモンゴル系統の民族から現われる身体的特徴だ. モンゴルまだらが韓民族にだけ現われる特徴ではないが, フン族 後裔たちがモンゴルまだらを持って生まれるという点を推し量る時韓民族と フン族は親戚の縁があると言える.

フン族は彼ら特有の芸脈角弓(〓貊角弓)を使った. 芸脈角弓は作ることばかり 5年, まともにうつために弓を煮ることばかり 10年がかかるが, 1分の内に 15発以上うつことができると知られた弓だ. フン族が芸脈角弓を使ったということはイタリア北部地域であるアクィルレイアに位置したクリープだアプレの時教会のフレスコ化が言ってくれる.

が絵には馬に乗った フン族が追撃して来るローマ騎兵を向けて弓を射る場面がある. ところでその姿が高句麗舞踊塚壁画に出る, 馬に乗ったまま滑路動物を狩る高句麗武士とまったく同じだ. 古墳の壁画に出る矢先は斧の日矢先なのに, この矢先は飛びながら回転するから目標物にささる瞬間の衝撃が非常に大きい. フン族もまさにこの斧の日矢先を使った.

慣習的な共通点も発見されている. フン族の骨相が偏豆(扁頭, ナブザックモリ)という事実だ. 学者たちはモンゴル地域からドイツチューリンゲンとオデンバルト, フランスカルバドス地方に至る フン族の移動経路で発見された墳墓から出た フン族の人骨を分析した結果, フン族はこめかみと額が珍しく押されていたし頭まわりに枷みたいなしわがぶんなぐったし, モリトングが長く増えている偏豆だと分かった. ところで伽揶国が創立した慶南金海でも便も頭蓋骨が発見された. また法興王など新羅の王たちも偏豆だったと言う. 崔致遠は新羅の国史ジズングデサの功徳費に法興王が偏豆だと記録した.

古代インドで行われた慣習, あるいはコーカサス北部地域に住む遊牧民たちの風習でも知られた偏豆は韓民族と連関性が大きい. ‘三国志’の ‘ウィジドングイゾン(魏〓夷伝)’には ‘辰韓(辰韓) 人は皆偏豆’という記録がある. また古朝鮮には早くから偏豆を作る風俗があったと言う. 偏豆は中国人とは区別される, 東夷(東夷)族の間に非常に長い間盛んだった風習で見られるのだ. ところで注目するに値する点は フン族には偏豆が発見されるが, 匈奴には発見されないという点だ. したがってヨーロッパを攻撃した フン族は便も習俗を持っている特殊不足で, 韓半島南部の伽揶及び新羅地域と親縁性(親縁性)があると類推することができる.

一方 フン族の移動経路では台・小型の冬服(cup cauldrons)が発見される. 遊牧不足場たちに捧げられた冬服は浄化意識(Purification rite)で肉をお供えで捧げる時使う東帝勇気で大型植木鉢のように見えた. このような冬服は伽揶時代古墳である慶南金海の大成洞と楊東里遺跡でも発見される. 冬服は伽揶国などの源流が北方の騎馬民族という証拠によく挙論されて来た. フン族は冬服を巻く残燈に積んで通ったが, 慶州市労動洞クンリョン塚で出土された騎馬人物像(国宝 91号) 土器にも言葉残燈に冬服を積んで通う姿が発見される. それにこの騎馬人物像の主人公たちも皆偏豆だ.

も フン族の冬服などで発見される文様は韓民族の金冠など頭飾り様式と似たり寄ったりだ. 我が国で出土された金冠には木形象(出(出)字形飾り)と鹿角形象(鹿の角飾り)が多い. これは北方民族たちにも現われる風習で北方民族が韓半島に移動して定着したことを言ってくれている.

北方遊牧民族の典型的な習俗である殉葬(殉葬) また伽揶地域の古墳を通じて立証されている. 特に金冠伽揶遺跡な大成洞古墳群 1胡粉では牛馬(牛馬)の頭を枕にして郭の上に上げておいたモックグァック(木槨)が発見されたが, おこる フン族を含んだ北方遊牧民族の動物犠牲行為と完全に一致している.

フン族が木に赤い布切れをつけて悪鬼が近付く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してくれと言って祈ったという記録と熊を平和のトーテムで崇拜したという点は我が民族が村語句に木像やソッデを立てて念願を祈って熊をトーテムにした点と非常に似たり寄ったりだ. 大多数遊牧民族たちは熊ではない他の動物を崇拜の対象とする. トーテム対象で一番一般的な馴鹿とかわうそなどは今までもモンゴル地域で崇拜の対象で思われる.

