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남자는 이름을 바꿨다. 이름 끝 자의 ‘야(或)’를 같은 발음의 ‘야(也)’로 바꾼 것이다. 개명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그렇게 하면 행운이 따르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자에게 ‘행운’이란 무엇이었을까. 야구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자신이 필요할 때까지 마운드에 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길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불안했다. 구위는 예전 같지 않았다. 체력은 조금씩 달렸다.
불행은 그때 찾아왔다. 2009년 시즌 도중 스트레칭을 하다가 목을 삐끗한 것이다. 통증은 머지않아 왼팔로 전달됐다. 웬일인지 팔이 저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괜찮겠지.’ 했다. 그러나 팔 저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남자는 시즌 중반 2군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남자는 프로 통산 9시즌 동안 32승19패 92홀드 평균자책 3.21을 기록한 특급 불펜이었다. 게다가 2007년에는 무려 38홀드를 올리며 주니치 드래건스를, 이듬해인 2008년에는 18홀드를 거두며 세이부 라이온즈를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우승 청부사’였다. 남자는 조만간 1군에 오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시즌이 끝날 때까지 남자는 1군 마운드를 밟지 못했다. 10월 2일 소속팀 세이부는 남자를 방출했다. 남자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1달 후 열린 12개 구단의 트라이아웃에 응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남자의 손을 놓은 지 오래였다. 쓸쓸히 돌아서는 남자를 한국야구 관계자가 불렀다. “혹시 오카모토 신야 씨 아닙니까?”
12개 구단의 트라이아웃에서 이름이 불리지 못했다. 현역 생활이 막을 내리는가 싶을 때 LG에서 영입제의가 온 것으로 안다.
오카모토(이하 오) : 2009년 목이 아픈 통에 왼쪽 팔 저림 현상이 심했다. 그 때문에 투구도 예전 같지 않았다. 하지만, 재활로 상태가 호전되고 있던 터라 재기를 의심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어디 사람 마음이 다 똑같나. 세이부는 재기 가능성을 의심한 것 같다. 다른 구단도 비슷하게 본 것 같고…. 그때 LG에서 영입 제의가 왔다.
이전까지 한국야구를 얼마나 경험했나.
오 : 2년 전 세이부 시절 코나미컵에서 SK와 맞붙은 적이 있다. 당시 지금은 동료인 이진영에게 대형 홈런을 맞았다. 그 정도면 충분한 경험 아닌가(웃음). 평소 일본야구와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고, 대표팀끼리 싸울 때면 되레 일본보다 낫다는 느낌도 받았다.
한국야구에 대한 연구는 어떻게 진행했나.
오 : 한국야구를 잘 아는 주변 야구인들에게 조언을 많이 구했다.
주로 뭐라고 조언하던가.
오 : 선수 개개인의 정보보다는 한국 타자들은 웨이트트레이닝을 많이 해 힘이 좋으니 속구로 가볍게 승부를 겨루다간 홈런 맞을 확률이 높다고 했다. 특히나 한국 타자들은 선구안이 좋아 단조로운 투구패턴을 가져가면 바로 배트가 나오니 공 배합에 신경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살짝 웃으며) 그 밖에도 몇 개가 더 있긴 한데.
몇개?
오 : 한국야구를 잘 아는 지인들이 그러더라. “한국에선 견제를 많이 하면 좋지 않은 소릴 들을 수 있다”고. 그거 있지 않나. (어렴풋한 한국말로) “마!”라고(웃음).
2008시즌이 끝나고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 미국에 갔을 때의 가도쿠라. 당시 일본야구계는 가도쿠라의 메이저리그 진입을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은 그 역시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러나 그는 "노력은 매일의 시행착오"라고 믿던 이였다. 그런 자세가 있었기에 37살의 나이로 한국에서 제2의 전성기를 달리는 것이다. 도전해 실패하면 후회하지만, 도전하지도 않고 주저앉으면 후회조차 할 수 없다(사진=가도쿠라 HP)
# 2008년 겨울. 사내는 미국행 항공권을 샀다. 주변에선 “크리스마스를 미국에서 보낼 예정이냐?”라고 물었다. 속 모르는 소리였다. 사내는 살려고 미국행을 선택했던 참이었다. 순간,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1995년 신인 드래프트 2순위로 주니치에 입단한 사내는 긴테쓰 버펄로스(현 오릭스)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를 거치는 동안 팀의 주축 투수로 활약했다. 2005년엔 개인 최다승인 11승과 역시 개인 최다 탈삼진(177개)을 기록하며 센트럴리그 탈삼진왕에 올랐다.
다음 해에도 10승을 거두며 2년 연속 10승 이상을 기록한 사내는 요코하마에 남길 원했다. 그러나 요코하마는 잡을 생각이 없었다. 2007시즌 정든 요코하마를 떠난 사내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둥지를 틀었다. 사내는 요코하마에 복수를 다짐했다. 그러나 악수(惡手)였다.
2007, 2008시즌 동안 사내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2008시즌이 끝나고 요미우리는 사내에게 연봉 감액 제한 25%를 훨씬 넘는 금액을 깎겠다고 나섰다. 사내에게 연봉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마운드에 서는 기회만 많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요미우리는 난색을 나타냈다. 그러다 결국.
