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작년 청뚜(成都)에서 열린 "2000 국제서부포럼 기자회견장에서 질의에 답변하는 왕지엔밍씨.
그동안 간간이 알려졌던 중국의 "동력대왕"(動力大王) 왕지엔밍(王建明·55)씨의 내력이 근착한 《중국서부》(中國西部)에 상세히 보도되어 흥미를 끌고 있다. 이미 지난 1999년 7월 베이징에서 발행되는 《중화공상시보》에 왕씨가 "한국에서 국회의장을 지낸 해공 신익희 선생의 손자"라고 보도되면서, 일부 한국 언론에서도 주목을 받았었다. 허나 그의 내력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었다.
현재 왕씨가 회장(董事長)으로 재임하고 있는 광시위차이(廣西玉柴)기계집단은 1994년 12월 뉴욕증시에 상장될 정도로, 고성장과 고수익을 내는 중국의 대표적인 국영기업. 지난 10여년간 중국의 내연기관 부문에서 매출액과 수익에서 줄곧 1위를 독차지하는 위차이가 오늘과 같은 도약의 날개를 달은 것은 85년 왕씨가 공장장을 맡으면서부터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위차이는 동종기업 순위 173위로 일개 성의 작은 국영기업에 불과했다.
전체 노동자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공장장에 선임된 왕씨는 먼저 솔선수범 하는 자세로 나태하고 안일주의에 젖은 공장 내 작업분위기를 일신하였다. 여기에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평생동안 기차조차 보지 못했던 일자무식의 지식수준 향상을 위해서, 다양한 학습반을 개설하고 지식경연대회를 개최하는 등 전력을 기울였다. 이에 85년 2000명 전 직원 중 겨우 56명이었던 대학졸업자는, 지난 해 석사학위 취득자 28명, 대졸자 400명, 고급엔지니어 324명 등 놀라운 인재 배양능력을 과시했다.
또한 93년부터는 다른 중국의 국영기업이 상상도 못했던 근무에 있어서의 각종 인션티브제도를 시행했고 노동자들을 위한 다양한 복리후생시설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에 끝나지 않고 왕씨는 스스로 업무 외 시간에도 변화하는 세계 조류를 주시하여, 국내외 시장환경을 깊이 연구하고 끊임없이 자기발전에 전념했다. 이러한 왕씨의 다각적인 노력에 의해 위차이는 해마다 연간 60%씩 성장하여, 2000년 현재 매출액 23.4억위안(우리돈 3300억원), 이윤 4.8억위안에 이르는 고속성장을 기록했다.
왕지엔밍씨의 부친은 해공의 외아들인 고 신하균씨. 중일전쟁 말기 상하이에서 충칭으로 이전한 임시정부에 근무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신씨는, 중국의 저명한 학자인 궈모루(郭沫若) 아내의 여동생인 위리런(于立人)씨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다. 해방후 환국하는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왔던 위씨는 고향에 대한 향수병을 이기지 못해, 46년 9월 두 아들과 데리고 중국으로 되돌아왔다. 당시 위씨는 귀국 길에서 일본을 경유했는데, 이 때 동경만에서 낳은 막내아들이 바로 왕씨이다.
그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한·중 양국이 적대관계로 변하면서 신씨와 위씨간에는 소식조차 끊기게 된다. 모친 슬하에서 굳세게 자랐던 왕씨는 지난 68년 상하이교통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자발적으로 하방하여 "전국노동자모범"으로 뽑혔고, 개혁개방 후에는 "5·1 노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96년에는 전국 우수기업가로 선정된 경력도 지니고 있다.
지난 1993년에야 두 형과 함께 한국을 처음 찾은 왕지엔밍씨는 이미 고인이 된 조부와 부친의 묘소에서 눈물을 뿌릴 수밖에 없었다. 신하균씨의 맏아들인 충칭(重慶)씨는 현재 티엔진(天津)대학 화학과 교수로, 둘째인 지엔핑(建平)씨는 티엔진댐 건설설계원 부원장을 맡고 있다. 지엔밍씨를 비롯한 해공의 손자들이 왕씨 성을 가진 것에 대해서 《중국서부》는 "1919년 신익희 선생이 일제의 폭압적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투신할 당시 성을 왕으로 바꾸었다"며 "주변 사람들은 신선생을 왕하이(王海)라고 불렸다"고 전했다.
《중국서부》는 또한 "왕지엔밍은 중국 서부지역을 대표하는 선진적인 기업가로, 위차이의 성공적인 기업개조는 전적으로 왕의 공로"라고 추켜세우며, "왕은 중국과 한국에 뒤얽긴 비극적인 가족사를 딛고 일어서 양국 간의 우호를 더욱 돋독히 할 인물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