西の方の フン族, 東の韓民族

それなら古代韓民族の源流はどんな過程を通じてアジア大陸の フン族と韓半島南部の伽揶及び新羅人で別れるようになっただろうか. これは錦西皇帝の時から中国歴史に本格的に登場する匈奴の興亡盛衰と連携される.

匈奴は秦の国, そしてその後を引き継いだ一国と中原の覇権をおいて長期間にかけて血闘をした. そうするうちにB.C. 57年東と西に両分されてお互いに戦争をする. 西匈奴の鮮干(匈奴の王で ‘天の息子’を意味する)である負けるか(?支)が同匈奴のホハンヤに敗れると一族を導いてウラル山脈越しシルダリアガング中流に到着する. これが匈奴の第1次西天(西遷)だ. 負けるかはギョンゴン(ツガングとタルラスガングの間)を首都にする ‘雅正(牙庭)’と言う(のは)国を建てた. 西ヨーロッパはこの時を匈奴帝国出現の起源にしている.

一方中国に後漢(後漢)が立ち入りながらセガ不利さを感じたナムヒュングノ−は 48年ゴビ砂漠以南の 8個集団を導いて光武制(BC 6年〜AD 57年)を尋ねて投降した. 光武制はナムヒュングノ−に初めから内モンゴル領土を与えて投降しないブックヒュングノ−を牽制するようにした. そして 73年に至って漢拏というナムヒュングノ−と連合してブックヒュングノ−に決定的打撃を加えた. 敗北の苦杯をなめたブックヒュングノ−はアジアの北マックブック(漠北)に移動するのに, これが匈奴の第2次西天だ. ブックヒュングノ−は西域帝国を掌握した後その勢力を閨閤しながら一国との対決をはかる.

しかし漢拏という話題(和帝, 89〜105) 元年の 89年にもナムヒュングノ−を閨閤してブックヒュングノ−に決定的打撃を加えた. 致命傷を負って四分五裂されたブックヒュングノ−は大部分同好(東胡)で分離した士(鮮卑)に隷属した. しかし一部ブックヒュングノ−は天産山脈北にずっと用紙押さえしてペルがや盆地を通ってバルハシホとアラルして間のガングゴ(康居) 地に至った. これが匈奴の第3次西天だ.

匈奴と フン族を連結させるまた他の連結掛けがねは一国王朝が崩壊される頃に登場するナムヒュングノ−だ. 304年当時山墅の太原に席を取っていた柔軟(劉淵, ?〜310)恩津(晉)国ヒェゼによってナムヒュングノ−の王に冊封される. しかし柔軟は過去先祖の中に一国の王女があったことを根拠で自分が一国の後裔と立てて自らを皇帝に称した. 彼は 308年太原で北朝鮮(北漢, すなわち 前趙)を立てる. 318年ソックルック(石勒, 274〜333)は予兆を廃して候鳥(後趙)で知られた新しい匈奴国家を立てたし, 349年ソックミン(石閔)が候鳥の政権を取った. ソックミンは匈奴に恨みが多い韓人(漢人)らをけしかけて大大的な匈奴討伐に出るようにした後おおよそ 20余万名の匈奴が殺害されることを座視する.

匈奴としてはこれが決定的敗北だった. 中国に童話された匈奴と遊牧生活をした匈奴が連合したにも敗れると, 生き残った匈奴たちは新しい生の基盤を捜して西の方に逃げた. これが匈奴の第4次西天で, これらはもう 1〜3次にわたって西天した匈奴と合流(または圧迫)する. 弱り目に崇り目で 370年頃から残酷な寒波がだしぬけに襲撃すると匈奴はより西の方での移動を断行, 375年西ヨーロッパを攻撃するのに至る.

一方韓半島で フン族との親縁性が一番著しい地域は伽揶と新羅地方なのに, 中国との戦争渦中に フン族の支配集団の中で一部が冬天(東遷)して韓半島に定着した可能性が非常に大きい. ここで フン族の支配集団と言う(のは)遊牧民の受領(首領)が属した不足を言う.

