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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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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軍 조선처녀로 ××× 만들어 먹여"
 
[연합뉴스 2005-04-27 13:25] 
 
 
 
北 생존 위안부 박영심 할머니 증언

(서울=연합뉴스) 문성규 기자 = "요구에 응하지 않은 조선처녀를 죽여 가마솥에 넣어 끓인 뒤 그것을 고깃국이라고 속여 먹였습니다."

북한에 생존해 있는 한 위안부 할머니가 일본군의 끔찍한 만행을 증언, 다시 한번 일제의 잔혹성을 일깨우고 있다.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27일 `일본을 고발한다-강제연행 피해자들의 증언"이라는 연재물의 첫 번째 순서로 박영심(83) 할머니의 사연을 소개했다.

박 할머니는 체험담에서 "일본놈들이 어느날 `너희들이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있으니 오늘은 고깃국을 대접하겠다"면서 고깃국을 주었다"면서 "영문도 모르고 다 먹었더니 놈들은 그 고깃국이 `조선처녀의 고기로 만든 국"이라며 껄껄 웃어댔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는 "(일본군은) 저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처녀를 죽여 가마에 넣어 끓였다고 했다"며 "일본놈들은 정말로 짐승같은 놈"이라며 치를 떨었다.

그가 위안부로 끌려간 것은 꽃다운 나이인 17살 때(1938년).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와 탄광 인부로 일하는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다가 14살 때 평안남도 남포시 후포동의 한 양복점의 식모로 팔려나갔다.

그러던 1938년 3월경 일본순사가 나타나 "좋은 일자리가 있으니 소개해 주겠다"고 해 "부모님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저항했으나 다짜고짜 기차에 실어 어딘가로 데려 갔다.

그 곳은 중국 난징(南京)이었다.

난징에는 일본군 병영들이 많았으며 그 병영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금수로 위안소"가 있었다. 위안소는 3층으로 된 벽돌집이었으며 각 방의 크기는 가로 세로 2X2.5m로 방에는 침대가 하나씩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소름이 끼쳤으나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랐다. 잠시 후 일본군인이 방에 들어와서야 무엇을 당하는가를 알아차렸으나 절대로 응하지 못하겠다고 저항했다.

그러자 마구 때리고 차면서 마지막에는 긴 칼을 뽑아 목에 들이대고 "이래도 응하지 못하는가"라고 위협했다.

그 날부터 하루에 일본군인 30여명을 대상으로 `성봉사"를 해야만 했으며, 하도 힘들어서 응하지 않으려고 할 때도 여러 번 있었는데 그들은 다짜고짜로 때리고 차고 때로는 칼로 찌르기도 하면서 그들의 수욕(獸慾)을 채웠다.

박 할머니는 "힘든 생활이 계속되어 아편을 먹고 견뎌보려고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며 "죽을래야 죽을 수 없고 살래야 살 수도 없어 정말로 기가 막혔다"고 당시의 기구했던 운명을 술회했다.

조선신보는 박 할머니가 중국 내의 여러 위안소에 끌려다니다가 광복을 맞아 한 중국인의 도움으로 고향에 돌아왔으며 그후 박 할머니는 자궁을 들어낸 데다 심장판막과 신경쇠약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박 할머니는 지금도 한밤중에 그때의 일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면 흠칫 놀라 잠에서 깨어난다며 "원한을 풀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절규했다고 조선신보는 덧붙였다.

moonsk@yna.co.kr (끝)<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정말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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慰安婦お婆さんの証言を見よう

日軍 朝鮮娘で ××× 作って食べさせて
 
[連合ニュース 2005-04-27 13:25] 
 
 
 
北 生存慰安婦バックヤングシムお婆さん証言

(ソウル=連合ニュース) ムン・ソンギュ記者 = 要求に応じなかった朝鮮娘をおかゆよ釜に入れて沸かした後それを故カラー国だとたぶらかしました.

北朝鮮に生存している一慰安婦お婆さんが日本軍の無惨な蛮行を証言, もう一度日製の残酷性を悟らせている.

在日本朝鮮人口連合会(総連) 機関紙朝鮮新報は 27日 `日本を告発する-強制連行被害者たちの証言¥"という続物の一番目手順でバックヤングシム(83) お婆さんの事情を紹介した.

朴お婆さんは体験談で日本の人々がある日 `君たちが食事もろくにできないから今日は故カラー国をもてなす¥"と故カラー国を与えたとしながら英文も分からなくてすべて食べたらやつらはその故カラー国が `朝鮮娘の肉で作ったお吸物¥"と言いながらからから笑ったと言った.

朴お婆さんは (日本軍は) 彼らの要求に応じなかった娘をおかゆよお御輿に入れて沸かしたと言ったと日本の人々は本当にけだものみたいなやつと言いながらあまりにも嫌いだった.

彼が慰安婦に引かれて行ったことは美しい年である 17歳の頃(1938年). かつてお母さんを死に別れて継母と炭鉱人足で働くお父さんもとで育っている途中 14歳の時平安南道南浦市フポドングの一洋服屋の家政婦で売れて行った.

そうした 1938年 3月頃日本巡使が現われて良い働き口があるから紹介してくれると言ってご両親に聞いて見なければならないと抵抗したがいきなり汽車に積んでどこかに連れて行った.

その所は中国南京(南京)だった.

南京には日本軍兵営たちが多かったしその兵営で約 500m 落ちた所に `禽獣で慰安所¥"があった. 慰安所は 3階になった煙瓦集だったし各部屋の大きさは横縦 2X2.5mに部屋にはベッドが一つずつあった.

部屋に立ち入ると身の毛がよだったがあと何の事が起るかは分からなかった. しばらく後日本軍人が部屋に入って来てからこそ何にあうかを見抜いたが絶対に応じることができないと抵抗した.

するとでたらめに殴って車ながら終わりには長い刀を選んで首に突き付けてこれでも応じることがモッハヌンがだと脅威した.

その日から一日に日本軍である 30人余りを対象で `ソングボングサ¥"を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し, あまりにも大変で応じないようにする時も何回あったが彼らはいきなり殴ってガレージの時では刀で突いたりしながら彼らの水浴(獣慾)を満たした.

朴お婆さんは大変な生活が続いて阿片を食べて耐えて見ようと思ったが無駄だったと死にたくても死ぬことができないし暮したくても肉数もなくて本当に開いた口が塞がらなかったと当時の数奇だった運命を述懐した.

朝鮮新報は朴お婆さんが中国内の多くの慰安所に引っぱれている途中光復をふさわしがった中国人の助けで故郷に帰って来たしその後朴お婆さんは子宮を持ち出したうえに心臓弁膜と神経衰弱で苦痛の日々を過ごしていると伝えた.

特に朴お婆さんは今も真夜中にあの時の仕事が頭をすれちがえばはっと驚いて眠りで覚めると恨みを晴らす前には絶対に死ぬことができないと絶叫したと朝鮮新報は付け加えた.

moonsk@yna.co.kr (終り)<著作権者(c)年間合ニュース. 無断転載-灰梨砲金地.> 

本当に無残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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