요미우리와의 재계약이 결렬됐다. 사내는 고민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사내는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기로 한다. 미 메이저리그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2009년 1월 사내는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시범경기에서 6경기 동안 3실점으로 호투했다. 하지만, 그에게 "기회"는 낯선 단어였다. 메이저리그 개막 직전 컵스로부터 방출을 통보받았다. 세상의 끝에 선 그에게 그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었다. "가도쿠라 켄 군, 한국에서 뛸 생각 없나."
메이저리그 진출이 좌절되고 당신에게 손을 내민 이가 누구였나.
가도쿠라(이하 가) : (담담한 목소리로) 김성근 SK 감독님이었다.
김 감독이 직접 SK 입단 제의를 했나.
가 : (고개를 끄덕이며) 2008년 12월, 컵스에 입단 테스트를 하러 가기 전이었다. 김 감독님이 SK 우승여행 중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 도쿄로 오셔서 나를 찾으셨다. 그때 감독님을 처음 뵙다. 당시 감독님께서 한국 야구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셨다. 말씀을 들어보니 일본야구와 닮은 게 많았다. 솔직히 이전까지는 한국야구에 큰 관심이 없었다. (혼잣말을 하듯) 어떻게 해서든 메이저리그에 가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제의를 받아들였나.
가 : 그렇지 않다. 당시 감독님께 “메이저리그 진입에 도전하기 때문에 죄송합니다”하고 정중히 제의를 거절했다.
하지만, 미국 진출은 좌절됐다. 김 감독의 제의가 아쉬웠을 법도 하다.
가 : (엄숙한 표정으로) 실의에 빠졌을 즈음, 김 감독님이 다시 입단 제의를 하셨다. ‘아직도 부족한 내가 필요한 분이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흔쾌히 감독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래도 막상 한국에 간다니 고민이 많았을 듯싶다.
가 : 고민? 글쎄. 우선 감독님을 믿었고, 한국에서 야구를 배우자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한국야구를 배우겠다라, 여느 외국인 선수에게도 듣지 못했던 말이다. 어쨌거나 한국프로야구는 일본프로야구와는 스타일이 다르다. 따라서 당신 같은 외국인 선수는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리그에 대한 정보 입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국야구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였나.
가 :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이용규(KIA)가 일본전에서 외야 플라이를 잡고 무릎을 꿇으며 기뻐하던 걸 봤다. 야구에 임하는 자세가 대단히 정열적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솔직히 한국 대표팀 선수 정도만 알았다. 대표팀 선수를 제외하곤 다소 실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예상했다. 자신도 ‘한국은 어떤 야구를 할까?’ 궁금한 마음으로 한국에 왔다.
지난해 가도쿠라는 28경기 가운데 23경기에 선발등판해 8승4패 1세이브 평균자책 5.00을 기록했다. SK 김성근 감독이 바란 성적과는 거리가 있었다. 야구전문가들도 “실망스럽다”는 평가를 쏟아냈다. 한때는 일본인 선수로는 드물게 2군행을 통보받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난 시즌 중반 김 감독으로부터 2군행을 통보받은 적이 있다.
가 : 김 감독님은 처음에 거절했음에도 상관하지 않고 2번이나 영입 제의를 하셨던 분이다. 시즌 초반 불안한 투구를 할 때도 날 믿고 기용하셨다. 광주 KIA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경기에서 꼭 이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호투하지 못했다. 자신을 향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감독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게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마운드에서 발길질했다.
김 감독은 마운드 위에서의 발길질을 용납하지 않는 야구인이다. 그것을 마운드에 대한 모독이라고 느끼니까.
가 : 결코,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2군에 내려가고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마운드 위에서의 발길질에서 보듯 한국과 일본야구는 문화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실제로 한국 타자들과 상대했을 때도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것과 큰 차이가 있었을지 싶다.
가 : 하나같이 대단한 선수들이었다. 무엇보다 타자들은 힘이 장사였다. 세밀한 야구를 지향하는 일본에 반해 한국은 확실히 미국과 가까웠다. 하루하루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가장 대단했던 선수가 누군가.
가 : 올 시즌부터 지바롯데 마린스에서 뛰는 김태균이다. 정말로 훌륭한 타자였다. 속으로 ‘이 선수가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하면 얼마나 좋은 성적을 낼까’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야구장 풍경도 한국과 일본은 무척 다르다.
가 : 내야 관중석에서 치어리더가 춤추는 걸 처음 봤다(웃음). 응원문화도 정말 정열적이다. 관중의 열띤 응원을 보다 보면 3시간이 후딱 지나가는 것 같다.
더러의 외국인 선수들은 야구장 밖에서의 부적응으로 고전하기도 한다.
올해부터 운전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운전이 좀 거친 편이다. 경적도 잘 울리고(웃음). 동료 보면 식사도 금방 해치운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았지만, 요즘은 차이를 즐기는 중이다(웃음).
지난 시즌 고전했다. 재계약 여부가 불투명하기까지 했다. 가장 큰 부진의 이유는 무엇이었나.
가 : 지난해는 한국야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마운드에 서면 늘 불안했다. 불안하니 생각도 많아지고. 음, 몸도 정상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나를 다시 또 잡아준 이가 바로 김 감독님이었다.