学者たちは匈奴・同好・士・オファンなど北方騎馬民族たちの興亡が伽揶国の建立時期と似たり寄ったりだという点に注目する. ‘三国志’の ‘ウィジドングイゾン’によれば韓半島中南部地域には遅くても 1〜3世紀まで馬韓, 辰韓, 弁韓という三韓が存在していた. 3世紀中葉以後馬韓は百済で, 辰韓は新羅に統合されたし, 弁韓は 3世紀以後伽揶と言う(のは)名称を持つようになる. これは 3世紀末〜4世紀初に弁韓が伽揶社会に転換されたことを意味したりするが, 伽揶と言う(のは)国が新羅や百済と違い内部に多様な多くの国々を包括していることを見せてくれたりする. 学者に従っては伽揶の建立時期がB.C. 2世紀から紀元後 3世紀中葉までおおよそ 5世紀の差を見せるなど論難が多い.

学者たちは慶尚道の伽揶古墳で典型的な北方騎馬民族の遺物が発見されるというの自体が北方騎馬民族が韓半島に定着した証と主張する. 特に金冠伽揶は匈奴が直接韓半島に入って来て建てたという説もある. このようないくつかの点で推し量る時匈奴の中に含まれた韓民族の一派が西天して フン族で成長したし, また他の一派が同天下になって行くとなどで成長したという主張が説得力を得る.

結婚条件でローマの半分要求

一番広い対局を建設した歴史的人物を指折りなさいといえばチングギズ間とアレクサンダー大王, そしてアティルだと(Attila, 395〜453)が挙げられる. 世界 3大帝国を建設したアティルという高句麗広開土大王より 20年遅れた, フン族が西ヨーロッパを侵攻してから 20年がすぎた 395年にムンズクワングの次男で生まれた. アティルラの生涯はローマの歴史がプリスコスとヨルダネスによって比較的よく知られている.

ローマは フン族に供え物を与えて和親(和親)しながらゲルマン族を警戒した. これによって当時外交慣例どおりアティルという 410年頃から西ローマ皇帝ホノ−リオスが首都にしたラヴェンナ宮廷で育った.

434年王位あとがまだった叔父ルガーが死亡すると, フン族の伝統によってアティルという兄さんブルレダとともに王位に上がった. 新しい王として自分たちの力を対外的に誇示する機会を狙ったこれらは, 同ローマが フン族に送らなければならない供え物の納期をいつも破ると 435年同ローマで進撃した. ここに同ローマは供え物を二倍であげることに約束してアティルラと平和協定を結んだ. 引き続きアティルという西ローマから西ゴートに対する警さつ権を渡される. これで フン族はローマ帝国を追い抜いて事実上ヨーロッパの敗者(覇者)になったのだ.

443年ブルレに死亡するとアティルという フン族の単一リーダーになった. アティルラが支配した薫製国の統治権は南へはバルカン半島, 北ではバルト海の中, 洞ではウラル山脈, そしてお互いは現在のフランス地に至る実に広闊な領土に及んだ. 治下の種族だけでも 45個種族に達した.

この時アティルラを国際的戦争に跳びこむように女性一人が登場した. 西ローマ皇帝バルレンティニアヌス 3歳の妹であるホノ−リアがまさにその女人. ホノ−リアは 450年弟(妹)を皇帝席で押し出そうとする陰謀を企んでばれて同ローマの修道院に追放された. するとホノ−リアは幼い時からよく分かって過ごしたアティルラに自分の金の指輪を送って救援を要請した. 当時指輪を送ることは求婚を意味した. アティルというここにバルレンティニアヌス 3歳にローマ帝国の半分を結婚持参金で要求した. しかしバルレンティニアヌス 3歳はアティルラの要請を断ってホノ−リアを他の男と結婚させた.

西ローマに裏切られたと思ったアティルという 451年, 現在のベルギーとフランスのメッツ, ランス, オルレアンなどに至るガリア地域を攻撃した. アティルラの軍隊は破竹の勢いで西ローマ中心まで進撃した. すると西ローマはアティルラの友達と同時に ‘最後のローマ人’と呼ばれるアエティウスを総司令官で任命, フン族と敵対関係にあるゲルマン族たちを閨閤してアティルラに対抗した.

451年 6月20日, フランストルアシ(市)では世界 15大戦闘の中で一つで数えられる ‘サロン大戦闘’が起った. それぞれ 20万名にのぼる大軍が参戦して 15万名の戦死者を生んだ大規模戦闘だった. しかし勝負は付かなかった.

アティルというサロン大戦闘後パンノ−ニア(現在のハンガリー)で撤収してから翌年の 452年また西ローマを侵攻した. 今度はイタリア半島が標的になった. アティルというアクィルレで占領を始まりに巴豆, ベロだね, 皮痺など北がタリア全域を荒した. 当時 フン族の攻撃を避けて海岸地域で避難したローマ人たちが ‘ベイネティアム(Veni etiam, 私もここへ来た)’と叫んだが, ヴェネチアと言う(のは)地名がまさにこの言葉で由来したと言う.

いつわりでむなしい滅亡, ヨーロッパの憎しみ

しかしアティルラと フン族の終末はあまりにもいつわりでむなしかった. 453年, アティルというイルデ−コ(あるいはヒルデ−コ)だと呼ばれるゲルマン諸侯の娘と結婚したが, 結婚式翌日朝冷ややかな死骸で発見された. ゲルマン族の有名な代書斜眼 ‘ニベルルングゲンの歌’にはクリームヒルトと言う(のは)名前と呼ばれるイルデ−コが自分の家族が フン族に殺害されたことに恨みを抱いて眠ったアティルラを殺害したことに描写された. しかし学者たちはアティルラが結婚式日飲みすぎで窒息したとか後継者問題を巡った暗闘に殺害されたことで推正している.

力強いリーダーであるアティルラが死ぬと彼の息子であるデンギジクが フン族のリーダーになった. しかし多くの不足で構成された薫製国は分裂し始めたし, 469年同ローマに恥辱的な敗北に喫した後歴史で消えた.

同ローマに敗れた フン族の大多数はカスピ海北部で帰郷した. しかし一部は遊牧生活をあきらめてロシア南側とクリーム地域に定着した. またいくつかの不足たちはフランスとスイス地域に位置づいた. この時 フン族の一部がバルラニアに居残ってから後日マザルインドルと合わせハンガリー民族を構成したことに推定される. 今もトランシルバニア(現ルーマニア)のセケルリゾックは自分たちが フン族 アティルラの子孫だと信じている. ドラキュラ伯爵伝説が伝わって下るルーマニアではアティルラを力強い力を持ったドラキュラ伯爵の援助に思っている.

アティルというおびただしいカリスマを持った, 世界歴史上何人にならない支配者中の一人だ. 子供達は彼の名前で連想する力強さと情熱, そして巨大な力に魅力を感じる. アティルラが破壊と掠奪だけ事としなかったという事実が神秘感を加えてくれたりする. アティルという巧みな交渉を通じて相手から多くの情報を得る外交的手腕も発揮した. 当時世界最高の文明国家であるローマを相手でサドルに座ったまま自分の主張を貫徹させたし, ホノ−リアとの結婚持参金で西ローマの半分をつけなさいという対談性も見えた.

しかしアティルという同時にヨーロピアンたちからしんらつな非難を浴びている人物中の一つだ. ヨーロッパの小説, 演劇, オペラなどで残忍な暴君で出る常だとの. ダンテは ‘新曲’ 中地獄の方第12曲で地獄で苦しんでいるアティルラを描いた.

1968年 1月23日原産沖合でアメリカ艦船プエブルロホが拿捕された時アティルというもう一度世人の口に上った. 北朝鮮に拿捕されたプエブルロホ船長リオドボチォは北朝鮮側に “アティルだと以来一番賢明ではない行動”と言いながら謝罪した. このようにアティルラが西洋人たちから残酷な非難の対象になるわけはアジア人である彼がドイツ, フランス, イタリアなどヨーロッパの心臓部を踏み躪るなど彼らの自尊心を踏み付けたからだ.

しかし今まで フン族と韓民族はお互いにどうこうな関係がないことのように思って来た. おこる フン族の源流が匈奴(モンゴル係-トルクギェ)だと言っても, フン族の支配集団は西洋係トルク民族だと推正したからだ.

しかし歴史学者たちは匈奴がモンゴルとツングース, その他北方民族のホンハブチェだが匈奴の言語特性を研究した結果彼らの政治的支配集団はトルク系列だと推正する. シラトリうそ旗印を含めた学者たちは匈奴がトルクではないモンゴル系列だと主張しながらも匈奴がトルク系列の特徴を持ったというやけどする同調する.

フン族はアジア係民族


の上で時計方向で伽揶・新羅古墳と類似の北方民族のクルガン, フン族の冬服, 金海大成洞で出土された冬服, フン族の便も.
トルクインは漢字では突厥(突厥)で表記して西戎(西戎)に属する. トルクは 6世紀中葉モンゴル係遊牧民の影響力から脱した後 1493年コンスタンティノープルのビザンチン帝国を滅亡させてオスマントルク大帝国(現在のトルコ)を成した.

ギリシアの歴史が弔詩モールスは フン族を称えて ‘形態ない石ころである顔を持った’と ‘色が暗くて, 目代わりに暗い穴が二つ出ていて, 鼻は平たくて, 頬に傷がある’と記録した. ここで ‘目代わりに暗い穴が二つ出ていて(目が小さいという意味) 鼻がペチャンコだ’と言うのは東洋人の顔を表現したことに違いない.

クレルモントの司教時ドニー有珠アポルリナリスも フン族にひどい拒否感を見せて ‘身体的でも精神的でも彼らは嫌悪感を与える. 彼らの鼻は模様がなくて平たくて, ほお骨は飛び出した. 二つの目にはまぶたがやや小く開かれていて光線が辛うじて入って行くほどだが, 突き通して見るこの目はずっと遠い所を見られる’と書いた. この説明も西洋人ではない東洋人の顔であるわけだ.

一番注目するに値する資料はギリシアであるプリスコスが描いたアティルラの姿だ. プリスコスは 449年同ローマ使節団の一員でアティルラの宮廷に泊まって彼と何回対面した. プリスコスは現在一部分だけ残っている ‘ビザンチウム社’ 7冊でアティルラを典型的な フン族の姿で描いた. 彼はアティルラを ‘柄が小さくて胸が広くて頭が大きかった’と説明しながら ‘目は細く破れたし鼻は平たかったしほお骨が飛び出したし髪の毛が少ないあごひげを持っていた’と言った.

司馬遷も匈奴を典型的な東洋人の姿で描いた.

‘身体は小さいけれどがんがんした方で, 頭はとても大きくて丸くて, 顔面は広くてほお骨が飛び出した. 髪の毛は全部刈ってやっと脳天にだけ残っている. 眉毛は濃くて瞳は燃えるように強烈で目は裂けたようだ.’

一方匈奴の子孫であるフワル(後越)の太子手陣(孫珍)が韓人(漢人)の市中(侍中)である催薬(崔約)と言う(のは)者に負けない治療法を質問したエピソードは, モンゴル人と中国人の外貌が区別されることを見せてくれる.

手陣が “目をどんなに水に浸るようにできるのか”と質問すると催薬は “あなたの目はぽこんと入って行ってすぐ水に浸ることができる”と答えた. この言葉を聞いて頭に来た手陣は催薬金持ちを殺害したと言う. このエピソードによれば匈奴である手陣は韓人と違い目はぽこんと入って行って鼻は高かった.

このように匈奴に対して司馬遷は東洋人で, 催薬は西洋人で描いたが, 多くの不足たちが広大な領土を持った匈奴がお互いに違う姿をした人々に構成されたということは変な事ではない.

トルクインドルが建設したオスマントルク帝国の子孫トルコ人たちと韓国人は外貌からはっきりと区別される. トルコ人の体格はヨーロピアン, 特に古代ローマ人に比べて決して小さな方ではない. 鼻もヨーロッパである位高い. しかし同ローマ皇帝たちが フン族のリーダーをアルタイ語で ‘強い人’を意味する ‘トルク王子’と呼んだから フン族がすぐトルクゾックだと見当がついた. なおかつ歴史的でもトルクインが結束された種族で浮び上がった時期は フン族がヨーロッパで進出した時より 200〜300年遅い 6世紀からだ.

60万名にのぼる常駐軍を置いた西ローマ帝国は野蛮族であるゲルマン族によって 476年滅亡する. しかしヨーロピアンたちが自尊心傷害することはゲルマン族を追い出した張本人がゲルマン族よりもっと野蛮的な フン族と言う点だ.

しかしヨーロッパの史家 フン族によってまた使われたという事実自体を否定す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ヨーロッパ歴史学者たちはちょっといかがわしい態度を見せる. フン族がヨーロッパを侵攻して帝国を立てたりしたが フン族のヨーロッパ支配がやっと 100年(375〜469)に過ぎなかったと自慰するのだ.

東・西洋活躍した私たちの先祖

フン族の移動経路で発見された考古学籍遺物及び史料たちを韓民族のそれと連結させて見る時 フン族の支配集団を韓民族だと見られる根拠は十分だ. これは韓民族として非常に重要な意味を持つと思う.

4〜5世紀頃で逆って上がって見よう. 西洋では フン族がローマ帝国を踏み躪ったし, 東洋では高句麗がアジア東北部屋の広大な領域を支配した. 勿論 フン族は高句麗よりは伽揶(弁韓) 及び新羅(辰韓)ともっと近い関係に推定されるが, これら皆は韓民族だ. アティルラを韓民族の先祖と見做す時私たちは 4〜5世紀頃それぞれ西洋と東洋で敗者に君臨した堂々な二人の先祖, アティルラと広開土大王を得るようになること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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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KO 255 Member_5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